대비과(大比科)라고도 하였다. ‘대비’라는 것은 『주례(周禮)』에 “3년은 ‘대비’로 이 해에 그 덕행과 도예(道藝)를 고찰하여 현명하고 유능한 자를 뽑아 관리로 등용한다.”는 문구에서 나왔다.
『속대전』 이전에 대비과라 하던 것을 『속대전』 이후부터 자(子) · 묘(卯) · 오(午) · 유(酉)가 드는 해를 식년으로 하여 과거 시험을 설행(設行)하게 됨에 따라 비로소 식년시가 되었다.
식년시에는 크게 소과(小科) · 문과(文科, 혹은 大科) · 무과(武科)가 있는데, 이를 부정기시(不定期試)인 증광시(增廣試) · 별시(別試) · 알성시(謁聖試) 등과 구별하였다. 소과의 경우 생원 · 진사의 복시, 문과는 복시 · 전시, 무과는 복시 · 전시, 잡과는 역과(譯科) · 의과(醫科) · 음양과(陰陽科) · 율과(律科)의 복시를 식년에 시행하였다.
이 제도의 시작은 1084년(선종 1)의 일이지만 조선시대 이전에는 그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1393년(태조 2) 이후부터 비로소 제도적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도 국가적인 변고나 국상(國喪) 혹은 그 밖의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경우, 이를 연기하거나 시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식년시는 그 해 1월에서 5월 사이에 시행하는 것이 초기의 예였다. 그 뒤 시험 관리의 문제, 시험 기간의 촉박성, 농번기와 겹치는 피해 등의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한 개선책이 마련되었다. 이에 생원 · 진사의 초시는 식년 전해 8월 15일 이후에, 문과 · 무과의 초시는 같은 해 9월 초순에 각각 실시하되 생원 · 진사의 복시와 문과 · 무과의 복시는 식년의 2월과 3월에 각각 실시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과거제에서 무엇보다 중시된 문과의 경우 식년시의 급제 정원은 33인이었는데, 이것은 불교의 33신(身)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시행된 식년문과는 총 163회에 걸쳐 6,063인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이 통계에 따르면 1회 평균 36인이 되므로 1회 33인의 원칙이 반드시 지켜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무과의 경우 식년시의 급제 정원은 28인이었다. 잡과는 식년시에 역과 19인, 의과 1인, 율과 9인, 음양과 9인 등 모두 38인이 합격 정원이었다. →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