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일정한 시험을 거쳐 관리로 등용하는 제도이다. 958년(광종 9)에 고려 광종이 군주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처음 과거제를 실시하였다. 고려시대의 과거는 제술업, 명경업, 잡업으로 구분된다. 제술업과 명경업은 양대업이라 하였다. 잡업은 기술관 등용을 위한 시험이었다. 조선시대에 과거는 문과, 무과와 역과 · 의과 · 음양과 · 율과로 이루어진 잡과, 생원 · 진사시가 있었다. 문과와 무과는 같이 실시하였으며,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식년시와 증광시, 별시, 정시, 알성시 등의 비정기 시험이 있었다.
관리를 등용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일정한 시험을 시행해서 선발하는 과거와 취재가 있었고, 가문의 음덕에 힘입어 관리를 선발하는 음서, 다른 사람들이 추천하는 방식의 천거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관리 등용 방식은 음서와 과거였다. 음서가 가문과 혈통을 중시한다면, 과거는 자질과 능력을 중시하였다. 시대가 내려올수록 음서보다는 과거의 비중이 커졌다.
근대 이전에 시험을 치러 능력 있는 자를 관리로 등용하는 과거제는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중국과 한국 그리고 베트남에서 시행되었을 뿐이었다. 과거제가 처음 실시된 것은 587년 중국 수나라 문제 때이다.
우리나라에 과거제가 도입된 것은 958년(광종 9)으로, 고려의 광종이 군주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처음 과거제를 실시하였다. 과거제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천여 년 동안 대표적인 관리 선발 방식으로 기능해 왔다. 왕조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시행 절차와 내역에서 변화가 있었지만 개인의 능력을 기준으로 관리를 선발한다는 측면에서는 성격이 다르지 않았다.
과거제는 중국 수나라에서 시작되었으며 당나라를 거쳐 송 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시험을 통해서 관리를 선발하였던 만큼 무엇을 통해서 능력을 확인할 것인지가 중요한데, 주로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으로 능력을 가늠하고자 하였다.
과거제는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확립하는 데 적합한 제도이다. 음서제가 귀족들의 이해에 부합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귀족의 기득권을 제한하고 왕권을 높이고자 하는 데 적합한 정책이자 능력 있는 사람들을 등용하는 데 걸맞은 인재 선발 방법이었다.
수나라 문제가 과거를 실시한 목적은 국가에서 농민을 직접 지배하여 문벌 편중의 폐단에서 벗어나 직접 관리를 등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귀족 세력을 제압하고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과거제를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과거제가 고려에 도입되어 처음 시행된 것은 958년(광종 9)이다. 918년 고려가 건국된 이후 후삼국을 통일해가는 과정에서 태조 왕건은 포용 정책과 혼인 정책을 통해 정치적으로 지방 호족들을 포섭하였다. 936년 후삼국 통일 이후 정국이 안정되어감에 따라서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새롭게 정비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유교적인 교양을 갖추고 왕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는 문신 관료가 그들이었다.
958년 광종은 중국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에 따라서 과거제를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중국에서 시행된 지 371년 후인 셈이다. 광종은 호족 출신의 공신세력을 누르는 한편 자신과 고려에 충성스러운 문신 관료를 필요로 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과거제가 시행되었다고는 하지만, 시험을 통해서 관리를 충원하는 방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삼국을 통일 한 후 신라는 골품제도만으로는 통일로 인해서 갑작스레 늘어난 영토와 인구를 원활하게 통치할 수 없었다. 효율적인 새로운 통치체제가 필요하였으며, 그것을 떠받쳐주고 운영해가야 할 인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오래된 전통적인 골품제도보다는 왕권의 명령을 집행할 수 있는 체제로 나아가기 위한 전제왕권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현실적이고 실천성이 강한 유교에 의거하여 통치하고자 하였다. 통일신라에서는 682년(신문왕 2) 국학(國學)을 설립하였으며, 788년(원성왕 4)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였다. 여기에는 대체로 육두품 자제들이 입학해서 공부하였다. 국학과 유기적인 관계하에서 독서삼품과가 운영되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독서삼품과가 국학에서 공부한 생도들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등급을 정하는 시험이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육두품 지식인들이 부각되었다. 그들은 유학은 물론이고 외교 문서 작성을 비롯하여 시간 관측, 역서(曆書) 제작, 의학, 율학 등의 실용 학문과 전문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점차로 전문 관료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전제왕권을 지향하던 왕들 역시 육두품 지식인들에 주목하였다. 하지만 곧 왕과 관료 세력, 귀족 세력 사이에 정치적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하였다. 전통적인 골품제를 통해서 기득권을 계속해서 유지해가려는 진골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지식과 실력을 갖춘 육두품 지식인들의 관계 진출은 진골 귀족들의 반대 때문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신라 하대에 이르러 정치적인 혼란이 심화되면서, 육두품 지식인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들은 당나라에 유학해서 골품제를 뛰어넘는 새로운 권위와 학문을 익히기도 하였으며, 또 당시 서서히 떠오르고 있던 지방의 신망 있는 호족 세력과 정치적인 유대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여말선초를 거치면서 골품제는 사라졌다. 지방 호족들의 정치적인 이합집산은 후삼국 시대, 그리고 고려에 의한 후삼국 통일로 일단락되었다. 고려에서 왕권의 강화를 지향하고 그를 위한 관료 세력을 키워내기 위해서 과거제를 도입하였을 때, 그런 움직임을 강력하게 떠받쳐 준 것은 육두품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당나라 유학을 통해서 과거제가 운영되는 것을 보았으며 지식과 실력이 그 기준이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제의 도입은 육두품 지식인의 바람이 실현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 같은 배경이 있었기에 고려에서의 과거제 도입과 실행이 원활하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광종 대의 과거제의 도입은 골품제에서 관료제로의 전환을 상징해주는 것이었다. 국왕을 중심으로 유교적 소양을 지닌 문신 관료들이 떠받쳐주는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호족 세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고려 광종은 과거제 실시 외에도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하고 광군(光軍)을 설치하였다. 그런 개혁 정책은 후주의 개혁정치를 참조한 것이다. 쌍기는 광종의 개혁 정치를 적극 도왔다. 귀화한 그는 956년(광종 9) · 958년 · 959년 세 차례에 걸친 과거에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공신 출신 호족들의 반발이 없지 않았지만, 광종은 그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신라 육두품 계열 · 후백제 계통 · 발해 계통 인물 등 신진 관료를 등용하였다.
과거제는 교육기관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해갔다. 성종 대에는 개경에 국자감을 설치하였으며, 지방에는 경학박사를 파견하여 교육시켰다. 교육과 과거가 연결됨으로써 중앙은 물론 지방의 자제들까지 관료화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과거의 중요성이 점차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1024년(현종 15)에 이르러 지방의 응시생들에 대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지방의 응시생 향공(鄕貢)은 먼저 계수관이 주관하는 계수관시에 합격해야 하였다. 고려 초에 지방 호족이 추천한 향공이 개경에 와서 과거에 응시하던 것을 체계화시킨 것이다. 지방 호족이 추천하던 권한을 계수관에게 준 것으로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시험을 도입한 것이었다. 계수관이 제대로 선발하지 못하였을 때는 국자감시 주관부서인 국자감에서 조사, 처벌할 수 있었다. 1110년(예종 5) 서경의 경우, 유수관이 국자감시 응시 대상자를 선발하기 위해 유수관시를 실시하였다.
계수관시와 유수관시의 시행은 지방의 유능한 인재를 중앙 관계로 끌어들인다는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동시에 지방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계수관에 대한 통제는 중앙 교육기관으로서의 국자감의 위상을 높여주는 측면도 있었다.
고려 후기로 와서 개경 거주자에게 응시 자격을 부여한 개경시가 실시되었다. 개경 거주자란 국학생이나 십이도생(十二徒生)을 제외한 이들로서 과거에 응시하려는 이들을 가리킨다. 그들 중에는 관직자가 많았다.
덕종 대에 이르러 과거제는 좀 더 체계화되어 예비시험과 본시험이라는 이원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031년(덕종 즉위년) 모든 응시자들은 예비시험 성격을 지닌 국자감시를 치르도록 법제화되었다. 이는 현종 대 지방의 응시생들이 계수관시를 거쳐 치렀던 국자감시와는 다른 것이다. 지방의 응시생뿐만 아니라 개경의 응시생들도, 국학생과 십이도생 역시 치러야만 하였다.
본시험인 예부시는 과거의 근간을 이루는 시험이었다. 예비시험이 도입되기 이전에는 예부시만으로 합격이 결정되었다. 예부시에서는 1회 혹은 2회 시험을 통해서 합격자를 결정하였다. 2회 시험은 복시(覆試)를 의미하는데 간헐적으로 시행되었다. 그 중에는 왕이 스스로 고시하는 친시(親試)도 몇 번 있었지만 상례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인종 대 이후로는 거의 폐지되고 말았다.
무신정권 시기 이후 고려의 과거제는 크게 변모하였다. 신유학의 전래와 더불어 교육과 과거 제도가 정비되고, 지방에 연고를 둔 신진사대부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국자감을 성균관(成均館)으로 개칭하면서 중건하였다. 종래 오경(五經)과 주례(周禮)로 구성되어 있던 육재(六齋)에서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으로 구성되는 구재(九齋)로 바뀌었다. 이것은 교육이 사장(詞章) 중심에서 경전(經典) 중심으로 옮아가는 것을 말해준다. 이 같은 경향은 과거제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시험과목이 시부(詩賦)에서 경서(經書)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어 1369년(공민왕 18) 과거삼층법(科擧三層法)이 시행되었다. 삼층법은 시험을 향시(鄕試) · 회시(會試) · 전시(展試) 세 단계에 걸쳐서 치르는 것이다. 왕이 직접 시험하는 친시(親試)가 더러 있기는 하였지만 제도화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과거삼층법의 시행과 더불어 형식적으로는 왕이 최종 합격자들을 결정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시행된 과거는 제술업(製述業), 명경업(明經業), 잡업(雜業)으로 나뉘어 있었다. 제술업과 명경업은 조선시대 문과와 같은 것으로 양대업(兩大業)이라 하였다. 한나라와 당나라의 유학의 영향으로 경학보다 사장이 중시되었기 때문에 제술업이 중시되었다. 잡업은 그들보다 격이 낮은 기술관 등용을 위한 시험이었다.
제술업은 진사과(進士科)라 칭하고 합격자를 진사(進士)라 부르기도 하였다. 시험과목을 보면 초시인 향공시(계수관시)에서는 시(詩)를 짓게 하여, 오언육운시(五言六韻詩)를 제술하도록 하였다. 그와 동일한 단계의 시험인 서경시(유수관시)와 개경시에서도 기록은 없지만 같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 단계의 제술업 감시는 국자감에서 주관하기 때문에 국자감시라고도 하였다. 국자감시에서는 부(賦)나 육운시(六韻詩) 혹은 십운시(十韻詩) 중에서 선택해서 제술하도록 하였다.
이 예비고시 다음에 치르는 본고시인 예부시제술업(동당시제술업)에서는 예경(禮經), 육경의(六經義), 사서의(四書疑) 등의 경학과 시(詩) · 부(賦) 등의 문예, 그리고 논(論) · 책(策) 등 시무(時務)에 대한 것을 선택적으로 부과하였다. 예부시는 삼장연권법(三場連卷法)이라 하여 초장(初場)에 합격해야 중장(中場)에, 중장에 합격해야 종장(終場)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들 세 시험에 순차적으로 모두 합격해야 급제할 수 있었다.
제술업 합격자는 갑과 · 을과 혹은 갑과 · 병과 두 등급으로 나누거나, 갑과 · 병과 · 동진사 혹은 을과 · 병과 · 동진사 세 등급으로 나누었다. 각 등급의 정원은 일정하지 않았다. 신종 대에 이르러 합격 인원이 을과 3인, 병과 7인, 동진사 23인, 총 33인으로 하는 제도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합격 정원을 제대로 지켜서 선발한 것은 충렬왕 대에 이르러서였다. 시험은 봄에 치렀으며 가을이나 겨울에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1004년(목종 7) 시험을 3월로 정하고, 합격자 발표 역시 시험이 끝난 후에 바로 하도록 하였다.
『 고려사』 선거지를 토대로 보면 제술업은 958년(광종 9)부터 1392년(공양왕 4)까지 250회 실시하였으며, 합격자는 6,330인에 이른다. 합격자는 경관직과 외관직에 제수되었다. 경관직은 권무(權務) · 9품 · 8품의 한림원 · 예문관 등의 문한직이나 국자감 학관직을 받는 경우와 권무(權務) · 9품 · 8품의 경관 관사 일반직 등을 받는 경우가 있었다. 외관직으로는 군현의 사록(司錄) · 서기(書記) · 판관(判官) · 현위(縣尉) · 진부장(鎭副將) 등이 제수되었다. 초기에는 합격하면 바로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문종 대 이후에는 1년~5년 기다려야 초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관직에 있는 자가 급제하는 경우에는 품계를 특진시켜 주었다. 실직품관은 본래의 품계보다 12품계 높은 관직, 권무관은 7품9품의 실직, 품관동정직자는 권무직 등을 제수받는 등 우대하였다. 이와 같은 재관자의 제술업 급제시 특혜는 음서제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고 하겠다.
명경업은 956년(광종 9)부터 시행되었으며 시험 체계도 향공시(계수관시), 국자감시(명경업감시), 예부시(동당시)로 이루어져 있었다. 합격자는 명경(明經)이라 하였다. 시험과목은 『주역』 · 『상서』 · 『모시』 · 『예기』 · 『춘추』 5경이었으며 첩경(貼經)과 강독(講讀)으로 시험을 보았다. 첩경은 앞뒤의 글을 가리고 한 행만 보여주고, 그 중에서 3글자를 첩지(貼紙)로 가렸는데, 그 가려진 세 글자를 알아맞히는 시험이었다. 강독은 경전의 일정한 대목을 읽고 구두와 해석이 정확한지 시험하는 방식이었다. 먼저 첩경으로 이틀 동안 시험을 치르고 난 후에 강독 시험을 치렀다.
향공시에서는 각 1궤(机)씩 부과하고, 국자감시에서는 9궤~12궤를 부과하였다. 예부시에서는 『상서』 전공자와 『주역』 전공자를 나누고, 각 전공별로 삼장으로 나누어 시험하였다. 합격자는 이과(二科) · 삼과(三科)로 나누어 표시하였다. 이과와 삼과가 성적에 다른 구분인지 아니면 『상서』 전공과 『주역』 전공에 의한 구분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합격 정원 역시 확인되지 않는다. 시험은 처음에는 제술업과 같은 시기에 치렀다. 그러다 1004년(목종 7) 제술업보다 빨리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제술업이 설행되는 그 전 해 11월 시험을 치르도록 하였다. 하지만 합격자 발표는 제술업과 같이 하도록 하였다.
명경업은 제술업과 같이 실시되었기 때문에 958년(광종 9)부터 공양왕 4년(1392)까지 약 250회 설행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명경업 합격자가 배출된 시험은 『고려사』 선거지에서 139회 확인된다. 139회의 시험을 통해서 458인의 합격자가 배출되었다.
명경업 급제자들은 초직으로 일반직과 함께 문한직의 하나인 비서성의 관직 및 학관직을 제수받았다. 하지만 문한직으로 가장 중시되던 한림원(예문관)과 사관(춘추관)의 관직에는 진출할 수 없었다. 또 직위도 실직보다는 산직인 동정직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승진에는 별다른 규제가 없어 수는 적지만 재추(宰樞)까지 올라간 사례도 보인다.
잡업은 958년(광종 9)부터 실시되었다. 당시는 의업(醫業)과 복업(卜業) 두 가지가 있었다. 성종 대에 이르러 지리업(地理業) · 율업(律業) · 서업(書業) · 산업(算業) · 삼례업(三禮業) · 삼전업(三傳業) · 하론업(何論業) 등을 갖추게 되어 9가지 전공으로 늘어났다. 율학, 서학, 산학 등은 국자감에서 교육하였으며, 그 외의 잡업은 사천대(司天臺), 태사국(太史局), 태의감(太醫監) 등 해당 기관에서 관장하여 운영하였다. 잡업도 국자감에서 교육하였다는 것, 유교와 관련된 삼례업 · 삼전업 · 하론업이 잡업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조선시대의 잡과와는 다른 측면이라 하겠다.
잡업 역시 제술업과 · 명경업과 마찬가지로 향공시(계수관시), 국자감시(잡업감시 또는 제업감시), 예부시(동당시)로 되어 있었다. 전공이 다양해서 두 차례에 걸쳐서 실시하였다. 율업 · 산업 · 서업 · 의업 · 복업 · 지리업 등은 명경업과 같이 실시하였으며, 삼례업 · 삼전업 · 하론업은 그들 시험이 끝난 후에 실시하였다.
삼장연권법에 따라 초장 · 중장 · 종장 3단계에 걸쳐서 시험을 치렀다. 초장과 중장은 대체로 첩경으로, 종장은 독경(讀經) · 파문(破文) · 의리(義理)를 시험하였다. 과업에 따라서는 실제로 하는 시험을 치르기도 하였다. 잡업의 시험과목은 〈표 1〉과 같이 과업에서 익혀야 하는 전문 서적들이었다.
잡업명 | 시험과목 |
---|---|
명법업(明法業) | 율(律), 령(令) |
명산업(明算業) | 구장(九章), 철술(綴術), 삼개(三開), 사가(謝家) |
명서업(明書業) | 설문(說文), 오경자양(五經字樣), 서품장구시(書品長句詩), 해서(眞書), 행서(行書), 전서(篆書), 인문(印文) |
의업(醫業) | 소문경(素文經), 갑을경(甲乙經), 본초경(本草經), 명당경(明堂經), 맥경(脉經), 침경(針經), 난경(難經), 구경(灸經) |
주금업(呪噤業), 복업(卜業) | 맥경(脈經), 유연자방(劉涓子方), 창저론(瘡疽論), 명당경(明堂經), 침경(針經), 본초경(本草經) |
지리업(地理業) | 신집지리경(新集地理經), 유씨경(劉氏經), 지리결경(地理決經), 경위령(經緯令), 지경경(地鏡經), 구시경(臼示經), 태장경(台藏經), 소씨서(蕭氏書) |
삼례업(三禮業) | 예기(禮記), 주례(周禮), 의례(儀禮) |
삼전업(三傳業) | 좌전(左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
하론업(何論業) | 끽산(喫算), 하론(何論), 효경(孝經), 곡례(曲禮), 율전후질(律前後秩) |
〈표 1〉 고려시대 잡업의 시험과목 |
이 밖에 정요업(政要業)이라는 것이 있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실제로는 명경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삼례업 · 삼전업과 마찬가지로 1136년(인종 14) 즈음해서는 이미 폐지된 것으로 짐작된다.
잡업은 제술업 · 명경업과 설행 횟수가 같을 것으로 여겨지나, 설행 횟수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가 없다. 합격 인원 역시 분명치 않다. 『고려사』 선거지에는 과거 시행 초기 9회뿐으로 전체 인원도 81인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잡업 시행의 전부라고는 할 수 없다. 합격자는 대부분 해당 전공을 필요로 하는 관사의 이속(吏屬) 및 하급 관원으로 진출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무과가 실시되지 않았다. 예종 때 국자감에 7재(七齋)를 설치하면서 무학재(武學齋)에 해당하는 강예재(講藝齋)를 두었다. 하지만 문신들의 반대로 무학재는 20여년 만에 없어지고 말았다. 그 후 1390년(공양양 2) 무과가 설치되었지만, 실제로 실시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서였다. 무예나 신체 조건이 뛰어난 사람을 따로 뽑아서 무반으로 충원하였다.
승려들에게 승계(僧階)를 주기 위한 승과(僧科)는 고려 초기부터 있었으며, 광종 대에 승계 확립과 아울러 성행하였다. 그로부터 많은 국사(國師)와 왕사(王師)가 배출되었다. 그러나 조계종(曹溪宗)의 흥기와 더불어 승과는 쇠퇴일로를 겪었으며, 1370년(공민왕 19) 마지막 승과가 실시되었다.
그 외의 고시로 995년(성종 14) 나이 50세 이하의 문관으로 조서와 교서 등을 작성하는 일을 담당하는 지제고(知制誥)를 역임하지 않는 자에게 한림원에서 출제하여 매월 시 3편과 부 1편을 지어 바치게 하는 문신월과법(文臣月課法)을 제정하였다. 1122년(예종 7)부터는 문신중시법인 각촉부시라는 시짓기 속작(速作) 시합을 열었다.
양인(良人) 이상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을까, 특히 과거의 핵심에 해당하는 제술업에 응시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은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가 긍정과 부정으로 나뉘어 있다. 제술업에는 백정과 장정들에게 응시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현재까지 양인 신분으로 제술업에 급제한 사례는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응시할 수 없는 자들로 오역(五逆) · 오천(五賤) · 불충(不忠) · 불효(不孝), 그리고 향(鄕) · 소(所) · 부곡인(部曲人), 악공(樂工) · 잡류(雜類)와 같은 천류(賤類)가 있었다. 승려의 자식에게도 응시 자격을 부여하지 않았다. 제한 규정은 그 뒤 완화되었다. 1125년(인종 3) 잡류의 자손도 군인의 자손과 같이 양대업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사료를 근거로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제술업을 포함한 모든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보다 뒤에 제정된 1136년(인종 14) 판문(判文)을 보면, 명경업 이하 잡업에 한하여 백정(白丁)과 장정(㽵丁)이 치르는 과목을 밝혔을 뿐 제술업에 관한 규정은 없다. 이처럼 제술업감시에 대한 규정이 없는 것은 백정이나 장정이 응시할 자격이 없었음을 말해준다.
제술업과 명경업의 경우, 귀족 관료의 자제인 문음자제, 국자감 유생, 향리의 경우 부호장 이상의 손(孫)이나 부호정 이상의 자(子) 등이 응시하였다. 향리 중에서도 일정한 선 이상의 상층의 자손만 허용하고 있다. 양인은 제술업에 응시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경업과 잡업에는 응시할 수 있었다.
고려 말로 가면서 지방 향리 자제들이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향리들이 잡과를 통한 면역(免役) 및 신분 상승으로 인하여 향역을 담당할 향리의 수가 줄어들게 되자, 향리의 세 아들 중에서 한 명만 잡과에 응시할 수 있다는 규제를 가하였다.
과거 응시자격이 있다 할지라도 부모 상중에 있는 자는 탈상이 되는 27개월까지는 응시하지 못하였다. 또한 현직 관리의 경우 6품 이상의 관리는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6품 이하의 관리들만 응시할 수 있었지만 세 번 이상 응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1154년(의종 8) 다섯 번까지로 늘렸다.
재관자는 예비시험인 국자감시를 거치지 않고 직접 본고시인 예부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음서 출신자들은 이미 초직으로 권무직을 받거나 이속(吏屬)을 부여받거나, 품관으로 승진한 상태로 일반적인 과거 응시생들에 비해서 수월하게 합격할 수 있는 혜택이 제도적으로 구비되어 있었다. 재관자인 음서출신자가 합격하였을 경우에는 재직자의 혜택에 따라 품계상의 초천(超遷)이 주어져 빨리 승진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예부시(禮部試)〔성시(省試), 동당시(東堂試)〕 한 번만으로 합격이 결정되었다. 그들을 다시 시험하는 복시가 행해지기도 하였지만, 정례화된 것은 아니었고, 의종 이후는 거의 실시되지 않았다. 과거제의 정비와 더불어 점차로 예비시험인 국자감시와 본시험인 예부시라는 이원적 체계를 취하게 되었다.
국자감시가 신설되는 때와 비슷한 시기에 그 전 단계의 시험으로 초시에 해당하는 향공시와 서경시, 개경시가 더 설치되었다. 이들 시험까지 감안하면 고려시대 과거는 삼중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향공시〔향시(鄕試) · 거자시(擧子試) · 계수관시(界首官試)〕는 1024년(현종 15)에 실시되었다. 지방의 응시생 향공에 대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그들은 먼저 계수관이 주관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하였다. 합격 인원은 주현 규모에 따라 1,000정(丁) 이상의 주현에서는 3인, 500정 이상의 주현에서는 2인, 그 이하 주현에서는 1인이었다.
제술업의 경우 오언육운시(五言六韻試) 1수, 명경업은 5경(五經) 각 1궤(机)이다. 궤는 강첨(講籤)이라 하여 경서의 제목을 적은 나무막대를 대롱에 넣어 흔들고 거기서 하나를 뽑아 강하게 하는 것으로 시험을 치렀다. 향시에 합격한 자를 향공진사(鄕貢進士)라 불렀다. 그리고 개경과 서경 거주자를 대상으로 한 개경시와 서경시가 실시되었다. 이들 시험에 합격자들은 개경에서 국자감시를 치렀다.
과거 응시자의 주류를 이룬 국자감 유생과 십이생도 및 재관자는 이 단계를 거치지 않았다. 국자감 유생들은 별도의 예비시험을 치렀는데 그것이 감시(監試)이다. 국자감에서 3년 동안 재학하면서 300일을 출석해야 응시 자격을 주었다.
문종 대 이후 점차 사학 십이도가 성하고 국자감이 쇠퇴하게 되자, 사학 십이도 및 외방 생도가 연합강습회라 할 수 있는 도회(都會)를 수료하면 감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인종 대에는 국자감 유생이 재학 중 성적이 우수한 경우 예비시험 감시를 거치지 않고서 바로 본시험인 예부시에 응시하도록 하는 직부법(直赴法)이 시행되었다. 국자감의 정기시험 고예시(考藝試)를 실시하여 14분(分) 이상의 점수를 얻을 경우, 예부시의 초장과 중장을 면제하고 곧바로 종장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13분 이하 4분 이상의 점수를 얻을 경우, 초장을 면제하고 중장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따라서 국학생의 일부는 국자감시 단계를 거침이 없이 직접 예부시에 응시하였다.
예비시험인 향시 · 개경시 · 서경시, 그리고 국자감시 합격자들은 본시험 예부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자신의 전공에 따라 제술업 또는 명경업에 응시하였지만, 많은 경우 중시되던 제술업을 택하였다. 예부시 응시자는 삼장연권법에 따라 초장에 합격해야 중장에 응시할 수 있었으며, 중장에 합격해야 종장에 응시할 수 있었다. 세 차례의 시험에 모두 다 통과해야만 하였다. 하지만 예외도 없지 않았다. 국자감 유생의 경우 고예시 성적이 좋으면, 그 성취도에 따라서 중장이나 종장에 바로 응시할 수는 있는 특전을 주었다.
본시험 예부시에 합격하면 급제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때로 재시험, 즉 복시(覆試)가 시행되기도 하였다. 왕이 관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로 문신으로 하여금 고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복시는 제도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의종 이후에는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잡업도 역시 예비시험과 본시험이라는 두 단계에 걸쳐서 시행되었다. 잡업의 예비시험에서는 지방에서 치르는 향시는 없었다. 중앙에서 시행하였으며, 대체로 해당 기술을 교육시키는 관부에서 실시하였다. 율업 · 산업 · 서업의 경우 국자감에서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따라서 율업감시 · 산업감시 · 서업감시를 주관하였다. 하론업감시 · 정요업감시도 국자감이 주관하였다. 국자감에서 가르치지 않는 의업 · 복업 · 지리업의 경우 교육을 담당하던 태의감(太醫監) · 사천대(司天臺) · 태사국(太司局)에서 각각 예비시험을 주관하였다.
예비시험에 해당하는 잡업 감시(監試)에 합격한 자들은 본시험 예부시의 잡업에 전공별로 응시할 수 있었다. 잡업의 경우 예부시로 급제가 결정되었으며 복시는 시행되지 않았다.
고려 전기에 잠시 시행되었던 명경의 일종인 삼례업과 삼전업도 잡업과 같이 예비시험인 삼례업감시 · 삼전업감시가 국자감 주관 아래 시행되었다. 그 합격자들은 본시험인 예부시의 삼례업 · 삼전업에 응시하여 급제가 결정되었다.
과거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조선시대 생원 · 진사시에 해당되는 시험이 새로 실시되었다. 1032년(덕종 1) 신설된 국자감시와 1147년(의종 1) 신설된 승보시(升補試)가 그것이다. 국자감에 7재가 생긴 뒤 국자학(國子學) · 태학(太學) · 사문학(四門學)의 유생 중에서 재생(齋生)을 뽑는 시험이다. 1367년(공민왕 16) 생원시(生員試)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진사시와 함께 생원 · 진사시, 소과(小科)로 제도화되었다.
고려 초기 과거는 규칙적으로 시행되지 않았다. 1084년(선종 1) 3년에 1회씩 실시하는 식년시를 원칙으로 삼았다. 하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고려사』 선거지에 따르면 매년 혹은 2년 아니면 몇 년 만에 과거가 시행되고 있다.
시험은 고려 초기에는 봄에 실시하여 가을이나 겨울에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그 후 1004년(목종 7)에는 명경업과 잡업은 11월에 실시하여 다음해 3월에 발표하고, 제술업은 3월에 실시하여 같은 달에 발표하도록 규정을 바꾸었다. 하지만 대체로 2∼5월 사이에 실시되었으며 일정하지 않았다.
시험에 앞서 시험을 관리하고 평가하는 고시관이 임명되었다. 처음 실시할 때는 고시관에 해당하는 지공거(知貢擧)를 두었고, 이후 지공거의 보좌역인 동지공거(同知貢擧)도 두었다. 1315년(충숙왕 2) 지공거가 고시관으로 개칭됨에 따라 동지공거도 동고시관으로 개칭되었다. 고시관 임명은 시험에 앞서 미리 하였으나, 부정을 막기 위해 1370년(공민왕 19) 중국 제도를 본받아 시험 하루 전에 임명하도록 하였다.
『고려사』 「선거지」 내용을 참조하여 과거 시험을 치르는 절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응시자는 행권(行卷)과 가장(家狀)을 공원(貢院)에 제출한다. 행권은 응시자의 이름 · 나이 및 4조〔아버지(父) · 할아버지(祖) · 증조할아버지(曾祖) · 외할아버지(外祖)〕를 적은 원서이며, 가장은 행권의 세계(世系)를 증빙해주는 가계표(家系表)를 말한다. 제술업의 경우 12월 20일까지, 명경업과 잡업은 11월 말까지 제출해야 한다. 공무 또는 부모의 상을 당하는 등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경우, 접수 기일을 넘기더라도 응시할 수 있다. 시험 관리소라 할 수 있는 공원에서는 접수된 행권과 가장의 사실 여부를 조사하였다. 이전에 응시하였던 경력이 있는 자는 서류 심사만으로 그쳤다.
② 응시자는 시험을 치르기 며칠 전에 자신의 시권(試卷)을 공원에 제출한다. 시험지에는 첫머리에 자신의 성명 · 본관 · 생년 · 4조를 기록한 다음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도록 그 부분을 풀로 붙여서 제출한다. 시관의 공정한 평가를 위한 것이었다. 거기에 호명지(呼名紙)를 붙여서 시험 당일 본인에게 돌려줄 수 있도록 하였다.
③ 시관 지공거는 문하부와 밀직사에서, 동지공거는 경(卿), 감(監)이 선출한다. 선출된 시관은 시험 전 날 오후 3장(三場)〔초장, 중장, 종장〕의 시험문제를 적어서 봉한 후 입궐하여 왕에게 바친다. 국왕은 봉한 것을 뜯어 시험문제를 검토한 뒤 낙점해서 정한다. 시관은 그것을 공원에 가져다 두었다가 시험날 아침 내걸게 된다. 이때 지공거는 남쪽을 향하여 북쪽에 앉고, 동지공거는 동쪽을 향하여 서쪽에 앉으며, 감찰과 봉명별감(奉命別監)은 북쪽을 향해서 남쪽에 앉는다. 장교(將校)들이 기를 들고 계단 아래 양쪽에 줄지어 서고, 열쇠를 가진 공원리(貢院吏)가 응시자의 이름을 불러 양쪽 행랑채에 나누어 입장시킨다. 그리고 시험이 시작된다.
④ 시험 당일 왕의 비서인 승선(承宣)이 어보(御寶)를 가지고 와서, 응시자의 시험지에 도장을 찍는다. 시험이 끝난 후, 시관이 등급을 매기면, 승선이 와서 합격자를 발표한다. 중장의 절차는 초장과 같다. 마지막 시험 종장의 합격자는 시관이 등급을 매긴다. 시험지 뒤에 과〔갑과(甲科) · 을과(乙科) · 병과(丙科) · 동진사(同進士)〕와 차〔제1 · 제2등 등수〕를 써서 황표(黃標)로 봉한 뒤 함에 넣어 왕에게 바쳤다. 이를 참고해서 왕은 합격자를 결정한다.
⑤ 합격자가 결정되면 일정한 의식에 따라 왕을 비롯하여 중신 및 시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합격자를 발표하고 왕은 주과(酒果)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합격자들은 좌주(座主)를 찾아가 예를 행하고, 좌주는 자기 집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시관과 합격자는 일생 동안 지속되는 좌주 · 문생(門生) 관계를 맺게 되며, 그 관계는 부자 관계처럼 긴밀해서 때로는 강한 인적인 유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유대는 고려 말기로 갈수록 문벌과 학벌 같은 심한 폐단을 낳기도 하였다.
⑥ 합격자에게는 홍패가 주어졌다. 홍패에는 합격자의 성명, 합격 등수, 전력, 시험관 등이 기록되었다. 홍패는 사령이 합격자의 집에 가서 하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합격자 집에서는 사령을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그 비용이 많이 들어 궁궐에서 직접 하사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합격자 집을 찾아가 홍패를 하사하는 것은 본인뿐만 아니라 그 마을의 영광이기도 하였다. 학업 의욕을 높인다는 측면을 감안해서 홍패사령은 계속 유지되었다.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의 명단을 계적(桂籍)이라 하였으며, 같은 해에 합격한 사람들의 명단을 모아 놓은 것을 동년록(同年錄)이라 하였다. 동년록에는 합격자의 전력, 이름, 생년, 본관 그리고 부 · 조부 · 증조부 · 외조부의 직역과 이름이 수록되어 있었다. 외조부의 경우 직역과 이름 이외에 본관까지 기재되었다. 현존하는 『동년록』은 조선시대 『국조문과방목』의 부록 「전조과거사적(前朝科擧事績)」이란 이름으로 붙어 있는데, 고려 후기 동년록 일부만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 이외에도 『고려열조등과록』, 『해동방목』이 있다.
과거 급제자들은 합격증서로 홍패를 받았으며, 또 등과전(登科田)이라는 명목의 토지를 받아 경제적 혜택을 누렸다. 그들은 관리 후보자들이었다. 고려 전기의 예부시는 등용 고시의 성격이 강하였으나 후기로 갈수록 합격 이후에 오랫동안 대기하였다가 관직에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취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관직에 나가는 경우에도 처음에는 중앙의 문한직이나 지방의 서기, 판관 등으로 진출하다가 얼마 후에는 의례 외직을 거치도록 제도화되었다. 초사직을 얻거나 승진에서는 역시 가문의 정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후기에 등장한 신흥사대부는 과거를 통해서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하였다. 그들은 강남농법을 도입하여 신흥지주로서 주자학을 기반으로 한 지식인들이었다. 신흥사대부는 귀족들의 사장(詞章) 중심의 한 · 당 유학을 배격하고자 하였다. 그들의 주장에 힘입어 충렬왕 이후 과거가 실시되었으며, 제술과의 선발 인원 역시 정해진 33인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이곡(李穀) · 이제현(李齊賢) · 이색(李穡) 등 일부 유학자들은 원나라의 제과에 응시하여 합격하기도 하였다.
과감한 반원개혁 정치를 시도한 공민왕 대에 과거와 교육에서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을 중건하고 생원을 100인으로 늘렸으며, 사서오경재(四書五經齋)를 두어 경전 중심의 교육을 하고자 하였다. 주자학의 주요 경서라 할 수 있는 사서(四書)가 중시되었고, 학문에서도 사장을 중시하던 풍조에서 벗어나 경학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런 경향은 시험과목에서도 나타났다.
고려시대 과거제의 특징으로 좌주와 문생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시험관인 지공거(知貢擧)와 합격자 사이에 좌주와 문생이라는 독특한 사제 관계를 맺어 학벌을 형성하였다. 과거는 왕이 선발하는 형식이지만 현실에서는 지공거와 동지공거로 불리는 2인의 시험관 주재 하에 실시되었다. 1388년(창왕 즉위년)에는 종래의 시관 2인(지공거와 동지공거)을 8인으로 늘렸다. 좌주의 권한을 분산, 약화시켜서 좌주와 문생의 폐단을 없애려 한 것이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사대부들은 고려 말부터 추진해 온 과거제도의 개혁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1392년(태조 1) 고려시대의 제술과와 명경과를 통합하여 문과로 하였으며, 다음해 무과를 실시하였다. 문과와 무과 양과가 균형적으로 운영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양반(兩班) 관료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양대업의 문과 통합과 함께 초장을 강경(講經), 중장을 표(表) · 장(章) · 고부(古賦), 종장을 책문(策問)으로 정하였다. 초장의 경학 시험은 경서의 대의를 묻는 구술시험인 강경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 약 반세기 동안 문과 초장의 시험 방법을 놓고 강경파와 제술파가 대립하였다. 때로는 강경, 때로는 제술이 실시되었지만 결국 강경파의 승리로 끝났다. 그래서 강경파의 주장이 『 경국대전』에 실려 법제화되었다.
1392년 진사시에 해당하는 국자감시가 혁파되었다. 국자감시가 귀족들의 붕당과 학벌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도구로 이용되는 등의 폐해를 자아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집권 사대부들은 사장보다 경학을 중시하여 사장시험인 진사시보다 경학시험인 생원시를 중시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혁파 다음해 1393년 감시가 실시되기도 하였다. 2년 후인 1395년 다시 혁파되었다.
그 뒤 진사시의 복구를 요청하는 의견이 많아져서 1438년(세종 20) 진사시가 부활되었다. 그러나 경학 위주의 정책을 수행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1444년(세종 26) 다시 혁파되었다. 진사시는 1453년(단종 1) 다시 복구되어 계속 실시되었다. 조선 초기 약 60년 동안 진사시는 실시되지 않았으며 그 기간 동안에는 생원시만 실시되었다.
집권 사대부들은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성균관 · 사부학당 · 향교 등의 관학을 진흥시키고, 이들 관학과 과거제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사부학당과 향교에서 양성한 인재를 선발하여 성균관에 입학시켜 실력을 더 연마하도록 한 것이다.
조선 초기의 과거 업무는 거의 성균관에서 담당하였으나 1413년 좌주 · 문생제를 제도적으로 철폐한 후에는 예조로 이관되었다. 그래서 문과와 생원시 · 진사시(진사시는 복설된 이후에 해당함)를 모두 예조가 주관하되, 생원 · 진사시는 성균관과 함께, 문과는 예문관 · 춘추관과 함께 시험을 실시하였다.
잡과의 경우 1392년(태조 1) 제정된 입관보리법(入官補吏法)에 의하면, 고려시대 잡과 중 남게 된 것은 의과 · 음양과뿐이며, 새롭게 역과(譯科) · 이과(吏科)가 설치되었다. 이과는 후에 상급 서리인 성중관(成衆官)을 뽑는 시험으로 바뀌고 대신 율과(律科)가 새로 설치되었다. 1402년(태종 2) 역과 · 의과 · 음양과 · 율과로 구성되는 잡과제도가 확립되었다. 역과는 대명외교의 중요성 때문에 한학(漢學)이 개국 초부터 설치되었으며, 1419년(세종 1) 몽학(蒙學), 1441년(세종 23) 왜학(倭學), 1451년(문종 1) 여진학(女眞學)이 설치되었다.
사대부들은 국가 운영에 기술학의 필요성을 인정해서 잡과를 두었으면서도 유교적인 직업 관념에 의거하여 기술학을 점차로 낮게 보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사대부들이 기술직에 종사하기를 꺼리게 되어 점차로 양반에서 도태되거나 양인에서 상승한 부류들이 종사하는 직종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결과 기술관 등용시험인 잡과의 격이 떨어지게 되고, 점차로 하급 지배신분층인 중인층의 과거로 격하되어 갔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문과, 무과, 잡과(역과 · 의과 · 음양과 · 율과)가 있었는데 통칭하여 제과(諸科)라 하였다. 문과는 다시 대과(大科)와 소과(小科)로 나누어지나 흔히 문과, 생원시 · 진사시로 일컫는다. 문과와 생원시 · 진사시, 잡과는 예조에서, 그리고 무과는 병조에서 주관하였다.
과거시험에는 3년마다 실시하는 식년시와 국가의 경사 등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실시하는 부정기 시험이 있었다. 식년시와 증광시에는 모든 과거 시험을 다 실시하지만, 별시(別試) · 알성시(謁聖試) · 정시(庭試) · 춘당대시(春塘臺試) 등 비정기 시험의 경우에는 문과와 무과만 실시하였다.
처음에는 식년 초시를 식년 1월에서 5월 사이에 실시하였으나 농사에 지장이 있다 하여 식년 전 가을에 실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초시에 합격한 후 복시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는 한 차례만 주어졌다. 명 · 청 제도와는 달리 초시에 합격한 후 복시에 응시하지 못하거나 낙방한 경우에는 다시 초시부터 응시해야 하였다. 다만 기복친(朞服親)의 상을 당하여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았거나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초시에 합격한 경우에는 사정을 신고하면 다음 번 시험으로 응시를 미룰 수 있었다.
1437년(세종 19) 이후 과거 시험장을 1소와 2소로 나누었다. 시관의 자제나 친척 등의 상피인을 다른 시험장으로 보내 과거의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은 분소법(分所法)은 불편함도 적지 않았다. 시험장에 따라 시관이 다르고 시험 문제가 달라서 응시생의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중국처럼 과거 전용 건물이 없던 조선에서는 대청과 넣은 마당이 있는 곳을 골라 시험장으로 삼았다.
시험관은 복수 시관제로 상시관(上試官) · 참시관(參試官)과 감시관(監試官)이 임명되었고, 전시의 경우 대독관(對讀官)과 독권관(讀卷官)인이 임명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시험관은 고려시대의 지공거와 같은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니라 상당히 제한된 업무만을 하게 되었다.
생원시와 진사시는 각기 생원과 진사를 선발하는 별개의 시험이며, 『경국대전』을 비롯한 법전에서의 공식 명칭은 생원진사시이다. 두 시험을 합쳐서 소과(小科), 감시(監試), 사마시(司馬試)라 부르기도 하였다.
생원진사시는 식년시와 증광시로 구분된다. 식년시는 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시험이며, 증광시는 국왕의 즉위와 같은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기념하기 위해서 실시하는 비정기적인 시험이다. 식년시와 증광시 모두 초시와 복시 두 단계의 시험으로 이루어졌다. 식년 전해에 초시를 실시하고 식년 봄에 복시를 실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증광시의 경우 초시를 실시한 후 한두 달 정도 지나 복시를 실시하는 것이 상례였다. 시험 방법이나 절차는 초시와 복시가 동일하였다.
시험과목은 생원시의 경우 사서의(四書疑) 1편과 오경의(五經義) 1편이었다. 사서의는 『논어(論語)』 · 『맹자(孟子)』 · 『대학(大學)』 · 『중용(中庸)』에 나타난 개념이나 뜻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문제를 출제하고, 응시자는 그 의문에 대해서 논변하였다. 오경의는 『시경(詩經)』 · 『서경(書經)』 · 『주역(周易)』 · 『예기(禮記)』 · 『춘추(春秋)』의 훈의(訓義)에 관한 것을 각 1편씩 출제하였으며, 응시자는 1경을 선택하여 제술하였다.
『 대전통편』에서는 오경의 중 춘추의(春秋義)를 제외하고 사경의(四經義) 1편과 사서의(四書疑) 1편으로 시험과목이 축소되었다. 진사시의 경우 부(賦) 1편, 고시(古詩) · 명(銘) · 잠(箴) 중 1편이었다. 진사시의 명과 잠은 중간에 폐지되어, 『속대전』에서는 진사시 시험과목이 부(賦) 1편과 고시(古詩) 1편으로 축소되었다.
초시 정원은 군현의 수와 인구의 과다에 따라 도마다 차이를 두었다. 생원시와 진사시 초시에서 각각 700인을 뽑고, 복시에서 각각 100인을 뽑았다. 정원은 후기까지 변동이 없었다. 각 도별 초시 정원은 다음 〈표 2〉와 같다.
한성 | 경기도 | 경상도 | 충청도 | 전라도 | 강원도 | 황해도 | 평안도 | 함경도 | 합계 | ||
---|---|---|---|---|---|---|---|---|---|---|---|
생원시 | 200 | 60 | 100 | 90 | 90 | 45 | 35 | 45 | 35 | 700 | |
진사시 | 200 | 60 | 100 | 90 | 90 | 45 | 35 | 45 | 35 | 700 | |
〈표 2〉 생원진사시 도별 초시 정원 |
초시에는 한성시(漢城試)와 향시(鄕試)가 있었다. 한성시는 출신 지역에 상관없이 모두 응시할 수 있었으나, 향시는 해당 지역의 거주자만 응시할 수 있었다. 한성시 시험 장소는 일반적으로 1소를 예조, 2소를 성균관으로 하였다. 1603년(선조 36) 경기도 향시가 과거 시행에 드는 백성들의 부담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폐지되었다. 그 후 경기도 유생들은 한성시에 응시하였다. 각 시험장마다 한성부 낭관과 4관(四館)의 7품 이하관 3인이 녹명(錄名)을 담당하였으며, 정3품 이하 1인이 상시관, 2인이 참시관, 감찰 1인이 감시관이 되어 선발하였다.
향시의 경우 8도에서 각 도별로 실시되었다. 도에서는 인구가 적은 강원도와 황해도를 제외하고는 두 곳으로 나누었다. 경기 · 충청 · 전라 · 경상도는 좌 · 우도, 평안 · 함길도는 남 · 북도로 나누어 시행하였다. 시험 장소는 도내의 군현에서 돌아가면서 담당하였다. 시험관은 관찰사가 문과 출신의 수령이나 교수 중에서 골라 상시관 1인과 참시관 2인을 임명하였다. 1553년(명종 8)부터 서울에서 경시관(京試官), 도사(都事), 평사(評事)가 상시관으로 내려왔다. 경상 · 충청 · 전라도의 좌도와 평안남도에는 경시관(京試官), 경상 · 충청 · 전라도의 우도와 강원 · 황해도 및 평안북도와 함경북도에는 도사, 함경남도에는 평사를 상시관으로 보내는 것이 상례였다.
생원진사시는 초시(한성시와 향시)에 해당하는 승보시(陞補試), 사학합제(四學合製), 공도회(公都會) 등이 있었으며, 거기에 합격하면 복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승보시는 서울의 사부학당 유생에게 보인 시험으로 시험과목은 부(賦) 1편과 고시(古詩) 1편이다. 선발인원은 10인이었으며, 1867년(고종 4) 12인으로 늘렸다. 개성부와 제주에도 승보시를 두어 유수 또는 목사가 그 지방의 유생을 시험하였다. 개성은 4인, 제주는 2인을 뽑아 생원진사시 복시 응시 자격을 주었다. 생원진사시 복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자는 본인이 원하는 대로 생원시와 진사시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일단 임금에게 보고하여 재가를 한 뒤에는 옮길 수 없었으며, 합제와 공도회도 그와 같았다.
사학합제는 사학 유생들에게 과업(科業)을 권장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제술과 고강 두 종류가 있었다. 제술은 사학의 학관이 매년 네 번 부(賦) · 고시(古詩)로써 시험하여 매회 각 학당에서 5인씩 모두 80인을 뽑았다. 그들을 성균관에 모은 후 관관(館官)과 학관이 다시 시험하여 8인을 선발하였다. 고강은 사학의 학관이 1년에 네 번 사서(四書) 또는 『소학』을 배송(背誦)하게 해서 매회 각 학당에서 소학 5인, 사서 5인, 합계 소학 80인, 사서 80인을 뽑았다. 그들을 성균관에 모아 다시 시험을 치르게 하여 소학 8인, 사서 8인을 선발하였다.
제술과 고강에 합격한 자는 생원진사시의 복시 응시 자격을 주었다. 고강에 응시하는 자가 많지 않아 1664년(현종 5)부터 제술과 고강의 선발인원을 제술 16인, 강송 8인(『소학』 4인, 사서 4인)으로 바꾸었다. 그 후 『소학』 응시자가 적어 1708년(숙종 34) 사서 5인, 『소학』 3인으로 선발인원을 조정하였다.
공도회는 매년 6월 서울에서는 3품 이하의 문신 3인이 사학 생도들을 제술과 강경으로 시험하여 성적 우수자 10인을 뽑았고, 지방에서는 각 도의 관찰사가 도회소(都會所)를 설치하여 문신 수령 3인을 시관으로 임명하여 도내의 향교 생도를 제술과 강경으로 시험을 보아 우수자를 뽑았다.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는 각 5인, 나머지 도는 각 3인을 선발하여 생원진사시의 복시 응시 자격을 주었다.
복시는 식년 2월 또는 3월 서울에서 실시하였다. 복시는 예조에서 주관하였으며 단종 대 이후 성균관과 공동으로 주관하였다. 시험장은 예조, 성균관, 장악원, 동학 등을 이용하다가 1696년(숙종 22) 이후 예조와 성균관으로 고정되었다. 각 시험장마다 종2품 이하 2인이 상시관, 정3품 이하 3인이 참시관, 감찰 1인이 감시관이 되어,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각각 100인을 선발하였다.
시험장별로 50인씩 뽑았으며 합격자를 번갈아 등위를 매겼다. 1소와 2소의 시험관들이 입격시권(入格試卷)을 가지고 입궐하여 빈청에 모여 양소 합격자를 한 사람씩 맞바꾸어 가면서 등급을 매겼다. 진사시 · 생원시별로 1등 5인, 2등 25인, 3등 70인으로 등급을 나누었다. 과업을 장려하기 위해 과거를 치른 후에 각 스승들이 가르친 유생들 중에서 생원 · 진사 10인(지방은 5인) 이상을 낸 자는 왕에게 보고하여 품계를 올려주었다.
생원진사시의 출방은 같은 날에 하였다. 합격자에게는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합격자의 일부가 생원 또는 진사의 자격으로 관직에 임명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다른 과거와는 달리 관리 임용과 직결되는 제도가 아니었다. 합격한 후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오르는 것이 정상적인 길이었다. 생원과 진사 자격으로 관직을 얻기는 어려웠으며, 얻는다 하더라도 교수, 훈도, 능참봉 등에 그쳤다. 하지만 생원과 진사만 되더라도 면역(免役) 특권이 주어져 사회적으로 일정한 예우를 받을 수 있었다. 각 고을에서는 사마소(司馬所)를 결성하여 사회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문과는 생원 · 진사가 성균관에 입학하여 일정 기간 수학을 마친 사람만이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일반 유생인 유학(幼學)도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관학 제도를 과거제와 함께 이용하려고 하였으나, 실제로 학교제도가 과거와 그렇게 밀착되어 있지 않았다. 명 · 청 대 학교 시험을 과거에 포함시켜 일원화함으로써 학교가 과거시험 준비 기관처럼 되었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문과는 문관의 등용을 목적으로 하는 시험으로 3년에 한 번씩 치르는 정기 문과와 국왕의 품지를 받아 치르는 비정기 문과로 구분된다. 국왕의 품지에 따라서 시행되는 비정기 문과는 증광문과, 별시문과, 외방별시, 정시문과, 알성문과, 춘당대문과 등이 있었다. 그리고 유생들에게 문과 직부 혜택을 주거나 문신들의 승진을 위한 각종 고시가 있었다.
식년문과는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 3단계로 시행되었다. 초시와 복시는 초장, 중장, 종장으로 나누어 실시되었다. 이를 동당삼장(東堂三場)이라 하는데, 하루의 간격을 두고서 시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초장에서는 경학(經學)에 대한 이해도를 시험하고, 중장에서는 시작(詩作)과 논술(論述) 시험을 치렀다. 종장에서는 정국 현안에 대한 이해와 해결 능력을 엿보는 대책(對策)을 통과해야만 하였다. 초장과 중장 및 종장은 시험관과 고시 방법을 달리하였다. 초시 3단계와 복시 3단계를 연이어 통과해야 최종 관문인 왕 앞에서 치러지는 전시에 오를 수 있었다.
초시 초장은 강경시험으로 사서오경을 대상으로 의(疑) · 의(義) · 논(論) 가운데 2편을 작성하였다. 중장은 제술시험으로 부(賦) · 송(頌) · 명(銘) · 잠(箴) · 기(記) 가운데 1편, 표(表) · 전(箋) 중 1편을 선택하여 모두 2편을 작성하였다. 종장 역시 제술시험으로 대책(對策) 1편을 작성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시험과목을 축소하여 초장에서는 오경이 폐지되고 중장에서는 부 1편, 표 · 전 중 1편으로 간략화 되었다.
복시 초장은 강경시험으로 사서와 삼경(三經)을 강하였다. 삼경 이외 주역과 춘추 이경과 자(子) · 사(史)로 시험보기를 원하는 경우는 임문(臨文)하며, 주역과 춘추를 시험하는 경우는 점수를 배로 주었다. 복시의 중장과 종장의 제술 시험과목은 초시와 동일하였다.
전시는 시제에 따라서 대책 · 표 · 전 · 송 · 제(制) · 조(詔) 중 1편을 제술하였으며, 『속대전』에서 논(論) · 부(賦) · 명(銘)이 첨가되었다.
식년문과 초시는 관시 · 한성시 · 향시가 있었다. 자 · 묘 · 오 · 유 식년의 한 해 전 가을에 치르며 시험 날짜는 일관이 길일을 택하여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초시는 응시자의 거주지에 따라 시험 장소가 정하여졌다. 서울 거주자는 한성시, 지방 거주자는 향시,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생은 관시에 응시하였다. 경기도 향시가 폐지된 후에는 경기도 유생은 한성시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초시에서는 관시 50인, 한성시 40인, 향시 150인으로 모두 240인을 뽑았다. 향시는 8도 유생을 대상으로 하여 각 도별로 인원이 정해져 있었다. 경기도 20인, 충청도 · 전라도 각 25인, 경상도 30인, 강원도 · 평안도 각 15인, 황해도 · 함경도 각 10인이었다. 『속대전』에서는 경기도 향시가 한성시에 합쳐져 한성시 정원이 60인으로 늘어나고, 함경도 정원이 3인 늘어나 초시 시취 정원이 243인으로 되었다. 향시의 도별 정원에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관시의 응시 자격은 원점(圓點)을 근거로 삼았다. 원점은 성균관 식당의 도기(到記)에 표식을 하는데, 아침과 저녁 두 끼를 참석하면 원점 하나로 계산해 주었다. 원점 300점을 취득한 유생에게 관시 응시 자격을 주었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생의 수가 점차 줄어들어 300점 이상의 유생이 선발인원인 50인에 미달할 경우에는 왕의 품지로 원점 50점 이상 유생을 관시에 응시하게 하였다. 응시자가 없는 경우에는 관시 시취 정원을 한성시에 보태도록 하였다. 관시는 성균관원이 녹명을 담당하고 정3품 이하 3인이 시관, 감시관은 사헌부 감찰 1인이었다. 관시는 성균관에서 시행하였으며 시관과 상피해야 하는 경우 한성시에 응시하였다.
한성시는 한성부의 낭관 및 예문관 · 성균관 · 승문원 · 교서관의 7품 이하관 3인이 녹명을 담당하고, 정3품 이하 1인이 상시관, 2인이 참시관, 감찰 1인이 감시관이 되어 선발하였다. 시험 장소는 1소는 예조, 2소는 성균관으로 하는 것이 관례였다.
향시는 8도의 유생을 대상으로 각 도에서 생원시 · 진사시 향시가 끝난 뒤 같은 시험관이 같은 시험장에서 실시하였다. 향시 시험관은 각도의 도사(都事)와 문관 수령 2인으로 하였다. 경상좌도와 평안남도의 시험관은 서울에서 파견되며, 함경남도의 시험관은 도사 대신 평사(評事)가 참여하였다. 향시는 8도별로 시행되므로 관찰사가 도내의 군현 중에서 장소를 정하여 시행하였다.
복시는 식년 봄에 치르며 날짜는 일관이 길일을 선택하여 정하였다. 복시는 회시(會試)라고도 하였다. 초시에서 합격한 240인(조선 후기 243인)을 서울에 모아 33인을 뽑는 것이다. 33인을 선발하는 연유는 고려시대에 숭상한 불교의 33천(天)에서 나온 것이다. 복시 합격으로 실제 문과 합격 여부가 결정되었다.
복시 시험관은 종2품 이하 3인이 상시관, 정3품 이하 4인이 참시관, 사헌부 · 사간원에서 각 1인이 감시관을 맡았다. 복시 응시를 위하여 녹명하였는데, 녹명은 시험 10일 전까지 마쳐야 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사유서를 함께 제출하는 것이 원칙이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녹명할 때 『경국대전』과 『가례』 강경 시험이 있었다. 시험 장소는 두 곳으로 나누어 실시하였는데 성균관과 장악원, 한성부, 예조, 사부 학당 가운데 한 곳이 사용되었다.
전시는 식년 봄에 복시 합격자 33인과 직부전시인(直赴殿試人)을 왕이 거처하는 궁궐의 전정(殿庭)에서 실시하여 문과 합격 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정원은 갑과 3인, 을과 7인, 병과 23인이었다. 건국 초에는 고려의 유제에 따라 을과, 병과, 동진사(同進士)로 등급을 나누었다. 등급을 갑과에서 시작하지 않고 을과로부터 시작한 것은 중국 과거의 등급과 같이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였으나, 1468년(세조 14) 식년시부터는 갑과, 을과, 병과의 등급을 사용하였다.
갑과 3인은 합격 후 바로 실직(實職)에 제수되었다. 갑과 3인 가운데 1등을 장원급제라고 일컫는다. 전시는 신하인 시험관이 가졌던 과거 합격의 결정권을 국왕이 직접 장악하는 것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이었다.
전시의 시험관은 상시관을 독권관(讀券官), 참시관을 대독관이라 하였는데, 처음에는 2품 이상 3인을 독권관, 3품 이하 5인을 대독관으로 하였다. 나중에는 의정(議政) 1인, 종2품 이상 2인을 독권관, 정3품 이하 4인을 대독관으로 하였다. 하지만 방목에는 7명 이상인 경우가 더러 있어 7명 이상의 시관이 차정되기도 하였다. 시험 문제는 왕이 출제하는 일도 있었으나, 대개는 독권관이 출제하여 품정하는 것이 관례였다. 시험은 문과전시의(文科殿試儀)가 끝난 뒤 답안지를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하였다. 시권은 왕이 보아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해서(楷書)로 쓰도록 하였다.
합격자는 갑과 1등은 종6품직, 갑과 2등과 3등은 7품직에 제수되었다. 갑과를 제외하고는 승문원, 성균관, 교서관의 권지(權知)로 차정되었다가 종9품직을 제수하였다. 그런데 갑과 출신이 아니더라도 문과 응시 당시 이미 관직이나 관품을 가지고 있던 사람의 경우에는 분관을 거치지 않고 바로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분관 전후에 한림으로 천거된 사람은 성적에 관계없이 다른 합격자보다 먼저 관직에 제수될 수 있었다.
식년문과 외에 비정기 문과로 증광문과, 별시문과, 정시문과, 알성문과, 춘당대문과 등이 있었다. 이들 시험은 무과와 같이 실시되었다. 반면에 생원진사시와 잡과는 증광시만 실시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국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시행되었으나, 선조 대 이후로는 그 의미가 더욱 확장되어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 시행되었다. 나라에 큰 경사나 경사가 겹치는 경우 대증광문과를 시행하였다.
증광문과 초시는 식년문과 초시와 시험과목이 동일하였다. 그런데 『대전회통』에서는 식년문과와는 달리 증광문과 초시에 회강(會講) 규정이 추가되었다. 증광문과 초시 합격자를 대상으로 강서 시험을 보아 조(粗) 이상의 점수를 받은 경우에만 증광문과 복시에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 회강은 삼경 가운데 원하는 하나의 경서를 배송하게 하였다.
증광문과 복시는 초장과 종장으로 구성되었다. 초장은 부 1편과 표와 전 중에서 1편을 선택하여 모두 2편을 작성하였고, 종장은 대책 1편을 작성하였다. 증광문과 전시는 식년문과 전시와 동일하여 대책(對策) · 표(表) · 전(箋) · 송(頌) · 제(制) · 조(詔) 중 1편을 시제에 따라 제술하였다. 『속대전』에서는 논(論) · 부(賦) · 명(銘)이 첨가되었다.
증광문과의 합격 정원은 식년문과의 정원과 동일하여 초시에서 240인(조선 후기 243인), 복시와 전시에서 33인이었다. 다만 대증광문과의 경우 관시에서 30인, 한성시에서 24인, 경기도에서 12인, 충청도 · 전라도에서 각각 15인, 경상도에서 18인, 강원도 · 평안도에서 각각 9인, 황해도 · 함경도에서 각각 6인을 더하여 모두 388인(관시 80인, 한성시 64인, 향시 224인)을 뽑았다. 1662년(현종 3) 관시가 폐지된 후에는 그 정원이 한성시에 더해졌다. 대증광시 복시 · 전시에서는 7인이 늘어나 40인을 뽑았다. 증광문과 합격 후 제수하는 관품은 식년문과와 동일하였다.
시험관도 초시 · 복시 · 전시 모두 식년문과와 동일하였다. 현종 때 관시를 폐지하고 그 액수를 한성부에 더해준 뒤로는 한성시의 시험관 수를 늘려 각 시험장마다 종2품 1인, 정3품 이하 3인을 시관, 감찰 1인을 감시관으로 하였다.
국가에 경사가 있거나 10년에 한 번 당하관을 고시하는 중시(重試)에 대응하여 시행한 특별 시험으로 문과와 무과 두 과만 실시하였다. 법전에 별시무과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 속대전』으로 초시와 전시 두 단계 규정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조선 초부터 친시(親試)라는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국조문과방목』에는 1416년(태종 16)에 친시라는 명칭이 처음 나온다. 그러다 1457년(세조 3)에 별시라는 명칭이 나오면서 친시라는 용어가 사라졌다. 조선 전기에는 선왕을 종묘에 부묘(祔廟)하거나 국왕이 즉위한 이듬해에 실시하기도 하였다.
별시문과 초시는 정원이 300인 혹은 600인으로 시험을 시행할 때 왕에게 품의하여 정하였다. 정원이 일정하지 않아서 적을 때는 3인, 많을 때는 30인을 뽑았다. 시험과목은 초장에서는 논(論) 1편, 표(表) · 전(箋) 중 1편, 부(賦) 1편 중에서 번갈아 가면서 두 가지 문제를 출제하고, 종장에서는 대책(對策) 1편으로 하였다. 전국의 유생을 서울에 모아 시험 보는 것이 관례였으며, 시험장은 2소로 나누어 시행하였다. 시관과 감시관은 식년문과 복시와 동일하였다.
초시를 마치면 합격자에게 사서(四書) 중에서 추첨한 1서와 삼경(三經) 중에서 자원하는 1경을 배송시켜 조(粗) 이상을 뽑는 회강(會講)을 실시하였다. 시관과 감시관은 초시와 같았다. 전시에서는 의정 1인, 종2품 이상 2인 독권관, 정3품 이하 4인 대독관이 시험관이 되었다. 식년문과 전시와 같이 대책(對策) · 표(表) · 전(箋) · 잠(箴) · 송(頌) · 제(制) · 조(詔) · 논(論) · 부(賦) · 명(銘) 중에서 1편으로 제술하였다.
정시문과는 1489년(성종20)에 처음 시작될 때에는 봄 · 가을로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시험을 보여 우수한 사람에게 직부전시의 자격이나 급분(給分)을 주는 시험이었다. 정시(庭試)는 전정(殿庭), 즉 대궐의 뜰에서 보이는 시험이라는 뜻이다. 정시는 증광시를 설행할 만한 큰 경사는 아니지만 국가나 왕실에 경축할 만한 일이 있을 때에 관례적으로 실시하였다.
정시는 중종 대부터 정식 과거로 승격되었다. 『 국조방목』에 정시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사용된 시험은 1542년(중종 37) 임인정시(壬寅庭試)이다. 한 번의 시험으로 급제자를 선발하는 단일시로 응시자들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았다. 또한 정시는 상피제도도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험관의 협잡이 많았다. 많은 유생들이 응시하여 시험 운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자, 1743년(영조 19) 별시문과와 같이 초시와 전시 두 단계로 실시하도록 하였다.
정시문과 초시는 부(賦) 1편, 표(表)와 전(箋) 중의 1편으로 시험하였다. 모두 서울에 모아 시험장을 세 곳으로 나누어 실시하였으며, 예조 · 한성부 · 성균관을 시험장으로 삼았다. 시관과 감시관은 식년문과 초시와 같이 하였다. 선발인원은 그때마다 왕에게 품의하여 정하였다. 『 대전통편』에서는 시험장을 2소로 나누었으며, 『 대전회통』에서는 서울과 지방으로 나누어 시험을 치르되, 지방은 각도 관찰사가 선발하였다.
정시문과 전시에서는 식년문과 전시와 마찬가지로 의정 1인, 종2품 이상 2인 독권관, 정3품 이하 4인 대독관을 시험관으로 삼았다. 왕이 직접 임석하여 합격자를 발표할 경우에는 알성문과와 같이 하였다. 시험과목은 식년문과 전시와 같았다. 주로 표와 부가 출제되었으며, 시험 문제는 친림일 때는 어제(御題)가 많이 나오고, 문관에게 명하여 시취할 때는 독권관이 출제하여 정하였다. 선발인원은 시험을 시행할 때 왕에게 품의하여 정하였다. 1759년(영조 35) 초시 합격자에게 스스로 원하는 1경을 배송시켜 조(粗) 이상자를 뽑는 회강도 실시하였다.
또한 왕이 친림하여 치를 경우에는 초시를 생략하였다. 1844년(헌종 10) 지방 유생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하여 초시를 서울뿐만 아니라 각 도 감영(監營)에서도 실시하게 하였다. 때문에 정시는 다른 별시보다 폭넓은 과거가 되었다.
알성문과는 왕이 성균관의 문묘에 나아가 공자의 신위에 술잔을 따르는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한 후에 실시한 과거이다. 문과와 무과에만 실시하였다. 왕의 친림하에 거행되었기 때문에 친림과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 차례의 시험으로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는 단일시이며 시험 시간이 짧은 촉각시였다. 당일 급제자를 발표하는 즉일방방(卽日放榜)이었다. 알성문과는 시험관의 수가 다른 전시보다 많아서 독권관 10인, 대독관 20인이었다. 시험과목도 간단하여 10과 중 1편을 고시하였는데, 채점에 시간이 걸리는 책은 피하고 채점하기 쉬운 표를 많이 출제하였다. 응시 자격은 처음에는 성균관 유생에게만 주었으나, 뒤에는 왕과 문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이유로 지방 유생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였다.
알성시는 다른 시험과 달리 녹명이 없었고, 친림과인 까닭에 상피제가 없어 시관의 자제도 응시할 수 있었다. 급제자가 결정되면 방방의를 행하고 급제자에게 홍패와 말 등을 하사하였다. 알성시에는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숙종 대에 1만여 인, 영조 대에 1만 8천 인이 응시하기도 하였다. 많은 인원이 응시하여 압사하는 사고도 발생해서, 숙종 대에 알성시에 초시를 실시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실시되지 않았다. 알성시 선발인원은 10인 이하였다.
춘당대문과는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 창경궁의 후원 춘당대에서 왕이 친림해서 시행한 과거이다. 각 군문의 무사에게 왕이 친림하여 그 무예를 시험하는 관무재(觀武才)의 대거(對擧)로서 실시하였다. 춘당대시는 1572년(선조 5)에 처음 시행하여 문과 15인을 선발하였으나, 무과 인원은 확인되지 않는다. 관무재의 대거일 경우 1783년(정조 7)부터는 문신 고시와 유생 고시를 번갈아 실시하는 것이 관례였다.
알성문과와 같이 상피제가 적용되지 않았으며, 친림과로 단일시이고 촉각시였으며 즉일방방하였다. 선발인원은 왕에게 품의하여 정하였는데 많은 때는 15인, 적을 때는 3인이었다. 시험과목은 증광문과 전시와 같았으며 시험관은 알성문과와 같았다.
지방민을 위한 외방별시가 있었다. 외방별시 문과는 급제를 주었다는 점에서 직부전시의 자격을 주었던 외방별과와는 차이가 있다. 1460년(세조 6) 평양에 가서 별시를 열어 문과 22인, 부과 1,800인에게 급제를 준 것이 효시였다. 지방민을 위한 과거는 왕이 특별한 이유로 방문하는 지역 지방민을 위로하기 위해서 실시되었으며, 1643년(인조 21) 평안도의 서도과(西道科)와 함경도의 북도과(北道科)가 만들어져 거의 10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거행하였다. 양난 이후 국방상의 요지 서북 지방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지방민을 위무 진작시키려는 목적에 의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외방별시는 60회 실시되었는데 그 중 53회는 임진왜란 이후 실시되었다.
시험관은 시재 때는 승지 또는 어사를 보냈으나 별시로 승격된 뒤에는 중신을 보내어 상시관으로 하고, 참시관은 관찰사가 임명하였다. 시험과목은 주로 부 · 표 · 책 중의 1편을 고시하였으며, 중신이 내려갈 때 왕이 출제해서 주거나 대제학을 시켜서 출제하기도 하였다. 선발인원은 각각 3인을 뽑았으나, 나중에는 서도과를 청남(淸南)과 청북(淸北), 북도과를 관남(關南)과 관북(關北)으로 나누어 각각 2~3인을 뽑았다.
그 외에 문과의 각종 고시로 절제(節製) · 황감과(黃柑科) · 전강(殿講) · 도기과(到記科) · 통독(通讀) · 외방별과(外方別科) 등이 있다. 합격자에게는 문과 전시 또는 복시에 직부할 수 있는 자격을 주거나 가산점인 분수(分數)를 주는 급분하였다.
『경국대전』에는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의정부와 6조, 제관(諸館)의 당상관이 시제(試題)를 내어 제술 시험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후기로 갈수록 성균관에서 시행하는 시험의 종류가 늘어났다. 그 결과 『속대전』에서는 1월 7일 인일제(人日製), 3월 3일 삼일제(三日製), 7월 7일 칠석제(七夕製 또는 七日製), 9월 9일 구일제(九日製 또는 菊製)를 포괄하는 4개의 절일제(節日製)가 법제화되었다. 해당 일자에 특별한 일이 있으면 같은 달 내에 무고한 날로 연기하여 시행하였다.
먼저 생긴 삼일제와 구일제는 과제(課製)라 하고, 인일제와 칠석제는 상순윤차(上旬輪次)라고 하였다. 국초부터 시행된 삼일제와 구일제는 의정부와 6조 당상이 참석하여 실시하고 1등에게 직부전시의 자격을 주었다. 인일제와 칠석제에는 관 · 각 당상만이 참석하여 1등에게 직부복시를 주는 것이 관례였다. 차등인에게는 급분을 주었다.
성균관 유생의 학업을 장려할 목적으로 실시한 반시(泮試 혹은 泮製)는 식년시와 증광시 문과 초시의 하나인 관시(館試)와는 성격이 다른 시험이다. 조선 후기에는 통방외(通方外)라고 하여 일반 유생에게도 응시를 허락하였다.
절일제는 단일시였으며 시험과목은 대책(對策) · 표(表) · 전(箋) · 잠(箴) · 송(頌) · 제(制) · 조(詔) · 논(論) · 부(賦) · 명(銘) 중의 1편이었다. 선발인원은 본래 정해진 수가 없었으며, 1744년(영조 20)부터는 1등으로 서울 유생, 지방 유생 각 1인을 뽑았다.
황감제는 제주목사가 매년 섣달에 귤, 유자, 감 따위의 특산물을 진상해 오면 그 일부를 태학과 사학의 유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어제를 내려서 고시한 것이다. 1641년(인조 19) 시작되어 『속대전』에서 법제화되었다. 왕의 특명이 있으면 지방 유생들에게도 응시 자격을 주었다. 시험과목은 절일제와 같았다. 선발인원은 절일제와 마찬가지로 본래 정해진 수가 없었다. 절일제보다 비중이 높아서 절일제에 급제를 주지 않더라도 황감제에는 반드시 급제를 주었다. 1748년(영조 24)부터는 서울 유생, 지방 유생 각 1인을 1등으로 뽑는 경우가 많았다.
전강은 1470년(성종 1) 창덕궁 선정전에서 성균관 유생들을 고강한 데서 비롯되지만, 그것이 제도화된 것은 『속대전』에 의해서였다. 대상은 성균관과 사학 관학 유생으로 2월부터 12월까지 격월로 매 16일에 왕에게 품의하여 실시하였다. 시험과목은 삼경으로 시행할 때 왕에게 품의하여 정하였다. 선발인원은 본래 정해진 수가 없었으며, 시험관은 식년문과 전시와 마찬가지로 의정 1인, 종2품 이상 2인, 정3품 이하이었다.
의정이 고강할 경우 순통(純通)이면 복시에 직부하게 하고, 조(粗) 이상이면 문과 초시 때 점수를 더해 주었다. 왕이 친림하는 경우 순통은 문과 전시에 직부하게 하였다. 인원이 너무 많으면 제술로 비교하여 3인을 넘지 못하게 하였고, 통은 문과 복시에 직부하게 하고, 약(略)은 1분의 점수를 주었다
도기과는 도기(到記)를 원점으로 환산하여 원점 50점 이상인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치르는 시험이며, 원점과라고 하기도 하였다. 도기과는 영조 대에 설치되었다. 춘도기(春到記)와 추도기(秋到記)에 따라 봄과 가을 두 번 실시하였다. 강경과 제술 두 가지 시험이 있었으며, 응시자가 원하는 시험을 선택하여 실시하였다. 선발 정원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강경 · 제술의 각 1등에게는 문과의 복시 혹은 전시에 직부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졌다.
통독은 매년 성균관 대사성이 서울과 지방 유생에게 제술과 강경을 각각 11차씩 시험을 보여 채점한 점수를 모두 합산하여 식년문과 복시에 직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시험과목은 제술에서는 부(賦) 1편 및 표(表) · 논(論) 중의 1편을 시험보이고, 강경으로 사서와 삼경을 배강(背講)시켜서 성적 우수자 10인을 뽑았다.
외방별과는 외방에서 치르는 별과로 성적 우수자에게는 직부전시의 특전을 주었다. 급제를 주는 외방별시 문과와는 다르며 『속대전』에서 법규화되었다. 선발인원은 시험 때에 임금에게 품의하여 정하였다. 제술 시험과목은 증광문과 전시와 마찬가지로 부 · 표 · 책 중의 1편으로 하였다. 평안도 · 함경도 · 강화 · 제주 등지에는 왕의 특지가 있어야 시행하였다. 중신이 시관일 경우는 급제를 주었고 어사가 시관일 경우 전시에 직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초시는 모두 시행하지 않았다.
이처럼 그 외의 문과 각종 고시에서는 문과 전시나 복시에 직접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거나 문과 초시에 분수를 가산해 주는 급분의 특전을 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직부생의 경우 처음에는 식년시에만 응시하게 하였으나, 나중에는 증광별시 · 별시 · 정시에도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 직부 전시생은 합격자 발표 때 방말(榜末)에 붙여서 별도로 발표하는 것이 관례였다. 직부 복시생은 각종 문과의 복시에 응시할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복시가 없는 별시 · 정시의 경우 초시에 응시해야 하였다.
급분유생(給分儒生)은 식년문과 초시에 분수가 가산되어 합격률이 높았기 때문에, 일반 수험생들의 불평이 많아졌다. 그래서 정원 외로 계산하였다. 급분도 직부복시와 다름없는 특전이 되었다. 급분유생도 처음에는 식년문과 초시에만 응시하도록 하였으나, 나중에는 증광문과 · 별시문과 · 정시문과 초시에도 응시하게 하였다.
이 같은 직부제 운영은 식년시와 증광시 정원에 변화를 가져왔다. 시험을 생략하고 곧바로 복시나 전시에 응시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직부제는 관학의 부흥과 경학에 대한 강화책이 시도되던 중종과 명종 대에 전강(殿講)과 정시(庭試)를 통해 빈번하게 활용되었다. 특히 명종 대에는 직부전시 사례가 많아지면서 직부전시인을 식년시 합격 정원 내에 포함시키는 문제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대신들은 직부인을 33인 정원에 포함할 경우 식년시 초시를 거쳐서 복시에 응시하는 사람들의 경쟁률이 높아지고, 법전에 명기된 합격 인원을 훼손시킬 수도 있음을 이유로 반대하였다. 하지만 1549년(명종 4) 무과 시험에서 직부인을 정원 외로 합격시킨 것에 따라 문과도 정원 외로 합격시키는 것으로 하였다.
직부전시는 식년문과에만 실시된 것이 아니라 점차 비정기 문과에도 적용되었다. 숙종 대부터는 별시문과 직부가 상례화되었다. 식년시 이외의 문과에도 직부할 수 있다는 내용이 정조 대 편찬한 『대전통편』에 법제화되었다.
문신의 승진을 위한 시험으로 문과중시(文科重試) · 문신정시(文臣庭試) · 문신중월부시(文臣仲月賦試) · 문신전강(文臣殿講) 등이 있었다.
문과중시는 10년에 한 번씩 시행되는 정기시험으로 당하관 이하의 문신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이었다. 문과와 함께 무과도 시행되었다. 그 대거로서 문 · 무과 별시도 실시되었다. 처음에는 정년(丁年)에 열었으나 나중에는 병년(丙年)에 여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처음에는 문과중시 문신을 전정의 동쪽에 앚히고, 별시문과의 응시자를 서쪽에 앉혀서 같은 문제로 고시하였다. 하지만 여러 가지 폐단이 드러났기 때문에 따로 시행하였다.
시험과목은 그때마다 품의하여 정하였으나 대체로 표 · 책 중의 한 문제를 내었다. 국왕이 친림하여 의정 1인, 정2품 이상 2인을 독권관, 정3품 당하관 4인을 대독관으로 임명하여 시험을 치렀다. 선발인원은 그 때마다 왕의 품의를 받아서 정하였다.
합격자는 식년문과와는 달리 을과 1 · 2 · 3등으로 나누었는데, 장원 1인은 4계급, 2 · 3등은 3계급, 을과 2등은 2계급, 을과 3등은 1계급씩 승진시키되 정3품 당상관까지를 상한으로 하였다. 참하관은 모두 6품으로 승진시켰다.
문신정시는 1463년(세조 9) 경회루에서 정3품 당하관 이하를 책(策)으로 시험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후 왕의 특명에 의하여 수시로 실시되었다. 1669년(현종 10) 춘당대에서 관무재를 하고 같이 문신정시를 거행한 뒤로는, 관무재 때에 문신정시와 춘당대시를 번갈아 여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문신정시는 『속대전』에서 처음으로 법제화되었다. 시험 대상이 왕의 품지에 따라 종1품 이하 문신을 대상으로 한 경우도 있었으나, 응시 대상을 정3품 당상관 이하로 법규화하였다. 『대전통편』에서는 관무재에 대응하여 보이는 과거로 문신정시와 춘당대시를 번갈아 시행한다고 규정하였다.
시험과목은 증광문과 전시와 같게 하고 10운(韻) 혹은 20운의 율시(律詩)를 하나 더 하였다. 시험관은 의정 1인, 정2품 이상 2인을 독권관, 종2품 4인을 대독관으로 임명하였다. 선발인원은 왕에게 품의하여 정하는데 보통 5, 6인 정도였고, 많으면 11인이었다. 장원의 경우 정3품 당하관으로 근무 연한이 찬 자는 당상관, 참상관은 당하관, 참하관은 참상관으로 승진시켜 주었고, 나머지 합격자는 상을 내려주었다.
문신중월부시는 4중삭(四仲朔:2 · 5 · 8 · 11월)에 3품 이하의 문신들에게 시 · 부 · 표 등을 시험 보여 1등으로 합격한 자에게 승급의 특전을 주었다. 이 시험은 국초에는 성행하였으나 나중에는 거의 유명무실해졌다.
문신전강은 3품 이하의 문신들에게 1경을 전공하게 한 뒤 이를 왕 앞에서 고강하였다. 문신들의 경학 공부를 권장하기 위해서였는데, 영조 및 정조 시대에 성행하였다. 문신전강 역시 1등에게 승급의 특전을 주고 나머지는 상을 주었다.
무과는 문과의 대거(對擧)라 하여 문과가 실시될 때에 같이 시행되었다. 3년 마다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식년시와 비정기 시험으로 증광시, 별시, 정시, 알성시, 춘당대시 등이 있었다. 무과의 제 규정은 대체로 문과에 준하여 시행하였으나 운영 방식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학교제도와 연관을 갖고 운영되는 문과와는 달리 무과는 그와 무관하게 운영되었다는 것, 그리고 문과의 생원․진사사에 해당하는 일차 시험의 절차가 없이 바로 본시험을 치렀다는 것이다.
무과는 1402년(태종 2)에 처음 시행된 후 과거제가 폐지되는 1894년(고종 31)까지 실시되었다. 무과는 초시, 복시, 전시를 거치는 삼장제(三場制)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식년무과와 증광무과를 제외한 각종 비정기 무과에서는 한번 시험으로 당락을 결정하는 단시제, 그리고 강경 시험이 있는 복시를 생략하고 초시와 전시만으로 행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시험과목은 강서(講書)와 무예(武藝) 두 가지였는데, 무예와 지략, 유교적 교양을 겸비한 자를 뽑기 위해서였다. 강서는 복시에만 있는 시험으로 사서오경 중의 하나, 무경칠서(武經七書) 중의 하나, 『자치통감(資治通鑑)』, 『 역대병요(歷代兵要)』, 『장감박의(將鑑博議)』, 『무경(武經)』, 『 소학(小學)』 중의 하나를 선택해, 경국대전과 함께 시험을 치렀다. 1736년(영조 12)부터 무예 시험을 보고 난 후에 강서 시험을 보도록 하였다.
조선 전기 무예는 목전(木箭), 철전(鐵箭), 편전(片箭), 기사(騎射), 기창(騎槍), 격구(擊毬)의 6기(技)가 있었다. 조선 후기 『속대전』에서는 유엽전(柳葉箭), 관혁(貫革), 조총(鳥銃), 편추(鞭芻)를 신설하고, 기사를 기추(騎芻)로 바꾸고, 격구는 폐지하였다. 유엽전은 활쏘기 종목의 하나로 사용하는 화살의 촉이 버드나무 잎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관혁은 활쏘기의 목표물을 뜻하는 말인데 시험과목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였다. 조총은 100보 거리에서 3발을 쏘도록 하였다. 편추는 말 위에서 편곤(鞭棍)으로 허수아비를 맞히는 마상무예이다.
식년무과 초시에서는 190인을 선발하였다. 초시는 서울과 지방에서 실시하였으며, 서울에서 행하는 훈련원시에서 70인을 뽑았다. 지방에서 행하는 향시는 경상도 30인, 전라도 · 충청도 각 25인, 강원도 · 황해도 · 함경도 · 평안도 각 10인씩 총 120명을 뽑았다. 경기에서도 20명을 뽑았으나, 서울과 가까워 폐단이 생기자 폐지하고 그 인원을 훈련원시에 통합하였다.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무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향리는 무경칠서를 강하여 조(粗) 이상인 경우 향시 응시를 허용하였다.
복시의 선발인원은 28인이며, 전시에서는 복시 합격자 28인의 등수를 정하였다. 당락과는 관계가 없었다. 다만, 직부전시인의 경우, 『대전통편』에서 직부전시인이 점수를 얻지 못하면 문과의 예에 따라 다음 전시로 물러나 시험 치르게 한다고 규정하였기 때문에, 떨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등수는 갑, 을, 병과로 나누어 갑과 3인, 을과 5인, 병과 20인으로 28인을 선발하였다. 갑과 3명 가운데 1등을 장원 급제라 하였다.
조선 초에는 무과급제자가 무직자일 경우 갑과 3인은 종7품, 을과 5인은 종8품, 병과 20인은 종9품을 각각 주도록 규정하였다. 문과급제자가 갑과 외에는 권지에 임명된 데 반하여, 무과는 28인 모두가 8품 이상의 실직에 서용되었다. 하지만 세종 대 이후 군사 활동이 줄어들게 되자 무과급제자의 진출이 점차 늦어지게 되었으며, 또한 잦은 별시의 시행으로 급제자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자 무과급제자도 문과와 마찬가지로 갑과를 제외한 나머지는 산관을 제수하여 훈련원에 분관하게 되었다.
훈련원 권지에 분관된 자는 6품에 이르게 되면 문과의 삼관(三館) 예에 따라 거관되었다. 무과급제자는 1472년(성종 3년)까지 훈련원에만 분관되었으나 『경국대전』에서는 별시위(別侍衛)도 분관처로 덧붙여졌다.
조선 초기에는 합격자들이 규정대로 관직이나 관품에 진출할 수 있었으나 점차 적체되어 갔다. 그 결과 무과에 합격해도 추천자가 있어야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장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1869년(고종 6) 무과장원은 추천자가 없더라도 얽매이지 않고 등용하게 하였다.
식년무과와 증광무과의 선발인원은 동일하였으며, 대증광무과의 경우 식년무과의 두 배를 뽑았다. 증광무과 선발인원은 식년무과와 같이 28인이었다. 여러 경사를 많이 합하여 실시하는 대증광무과에서는 식년무과의 2배, 즉 56인을 뽑았다.
각종 별시의 정원은 『속대전』에 따르면 초시 선발인원은 왕에게 품지하고 전시는 초시 합격자 수에 따르도록 해서 구체적인 정원이 없었다. 알성무과와 중시무과는 초시의 경우 두 시험장에서 각각 50인씩 총 100인을 뽑았다. 전시에 대한 규정은 없다.
시험장은 훈련원시는 두 곳으로 나누어 1소는 훈련원, 2소는 모화관으로 하였다. 시관으로 2품 이상 1인, 참시관으로 당하 문신 1인과 당하 무신 2인, 감시관으로 사헌부 감찰 1인을 각각 파견하였다. 향시는 해당 도에서 거리를 계산하여 중간쯤 되는 곳에 시험장을 설치하였으며, 시관은 도내 영장(營將), 우후(虞侯) 및 품계가 높은 문 · 무 수령 가운데 선택하여 정하였다.
복시 시험장은 1소는 훈련원, 2소는 모화관이다. 종루를 기점으로 좌우로 나누어 왼쪽 지역의 응시자는 1소에, 오른쪽 지역은 2소에서 응시하도록 하였다. 지방의 경우 경상도 · 충청도 · 전라도의 좌도 응시자는 1소, 경상도 · 충청도 · 전라도의 우도 응시자는 2소, 함경도와 황해도 응시자는 1소, 평안도와 강원도 응시자는 2소에서 응시하도록 하였다. 시관은 2품 이상 문신 1인과 무신 2인, 참시관은 당하 문신 1인과 당하 무신 2인, 감시관은 사헌부와 사간원의 각 1인을 파견하였다. 이 밖에 두 곳에 차비관 15인, 습전군사 30인씩 파견하였다.
전시는 주로 모화관에서 시행하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서총대(瑞蔥臺) 등 궁궐 안에서 실시하기도 하였다. 전시의 시관은 복시와 같았으며 의정 1인을 명관(命官)으로 하였으나 전임대신이나 1품관이 대신할 수 있었다. 『대전통편』에서는 대신 1명(명관은 1품이 대신함), 2품 이상 문 · 무관 각 1명, 3품 이하 문 · 무관 각 2명씩 총 9명을 파견하도록 하였다. 감시관에 대한 규정은 없다.
비정기 무과로 증광무과, 별시무과, 정시무과, 알성무과, 춘당대무과 등이 있었다. 증광무과는 식년무과와 시험 방법과 과목이 같았다. 그런데 증광무과 복시의 강서는 식년무과 복시와 달라서 사서오경과 무경칠서 중에서 원하는 하나만 선택하도록 하였다.
별시무과의 선발인원은 왕의 품지에 따라 정하였다. 시관은 2품 이상 문신 1인과 무신 2인, 참시관은 당하 문신 1인과 당하 무신 2인, 감시관은 사헌부 · 사간원 각 1인으로 정하였다. 전시는 시관으로 2품 이상 문신 1인과 무신 2인, 참시관으로 당하 문신 1인과 당하 무신 2인, 감시관으로 사헌부와 사간원 각 1인을 정하였다. 의정 1인이 명관을 맡았다. 시험과목은 목전, 철전, 유엽전, 편전, 기추, 관혁, 격구, 기창, 조총, 편추, 강서 11기(技)를 왕에게 올려 그 가운데 낙점을 받아 2기 또는 3기를 시험 보았다. 『대전통편』에서는 별시무과 전시의 시관은 식년무과와 같이 하였고, 『대통회통』에서는 별시무과 초시는 식년무과와 같이 각 도에서 시행하였다.
정시무과와 알성무과의 시험과목과 방법은 별시무과와 같았다. 알성무과에서는 초시 두 곳 시험장에서 각 50인을 뽑았으며, 전시에서 왕이 친림한 가운데 시취한 것이 달랐다. 춘당대무과는 창경궁 춘당대에서 왕이 친림한 가운데 시행한 과거로 춘당대시라 부르기도 하였다. 정시무과와 알성무과는 한 차례의 시험으로 당락을 결정한 정시문과와 알성문과와는 달리 초시와 전시 두 단계에 걸쳐 실시하였다.
각 군문의 무사를 친림하여 무예를 시험 본 후 춘당대무과를 실시하였다. 선발인원은 왕에게 품의해서 정하였다. 친림과로 상피제가 적용되지 않았지만, 1744년(영조 20)부터 부자가 함께 응시하는 것을 금하였다. 춘당대무과는 초시와 전시 두 차례로 이루어졌으며, 전시일에 방방하였다.
외방별과무과는 평안도 · 함경도 · 강화 · 제주 등에서 왕의 특별 명령이 있을 때 시행하는 시험이다. 『속대전』에 이르러 외방별과에 대한 규정이 나타난다. 중신을 파견하여 실시하면 초시를 생략하고 즉시 그곳에서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어사를 파견하여 실시하면 합격자에게 직부전시의 특전을 주었다. 시험과목은 별시무과와 마찬가지로 11기 가운데 왕의 낙점을 받아 결정하였다.
도시(都試)는 무사 선발을 위한 특별시험으로, 무예도시(武藝都試) 또는 춘추무예도시(春秋武藝都試)라고 부르기도 한다. 매년 봄과 가을에 서울에서는 병조와 훈련원 당상관이 의정부 · 6조 · 도총부의 당상관 각 1인과 함께 군사 및 동 · 서반 종3품 이하 관료나 한량인을 대상으로 시행하였다. 지방에서는 각 도의 관찰사와 병마절도사가 주관하여, 서울의 예에 따라 뽑아 왕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해당 도의 수령 · 우후 · 만호 및 그 자제는 응시할 수 없었다.
1등한 자는 품계를 올려주되, 다만 계궁자나 근무일수를 받기 원하는 사람에게는 모두 상으로 근무일수를 올려주었다. 외방의 경우는 근무일수를 올려주되 중앙보다 반을 감하였다. 2등과 3등은 근무일수만을 올려주었다. 임진왜란 이후에 중앙 군영이 발달하면서 5군영 군사들의 무예 단련책으로 발달하였다. 『속대전』에서는 한량에게는 전시에 직부할 특전을 주었으며, 출신은 변장(邊將)에 임명하였다.
이 밖에도 권무군관을 대상으로 실시한 권무과(權武科), 각 군영(軍營)에 별무사도시(別武士都試) · 취재(取才) · 시재(試才) · 시사(試射) 등의 각종 고시가 있었다. 합격자는 식년시 · 증광시나 각종 별시의 전신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직부전시의 자격을 주거나 진급시키고 상을 주었다.
그리고 당하 무신 또는 관직이 없는 무과 출신을 대상으로 10년마다 실시한 시험으로 무과중시(武科重試)가 있었다. 무과 급제자에게 지속적으로 무예를 권장하고 인재를 등용할 목적으로 1416년(태종 16)에 5인을 선발한 이후 1886년(고종 23)까지 실시하였다. 무과중시는 초시와 전시 두 단계로 실시하였다. 『경국대전』에서는 10년에 한 차례 실시하고 합격 정원과 시험 방법은 실시할 때마다 임금에게 아뢰어 정하도록 하였다. 『속대전』에서는 초시 인원은 알성무과를 따르도록 하여 1소와 2소에서 각각 50인씩 총 1백 인을 선발하도록 하였다. 『 전율통보(典律通補)』에서는 초시 합격자가 정원에 미달하는 사태가 발생해도 정원을 채우지 말고 그대로 발표하도록 하였다.
무과중시의 시험관은 정시무과와 같이 하였다. 시험과목은 정시무과와 같이 목전, 철전, 유엽전, 편전, 기추, 관혁, 격구, 기창, 조총, 편추, 강서 등 11기(技)를 왕에게 올려서 낙점을 받아 2기 또는 3기만을 시험 보았다.
무과중시는 당하관 이하의 승진 시험이므로 중시에 합격하면 당하관에서 당상관으로, 또는 참하관에서 참상관으로 특진할 수 있었다. 『속대전』에서 중시에 합격한 사람에게 품계를 더해주는 규정은, 문과 급제자 중 원래 관계를 갖고 있는 자의 관품을 올려주는 『경국대전』 규정에 따르도록 하였다. 무과중시에 합격하면 최소 1계에서 4계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갑과 급제자의 경우 정3품 당하관에게는 당상관으로 승진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졌다.
그런데 무과는 전쟁을 치르게 되면서 크고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런 변화는 명종 대 을묘왜변부터 시작되었으며, 특히 임진왜란 이후 선발인원이 급증하였다. 한 번의 무과에서 수천 인을 뽑았으며, 각 도에 공명패(空名牌)를 보내어 왜적의 머리 하나만 베어오면 공사천을 가리지 않고 무과에 급제시켰다. 서북 변방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필요에 따라 한 번에 1만여 인을 선발하는 만과(萬科)가 실시되기도 하였다.
무과에서 선발인원이 많아진 현상은 무과의 가장 큰 폐단으로 지적되었다. 하지만 국가에서는 무사들을 위무한다는 명분으로 선발인원을 줄이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북벌을 주장하였던 숙종 대를 거치면서 나타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나아가 금군(禁軍)의 정비나 용호영(龍虎營), 장용영(壯勇營)의 성립 등 친군(親軍)을 강화하려는 정책과도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영조, 정조 대에 왕권 강화를 위해서 군영을 정비하는 과정을 반영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무과는 한편으로는 양반이 치르는 과거이기도 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일반인들의 신분 상승을 가능하게 해주는 성격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무과가 지닌 독특한 성격으로 인해서 문과에 비해서 어느 정도의 개방성과 역동성을 지닌 선발 제도로 볼 수 있다. 문치주의를 지향하던 조선 사회에서 무과 급제자의 역할은 일정한 한계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자면 문과와 더불어 양반체제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잡과는 기술관 등용 시험으로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의 네 종류가 있었으며, 역관 · 의관 · 음양관 · 율관의 최고의 벼슬길이었다. 기술관서의 종6품 이상 참상관으로 승급하기 위해서는 잡과에 합격해야 하였다. 부경사행(赴京使行)이나 관직 진출에 있어서 잡과 합격자가 우선시되었다.
문과와 달리 대 · 소과의 구별이 없는 단일과로서 식년시와 증광시에만 실시하였으며, 초시 · 복시 2단계만 있고 전시는 없었다.
초시는 식년 전 해 가을에 해당 관청의 주관 아래 실시하였고, 복시는 식년 봄에 해당 관청의 사역원 제조와 예조 당상관의 주관 아래 실시하였다. 역과는 한어(漢語) · 몽어(蒙語) · 왜어(倭語) · 여진어(女眞語) 4개 전공이 있었다. 여진어는 1667년(현종 8) 청어(淸語)로 개칭하였다. 초시에 향시가 있는 것은 역과 중 한어과뿐이며, 역학원이 있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관찰사가 실시하였다. 잡과별 초시와 복시 합격자 정원은 〈표 3〉과 같다.
과목 | 초시 | 복시 | 주관 관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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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과 | 한학 | 45 | 13 | 사역원 |
몽학 | 4 | 2 | ||
왜학 | 4 | 2 | ||
여진학[청학] | 4 | 2 | ||
소계 | 57 | 19 | ||
의과 | 18 | 9 | 전의감 | |
음양과 | 천문학 | 10 | 5 | 관상감 |
지리학 | 4 | 2 | ||
명과학 | 4(8) | 2(4) | ||
소계 | 18 | 9 | ||
율과 | 18 | 9 | 형조 | |
총계 | 111인(115) | 46인(48) | ||
〈표 3〉 잡과 합격 정원 및 주관 관서 (『경국대전』) | *주: 『속대전』, 『대전통편』, 『대전회통』의 정원은 『경국대전』과 같다. 단, ( ) 안은 『대전회통』에서 증액된 정원이다. |
잡과 고시 방법은 식년시와 증광시가 동일하였다. 국가의 경사가 겹치는 경우 실시한 대증광시의 경우 선발 정원이 늘어났다. 대증광시는 각 과 전공별로 초시에 4인, 복시에 2인씩 추가하여 최종적으로 역과 27인, 의과 11인, 음양과 15인, 율과 11인해서 모두 64인을 뽑았다.
1797년(정조 21) 관상감의 요청에 따라 음양과 명과학 선발인원을 늘리도록 하여, 『대전회통』에 법규로 반영되었다. 음양과 명과학의 정원이 2인 증가하여, 음양과의 정원은 11인이 되었다. 잡과 식년시와 증광시 선발 정원이 48인으로 늘어났다(대증광시는 66인). 『대전통편』에서 잡과의 수위(首位)가 역과에서 음양과로 바뀌었다.
법규대로 46인을 선발한 경우는 드물었으며, 19세기 이전까지는 대체로 정원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는 잡학의 특성상 정원에 구애받지 않고 통역, 의술, 천문, 법률에 능통한 자들을 뽑았기 때문이다. 19세기 전반까지 법정 인원이 지켜졌으며,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급격하게 증가한 것은 문무과의 남설(濫設)과 비교해 볼 때 주목된다.
시험과목은 각 과의 전공 서적과 경서(經書) 및 『경국대전』을 필수과목으로 하였다. 역과에는 한어 · 몽어 · 왜어 · 여진어 4개 전공이 있었다.
역과 시험과목은 전문서 · 경서 · 『경국대전』이며 초시와 복시가 동일하였다. 시험 방법은 한어는 역학서와 사서(四書)의 강서(講書)와 『경국대전』의 번역이며, 몽어 · 왜어 · 여진어는 역학서와 경서의 사자(寫字)와 『경국대전』 번역으로 시험을 치렀다. 사서는 임문고강(臨文考講)하게 하고, 『 노걸대』 · 『박통사』 · 『직해소학』은 배송(背誦)하였다.
의과 시험과목은 의학 전문서와 『경국대전』을 강서(講書)하였다. 시험 방법은 『찬도맥(纂圖脈)』과 『동인경(銅人經)』은 외우게 하고, 『직지방(直指方)』 · 『득효방(得效方)』 · 『부인대전(婦人大全)』 · 『 창진집(瘡疹集)』 · 『태산집요(胎産集要)』 · 『 구급방(求急方)』 · 『화제방(和劑方)』 · 『본초(本草)』 · 『경국대전』은 임문고강하게 하였다.
음양과의 시험과목은 전공서와 『경국대전』을 강서하였다.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 전공별로 시험과목과 방식이 달랐다. 천문학은 『보천가(步天歌)』는 외우게 하고, 『경국대전』은 임문고강하게 하였으며 『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 · 『 칠정산외편』 · 『교식추보가령(交食推步暇令)』을 계산하게 하였다. 지리학은 『 청오경(靑烏經)』과 『 금낭경(錦囊經)』은 배강, 『호순신(胡舜申)』 · 『 명산론(明山論)』 · 『지리문정(地理門庭)』 · 『감룡(撼龍)』 · 『착맥부(捉脈賦)』 · 『의룡(疑龍)』 · 『동림조담(洞林照膽)』 · 『경국대전』은 임문고강하게 하였다. 명과학은 『원천강(袁天綱)』은 배강, 『서자평(徐子平)』 · 『응천가(應天歌)』 · 『 범위수(範圍數)』 · 『극택통서(剋擇通書)』 · 『경국대전』은 임문고강하게 하였다.
율과 시험과목은 『 대명률(大明律)』은 외우게 하고, 『 당률소의(唐律疏議)』 · 『무원록(無寃錄)』 · 『율학해이(律學解頥)』 · 『율학변의(律學辨疑)』 · 『경국대전』은 임문고강하게 하였다.
잡과의 시험과목은 초시와 복시가 동일하였다. 시험과목은 『속대전』 이후 시의에 맞게 많은 과목이 폐지되고 일부 과목은 새롭게 추가되었다. 시험과목 수가 전반적으로 줄어들어 시험에 응시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해졌다.
합격자에게 세종 대에 홍패를 주었으나 뒤에 백패로 바꾸었다. 백패는 백색 종이에 합격자의 직역, 성명, 시험 종류, 등위 등을 기록하였다. 생원진사시 백패와는 달리 교지(敎旨) 형식을 따르지 않고 예조에서 왕명을 받아 발급하는 문서로 예조 명의로 발급하는 교첩식(敎牒式)을 따랐다. 『경국대전』은 백패와 잡과백패를 구분하여 기재하였다.
합격자는 등수에 따라 품계를 수여하였다. 역과 1등은 종7품계, 2등은 정9품계, 3등은 종9품계를 받았으며, 역과 · 의과 · 음양과 1등은 종8품계, 2등은 정9품계, 3등은 종9품계를 받았다. 이미 품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1계를 더 올려주고, 올린 품계가 마땅히 받아야 할 품계와 같을 때에는 다시 1계를 더 올려주었다. 잡과 합격자들은 각 아문의 권지(權知)로 임명되었다.
법제상으로는 양인 이상이면 과거 시험에 응시가 가능하였다. 『경국대전』의 응시 자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문과는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 이하, 무과는 정3품 어모장군(禦侮將軍) 이하, 생원진사시는 정5품 통덕랑(通德郞) 이하만이 응시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문 · 무과는 정3품 당하관 이하, 생원진사시는 정5품 이하 관원들만 응시할 수 있었다.
수령은 품계에 상관없이 생원진사시에 응시할 수 없었다. 지방의 사족과 더불어 생원진사시에서 경쟁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종친은 조선 초에는 과거 응시를 허용하였으나 1471년(성종 2)부터는 금하였다.
양반이라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결격 사유가 있는 경우는 문과와 생원진사시에 응시할 수 없었다. 죄를 지어 영원히 관직에 임용되지 못하게 된 자, 장리(贓吏)의 아들, 재가녀 및 실행(失行)한 부녀자의 아들 및 손자, 서얼의 자손은 응시할 수 없었다.
죄를 범하여 영구히 관직에 임용하지 못하게 된 자는 고의로 결옥일한(決獄日限)을 어긴 자, 관리가 남형(濫刑)으로 피의자를 죽게 한 자, 공물(貢物)을 대납한 자 등을 말한다.
장리는 나라의 전곡을 횡령하거나, 뇌물을 받은 자로 문과와 생원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재가녀와 실행녀의 아들 및 손자에게도 같은 조치를 취하였다.
서얼 자손은 서얼금고법에 의하여 양반의 첩의 자손은 금고하여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1553년(명종 8) 양첩(良妾)의 자손에 한하여 손자 대부터 문과와 무과 응시 자격을 주었으며, 1625년(인조 3) 서얼 자손의 허통사목이 마련되어 양첩의 손자, 천첩의 증손부터 문과에 응시하게 되었다. 하지만 허통(許通)이라는 직역을 사용해야 하였다. 1696년(숙종 22) 이후는 모두 허용하였다.
하지만 많은 인원을 뽑았던 무과에서 불법으로 응시하는 서얼이나 천인을 가려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자 『속대전』에서는 천인의 무과 응시를 금지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
문과 응시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나 다음의 경우 응시에 제한을 받았다.
㉠ 해당 도에 살고 있지 않은 자는 지방 향시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 원적을 속이고 타도의 향시에 응시하는 자가 있게 되자, 1744년(영조 20) 원적에 없는 다른 도에 살고 있는 사람이 향시에 응시하는 경우 3식년 동안 응시자격을 박탈하였다.
㉡ 현직 관리는 지방 향시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왕명으로 휴가를 받은 사람은 예외로 하였으나, 『속대전』 이후로는 왕명으로 휴가를 받은 경우에도 허가하지 않았다.
㉢ 양란(兩亂) 이후 쇠퇴해진 관학의 재건을 위하여 1651년(효종 2) 도목제(都目制)를 실시하였다. 서울과 지방의 유생을 『소학』 · 『가례』 · 사서 중 1서를 고강하여 조 이상을 뽑아 사학 또는 향교에 분속시켜 면역의 특전을 주었다. 과거 때가 되면 서울은 4관원(四館員), 지방은 수령이 학교의 재적생 일람표인 도목을 작성하여 각 시소에 보냈으며, 시소에서는 도목에 실려 있는 자를 대조하여 녹명을 허용하였다.
㉣ 불미스러운 행동을 한 유생에 대하여 조정에서 과거응시를 제한하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성균관 유생들이 자치기구 재회(齋會)를 열어 불미스러운 행동을 한 자에게 제적 등의 유벌(儒罰)을 주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유벌을 받은 자는 그것이 풀리기 전까지 과거 응시에 제약을 받았다.
㉤ 부모의 상을 당하거나, 승중손(承重孫)이 조부모의 상을 당한 자는 3년상이 끝날 때까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초시 합격자가 상을 당하였을 경우 거주지 수령의 공문을 받아 예조에 제출하면 다음의 복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었다. 이를 진시(陳試)라 하였다. 진시는 전염병을 앓았다거나 하는 경우에도 적용되었다. 진시자는 반드시 초시에 합격하였던 것과 같은 종류의 시험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어느 식년시의 초시에 합격한 자는 다음 번 식년시의 복시에, 어느 증광시의 초시에 합격한 자는 다음 번 증광시의 복시에 응시해야 하였다.
㉥ 향리가 무과에 응시할 경우에는 초시를 치르기 전 별도의 무경칠서를 시험 보아 조(粗) 이상의 성적을 받아야 가능하였다. 향리는 문과 응시 자격은 있었으나, 문과 응시에 제약 조건이 따랐다. 녹명할 때 사조단자(四祖單子) 이외에 양반 관료의 보증서인 보단자(保單子)를 더 제출해야 하였다. 중종 대 이후에는 제약 내용이 더 강화되어서 부친, 조부, 증조부, 외조부 사조 내에 누구나 알 수 있는 현관이 없는 경우에는 보단자 이외에 지방 응시자는 경재소 관원 3명, 서울 응시자는 해당 부(部) 관원 3명의 추천서를 첨부하도록 하였다.
과거응시자는 응시 자격을 심사하고 수험생으로 등록하는 녹명(錄名) 절차를 거쳐야 하였다. 녹명은 서울에서는 사관(四館),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임명한 녹명관이 담당하였다. 응시자는 녹명을 할 때 본인의 성명, 본관, 거주지와 부 · 조부 · 증조부의 관직과 성명 및 외조부의 관직, 성명, 본관을 기록한 사조단자(결혼한 경우에는 처부 포함)와 6품 이상의 관원이 도장을 찍은 보단자를 제출하였다.
사조 안에 9품 이상의 관원이 없는 경우, 지방 응시자는 경재소 관원 3인의 추천을 받도록 하고, 서울 응시자는 거주하는 부(部)의 관원 3인의 추천서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경재소가 혁파된 후에는 무과의 경우 문무 현관(顯官) 3인의 서명을 받도록 한 것이 확인되고 있다. 허위로 녹명단자를 작성하여 과거에 응시한 자는 수군(水軍)에 충당하도록 되어 있다. 때문에 녹명단자를 사조녹명단자, 사조단자, 보단자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문과와 생원시 · 진사시는 녹명 단계에서 예비시험의 통과 여부를 확인하였다. 생원시 · 진사시 초시에는 『소학』을 고강하는 조흘강(照訖講), 생원시 · 진사시 복시에는 『소학』과 『주자가례』를 고강하는 학례강(學禮講), 식년시 문과 복시에는 『경국대전』과 『주자가례』를 고강하는 전례강(典禮講)을 통과해야 본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통과자에게는 그것을 증명해주는 조흘첩(照訖帖)을 발급하였다. 녹명에서는 이 증명서를 조사하여 응시 자격을 확인하였다.
녹명은 시험 응시 전까지 이루어졌다. 지방 유생들은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기상 조건 등으로 인해 미리 녹명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경우는 입문녹명(入門錄名)이라 하여 시험장에 들어갈 때 녹명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녹명을 하지 않고 혼잡한 틈을 타 시험장에 들어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입문녹명은 17세기 이후에는 금지되었다. 대체로 녹명은 시험 개장 10일 전까지 해야 하였지만, 후기로 가면서 녹명 기일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녹명소에서는 녹명 서류를 묶어서 서울 거주자는 한성부로, 지방 거주자는 감영으로 보내 하자 여부를 확인하였다. 녹명관은 수험생의 결격 사유가 없음을 심사한 다음 천자문 순서의 자표(字標)를 기재하고, 자표의 순서대로 별도의 녹명책에 응시자 명단을 기입하였다. 생원진사시와 문과 응시자는 녹명단자와 시험지에 기재된 인적 사항을 대조하고 시험지에 확인 도장을 찍어 돌려주었다. 이어서 녹명책에 기입하고 시험지에 답인(答印)한 뒤 시험 장소를 배정해 주었다. 시험의 공평성을 유지하기 위해 각 시험 장소의 응시자 수를 고르게 배분하기 위한 것이었다.
복시의 경우 출신 지역별로 시험장을 배정하였다. 문 · 무과, 생원진사시 복시는 2개의 시험장으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응시자에게는 초시에 합격한 지역에 따라 시험장이 배정되었다. 문과와 생원진사시는 경상좌도 · 전라좌도 · 충청좌도 · 황해도 · 평안남도 · 함경남도 합격자가 1소, 경상우도 · 전라우도 · 충청우도 · 강원도 · 평안북도 · 함경북도 합격자가 2소에 배정되었다.
무과는 서울 · 경기 중 종루의 왼쪽 출신, 경상좌도 · 전라좌도 · 충청좌도, 함경도 · 황해도 합격자가 1소, 서울 · 경기 중 종루의 오른쪽 출신과 경상우도 · 전라우도 · 충청우도, 평안도 · 강원도 합격자가 2소에 배정되었다. 이처럼 시험장을 배정한 것은 시험장 간의 공평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잡과는 한 곳에서 실시하였다. 시험관과의 상피 등 부득이하게 다른 시험장에 응시해야 하는 경우에는 녹명책에 사유를 기재하여 참고하도록 하였다. 녹명책은 응시자가 시험장에 들어갈 때 입장 자격을 확인하는 근거 자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녹명단자는 시험 후 합격자 명단인 방목을 작성할 때 신원을 확인하는 근거 자료로 활용되었다.
녹명을 담당하는 기구와 관원은 시험 종류에 따라 달랐다. 식년문과 초시의 경우 관시는 성균관, 한성시는 한성부와 예문관 · 성균관 · 승문원 · 교서관 7품 이하 관원 1인이 담당하였다. 향시는 관찰사가 정한 차사원이 담당하였다. 식년문과 복시는 예문관의 봉교 이하 관원이 성균관 · 승문원 · 교서관 7품 이하 관원과 함께 맡았다. 정시문과와 알성문과는 성균관에서 녹명하였다. 생원진사시 초시는 문과 초시와 녹명관이 동일하였으며, 복시는 성균관 박사 이하 관원이 예문관 · 승문원 · 교서관의 7품 이하 관원과 함께 담당하였다.
무과는 초시 중 원시 녹명은 훈련원, 향시 녹명은 병마절도사가 정한 차사원이 담당하였다. 복시 녹명은 병조와 훈련원 7품 이하 관원이 맡았다. 잡과 녹명은 초시의 경우는 해당 기술관서, 구체적으로 역과는 사역원, 의과는 전의감, 음양과는 관상감, 율과는 형조에서 맡았으며, 복시는 예조와 해당 기술관서의 책임자인 제조가 담당하였다.
응시자들은 녹명할 때 시험지를 정해진 질과 규격의 것으로 구입해서 제출하였다. 시험지는 명지(名紙)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하하품(下下品) 도련지(擣鍊紙)로 규격에 맞추어 만든 것으로 하였다. 그런데 시험관들이 시험지의 질을 보고서 권문가의 자제를 인지하고 합격시키는 일도 없지 않았다. 일부러 두터운 고급 종이를 사용하는 폐단도 생겨났다. 그래서 그런 용지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를 어긴 자는 정거시키고 타인(打印)한 시험관은 논죄하도록 법제화하였다. 이런 폐단이 계속되자, 영조는 사간원의 요청에 따라 이를 공정하게 시행하도록 하고 이를 어긴 자는 과장에서 사정을 쓴 형률을 적용하도록 하게 하였다.
시권(試券)은 오른쪽에 응시자의 인적 사항을 기재한 후 서너 차례 접어서 기재된 내용이 보이지 않도록 봉하였다. 이를 봉미(封彌)라 한다. 봉한 부분 위에 근봉(謹封)이라고 썼다. 현재 전해지는 시권에는 응시자의 인적 사항과 시험문제, 응시 과목, 답안 외에 답안 제출의 순서를 매긴 자표(字標), 성적 등이 기재되어 있다. 시험이 끝난 후 합격자의 시권은 본인에게 돌려주었다.
시험장에서는 응시자의 입장이 끝나면 여섯 자 간격으로 앉히고 시험장 출입을 금하였다. 식년시와 증광시는 특별히 시간을 정해주지 않았으며 인정(밤 9시)까지 답안지를 내면 되었다. 당일 방방하는 정시, 알성시, 춘당대시 등은 시간을 정해 주었다. 1712년(숙종 38)의 예를 보면 오시(午時)에 문제를 내서 약 2시간 후인 신시(申時)에 시험지를 거두었다. 『속대전』에서는 정시는 날이 길면 오시까지, 날이 짧으면 미시(未時)까지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1713(숙종 39)부터는 시험장에 북을 설치하여 유생들에게 시각을 알리도록 하였다.
1682년(숙종 8) 과장 답안 작성에는 일정하게 정해진 격식이 있었다. 격식에 어긋나면 불합격시켰으며, 설령 합격한다 하더라도 드러나면 불합격시켰다.
㉠ 생원시 · 진사시와 전시의 시권은 반드시 해서로 쓸 것 ㉡ 노장(老莊) 문자를 표절하거나 불가(佛家)에서 쓰는 말을 쓰거나 순자(荀子) · 음양서 · 패설(稗說)을 인용하지 말 것 ㉢ 색목(色目)을 언급하지 말 것 ㉣ 왕이나 역대 왕의 이름을 범하지 말 것 ㉤ 신기하고 기괴한 문자를 쓰지 말 것 ㉥ 책문은 먼저 시험 문제를 옮겨 쓰고 초 · 중 · 종장에서 첫머리에〔虛頭〕에 ‘신복독(臣伏讀)’의 3자를 써야 하는데, 게시된 시험 문제와 자획이 다르거나 한 자라도 빠뜨리지 말 것
한편, 시험 도중 예조좌랑이 시험지를 거두어 예조인(禮曹印)을 찍은 뒤 돌려주기도 하였는데, 혼란을 자아낸다는 이유로 1713년(숙종 39)부터는 시험지를 거둔 뒤 찍었다. 영조 대에는 복시 시험지만 찍도록 하였다.
수권소(修卷所)에서는 제출된 순서대로 답안지를 백 장씩 묶어 책을 만들었다. 그리고 시험지의 피봉과 제문(製文)을 분할하여 제문을 서리(書吏)에게 붉은 글씨로 베끼게 하였다. 그것을 역서(易書)라 하였다.
역서는 문과 중 식년시 · 증광시 · 별시에서만 하고, 친림과에 해당하는 알성시 · 정시 · 춘당대시 및 생원시 · 진사시에서는 하지 않았다. 역서가 끝나면 본초(本草:본 시험지)와 주초(朱草:붉은 글씨로 베낀 답안지)를 대조하여 틀린 곳이 없는지 확인한 다음, 주초만 시험관에게 넘겨주었다.
시험관은 주초를 가지고 채점하여 과(科:갑 · 을 · 병과)와 차(次 : 제1인 · 제2인 · 제3인)를 정한다. 합격된 시험지는 본초와 주초를 일일이 대조하였다. 합격자 명단은 왕에게 보고한 뒤 발표하였다. 문 · 무과는 급제 또는 출신(出身)이라 하고, 생원시 · 진사시와 잡과는 합격이라고 하였다.
방방의(放榜儀)는 왕이 과거 합격자에게 합격 증서를 나누어 주는 의식으로 창방의(唱榜儀)라고도 한다. 1429년(세종 11) 처음 마련되었으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가례」에 「문무과방방의」가 규정되었다. 합격자 발표가 끝나면 길일을 정하여 시행하였다. 방방은 근정전이나 인정전에서 행하였으며, 후대에는 숭정전이나 명정전에서 행하기도 하였다. 방방 시간은 진시(오전 7~9시)이고, 왕과 종친 및 문무백관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으며 급제자의 부모나 친척들도 참관할 수 있었다.
방방 하루 전날 액정서와 장악원에서는 행사에 쓰일 기본 의물과 악기 등을 마련하였다. 내시부에 속한 액정서에는 어좌(御座), 옥새를 놓는 탁자 보안(寶案), 방안(榜案), 홍패안(紅牌案), 향안(香案) 등을 설치하였으며, 장악원에서는 의식을 진행할 때 필요한 음악을 연주하는 악대 및 음악의 시작과 마침을 알리는 휘(麾)를 설치하였다.
종친 · 문무관 4품 이상은 조복(朝服), 5품 이하 관원은 흑단령(黑團領)을 갖추고 왕을 시위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급제자들은 공복(公服)을 입고 문 밖에 대기하다가 방방관(放榜官)이 호명하면 문과 급제자는 동문, 무과 급제자는 서문으로 들어가 전정(殿庭)에 마련된 제자리에 나아갔다. 찬의(贊儀)가 국궁(鞠躬)이라 외치면 급제자들은 음악에 맞추어 왕에게 사배(四拜)하였다. 방방관이 합격자 이름을 부르면 이조정랑은 문과급제자에게, 병조정랑은 무과급제자에게 합격증서 홍패를 나누어 주었다. 생원시 · 진사시와 잡과 백패(白牌)는 예조정랑이 나누어 주었다. 생원시 · 진사시와 잡과의 방방 절차는 문무과와 유사하지만 의식의 규모는 작았다.
문과와 무과 홍패는 붉은 종이로 된 합격증서로 직역, 성명, 시험 종류, 합격 등위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생원시 · 진사시 백패와 잡과 백패는 흰 종이에 합격자의 직역, 성명, 시험 종류, 등위 등을 기록하였다. 그런데 생원시 · 진사시 백패는 국왕이 직접 하사하는 교지로 국보를 찍었다. 잡과 백패는 예조에서 왕명을 받아 발급하는 문서로 예조 명의로 발급되어 예조인만 찍어주었다.
방방의가 끝나면 합격자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꽃과 주과(酒果)를 내리고 1등 3인에게는 일산[盖]도 함께 내렸다. 이를 은영연(恩榮宴)이라 하였다. 합격자들의 축하 잔치로 주악과 함께 광대까지 참여하여 흥겨운 자리를 마련하였다. 은영연을 마친 다음날에는 과거 합격자들이 대궐에 가서 왕의 은혜에 감사를 올리는 의식인 사은례(謝恩禮)를 행하였다. 합격 동기생인 동방(同榜)은 동년(同年)이라 하여 형제와 같이 친하게 지냈다.
사은례를 드릴 때 감사의 마음을 담은 사은전(謝恩箋)을 올렸다. 사은전의 내용은 과거에서 뽑아준 왕의 은혜에 감사를 올리고 충성을 다해 섬기겠다고 다짐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사은례를 마친 다음날 다시 문묘(文廟)에 나가 공자를 알현하는 알성례(謁聖禮)를 행하였다. 문무과의 합격자가 거리 행진을 하는 유가(遊街)는 그 다음 절차로 진행되었다. 유가 행진을 하면서 시험관, 부모, 친척 등을 찾아뵙고 공부하던 기관도 방문하였다. 보통 삼일 동안 도성 안에서 이루어졌다.
지방 출신 합격자들을 위한 영친의(榮親儀)가 있었다. 그들이 고향에 내려가는 날은 수령과 향리의 환영을 받았으며, 마을 어귀부터 집에 이르기까지 유가를 하였다. 유가에 소용되는 물품은 관청에서 주관하였으며 합격자가 타는 말은 왕이 직접 하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방방과 유가가 끝나면 합격자 집에서는 손님을 초대하여 문희연(聞喜宴)을 열었다. 이전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이 선생으로 참여하여 신래(新來)를 희롱하는 신참례(新參禮)도 함께 행하였다. 문희연은 경연(慶宴)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생원시 · 진사시 합격자를 위한 문희연은 사마연(司馬宴)이라 하였다.
과거가 끝난 후에는 각 시험별로 합격자 명부인 문과방목, 무과방목, 사마방목, 잡과방목을 작성하였다. 방목을 통해서 과거제의 실시 현황, 합격자와 신분과 가계 구성원의 사회적 지위 등을 파악할 수 있다.
문과는 초시 · 복시 · 전시 3단계로 실시되어 초시방목, 복시방목, 전시방목이 있다. 『문과방목』이라 할 때는 전시방목을 왕에게 올려 재가를 받은 최종 합격자 명단을 칭한다.
문과방목은 문과가 행해질 때마다 만들어지는 단회방목, 그리고 문과 합격자들을 연대순, 시험 종류별, 성적순으로 종합하여 정리한 종합방목이 있다. 이들 두 종류의 방목은 만들어지는 과정이 다르다. 단회방목은 교서관에서 간행하거나, 합격자들이 스스로 비용을 들여서 간행하였다. 교서관에서 간행한 단회방목은 예조, 의정부, 성균관 등에 보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특별한 경우에 은전(恩典)으로 합격자와 시관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는 1765년(영조 41) 『을유식년문무과방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종합방목은 국가에서 보관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예조에서 소장한 『예조방목』과는 별도로 만들어졌다. 『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문과방목(文科榜目)』, 『등과록(登科錄)』, 『용방회록(龍榜會錄)』 등이 전하고 있다.
단회방목과 종합방목에 기재되는 내용은 공통되는 부분이 많다. 시험에 대한 사항으로는 실시 경위, 일자와 장소, 시제, 은문 등이 기록된다. 권말 부록에 방목색장의 명단과 장원한 글을 실었다. 합격자에 대한 사항으로 전력, 성명, 생년, 자, 본관, 거주지, 생원시 · 진사시 합격년도 간지 등을 기록하고 있다. 가족 사항은 아버지의 직역과 성명, 부모와 조부모 구존 여부, 형제 관계 등이다.
다른 점은 종합방목으로서의 『국조방목』에는 실시 경위, 일시, 시제 등이 간략하게 기록되거나 누락된 경우가 더러 있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정보가 누락된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런데 『국조방목』에는 합격자의 관력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합격 당시에 제작된 것이 아니라 여러 왕 대의 합격자를 정리하였기 때문이다.
무과를 어떻게 시행하였는가 하는 것은 합격자 명부인 무과방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무과방목은 호방(虎榜)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문과와는 달리 합격자 전원을 수록한 종합방목이 간행되지 않았으며, 한 회 합격자 명단인 단회방목만 전하고 있다. 단회방목의 경우에도 무과방목만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앞에는 문과방목, 뒤에는 무과방목을 수록하여 문과와 무과방목을 합본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래서 문무과방목을 용호방(龍虎榜)이라 하기도 하였다. 용은 문(文), 호는 무(武)를 상징한다.
무과방목에는 합격자의 성명, 전력, 생년, 자, 본관, 거주지, 관력 등의 합격자 신상 정보, 아버지의 관직과 이름, 부모와 조부모의 구존 여부, 그리고 무과에 합격한 형제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단회방목과 함께 『 무과총요(武科摠要)』 및 문과방목을 통해서 조선시대에 실시된 무과 과거 실시 현황을 파악해볼 수 있다. 무과의 장원 합격자 이름과 함께 선발인원은 문과방목에도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마방목은 생원시 · 진사시를 사마시라 한 데서 연유한다. 방목은 권수(卷首), 원방(原榜), 권말(卷末)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수에는 시험장과 시험관〔은문(恩門)〕의 관직과 성명이 1소, 2소로 나뉘어 기재되어 있다. 증광시의 경우 증광시가 설행된 이유가 밝혀져 있다. 은문은 복시의 시험관 명단에 해당한다.
원방에서는 생원방, 진사방 순으로 되어 있고, 합격자와 가족에 관한 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합격자는 1등 5인, 2등 25인, 3등 70인으로 성적순으로 적는다. 전력, 이름, 자, 생년, 본관, 거주지, 시험장소와 과목 등이 기재되어 있다. 가족 사항으로는 아버지의 직역 및 성명, 부모 · 조부모의 구존 여부, 형제 이름, 적서(嫡庶) 형제의 이름, 양자로 간 경우 생부의 직역과 이름, 생부모의 구존 여부, 형제 성명 등을 추가로 기재하였다.
권말 부록에는 시험 운영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다. 양시(兩試), 연벽(聯璧), 경외입격자수(京外入格者數) 등과 1, 2소의 시험문제, 일자, 출방일, 방방일, 초시 시험관과 문제 등을 수록하였다. 양시는 생원시와 진사시에 동시에 합격한 사람으로 쌍중(雙中), 구중(俱中)이라 하기도 한다. 생원시와 진사시는 하루걸러 치러지기 때문에 양시 합격이 가능하였다. 연벽은 형제가 한 해에 합격한 경우이며, 연중(聯中), 쌍연(雙聯)이라 하기도 한다.
사마방목은 조선시대 전체 합격자를 집대성한 종합방목이 전해지지 않는다. 한 회의 방목인 단회방목 형태로 각 도서관에 산재하여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전체 조선시대에 배출된 생원 · 진사의 정확한 인원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잡과방목』은 해당 시험 합격자 명단만을 수록한 단회방목, 그리고 조선시대에 실시된 잡과 과목에 따라 왕대별로 정리한 단과방목이 있다. 1498년(연산군 4)부터 19세기 말에 이르는 4백여 년에 걸친 방목 자료가 남아 있다.
수록 내용을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시험설행, 합격자, 가계에 관한 사항으로 구분된다. 먼저 시험설행에 관한 사항을 보면, 시험연도, 시험관, 합격등위 등이 기재되어 있다. 시험연도는 식년시와 증광시 구분이 있으며, 증광시의 경우 설행 이유를 명기해서 무엇을 경축하기 위한 시험인가를 밝혔다. 대증광시도 그렇게 하였다. 퇴행(退行), 직부(直赴), 추부(追附) 등도 기재되어 있다. 합격자의 이름, 생년, 자(字), 본관, 거주지, 전력, 경력 등이 기재되어 있다. 가계에 관한 사항으로 사조(四祖)와 처부, 형제 등 친인척의 경력, 과거합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양자인 경우는 생부도 기재된다. 외조와 처부의 본관 등 인적 사항이 기재된다.
현재 17세기 이후의 잡과방목은 거의 모두 전해지고 있어서 연대기, 법전 등의 자료에서는 잘 드러나고 있지 않은 잡과 운영의 실태와 합격자의 신분과 배경을 파악할 수 있다.
시험으로 능력 있는 인재를 선발한다는 취지의 과거는 당연히 공정하게 운영되어야만 하였다. 그러지 못할 경우, 과거의 본래 취지 자체를 훼손시키는 일이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과거의 부정을 엄격히 단속하고자 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시험장 안에 책을 끼고 들어오는 협책(挾冊), 남에게 글을 빌려서 시험을 치는 차술(借述), 대리시험을 치는 대술(代述)은 두 차례 응시 자격을 정지시킬 뿐 아니라 장(杖) 일백에 도(徒) 삼 년의 형을 주도록 하였다. 과거 시험장의 하급 서리 및 노복으로 문제를 누설하는 경우 장 일백형으로 처벌하였다.
양란 이후에는 국가운영 전반에 걸쳐서 기강이 해이해졌다. 그와 더불어 과거 운영에서 여러 가지 폐단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시험장에는 잡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며, 함부로 들어오면 붙잡아 수군(水軍)으로 삼았다. 하지만 후기로 가면서 그런 단속은 느슨해지게 되었다. 권세 있는 양반 자제들은 서책을 가지고 들어가거나 심지어 시험지를 베끼거나 하는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는 수종(隨從)의 폐단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이 몰리게 되었고 심한 경우 밟혀 죽거나 다치는 사고가 잇달았다.
협책, 차술, 대술 같은 금지 조항도 해이해져서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권세 있는 양반자제들은 글을 잘하는 사람을 동원하여 시험장에 데려가서 쓰게 하거나, 시험장 바깥에서 시험지를 써서 전달하기도 하였다. 응시자 숫자가 늘어나다 보니 시관들이 읽고 등급을 매기는 일 역시 번다해졌다. 시간이 촉박하여 몇 줄만 읽거나 일찍 제출한 시험지만 과차(科次)하는 폐단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차술한 시험지를 빨리 제출하거나 시험지를 앞부분에 넣으려 하기도 하였다.
응시자 수가 많다 보니 시험지를 먼저 제출하려는 폐단도 발생하였다. 글씨를 빨리 쓰기 위해 사수(寫手)를 동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과거 응시 인원의 증가는 시험관들의 채점 시간의 부족 등 문제점을 안겨주었다. 수많은 답안을 짧은 시간에 채점하다 보니 검토가 허술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일찍 제출한 답안지를 합격시키는 병폐가 발생된 것이다. 문장이 긴 경우에는 미리 답안을 작성해 오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전체 문장을 구성하고 몇 글자를 비워두었다가 시제에 따라 적당한 글자를 집어넣은 것이다.
1767년(영조 43)에는 책을 끼고 들어오거나 장막을 가지고 수종들이 따라 들어오는 폐단이 계속되자 시험장에 우구(雨具) 외에는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제도화하였다. 봉미관 및 서리를 매수하여 감합(勘合)할 때 자기 시험지를 합격 답안지에 붙여서 합격을 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을 절과(竊科) 혹은 적과(賊科)라 불렀다.
과거 시행과 관련해서 나타난 병폐는 숙종 대에는 1699년과 1712년에 각각 두 차례의 큰 과옥(科獄)〔 기묘과옥과 임진과옥〕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시험 부정과 관련된 형벌을 강화하거나, 합격이 정당한지 검증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영조 대에는 1749년(영조 25) 면시법(面試法)을 시행하여 부정을 막으려고 하였다. 면시법은 복시 합격 발표 다음 날 각자 지은 글을 다시 짓도록 하였으며, 제대로 짓지 못하면 대술(代述), 차작(借作)으로 간주하여 합격을 취소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영원히 해도(海島)에서 군대 생활을 하도록 하는 형벌〔충군율(充軍律)〕을 내리게 하였다. 하지만 면시법은 영조 대에 잠시 시행되었을 뿐 계속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과거는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여러 가지 폐단과 모순을 드러내게 되었다. 당파간의 경쟁과 세도정치는 공적인 기구와 제도를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인적 자원을 충원하는 과거와 과거 합격 이후 이어지는 관로 진출이 주요한 통로가 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능력은 있지만 권력에서 배제되고 소외당한 지식인들이 나오게 되었다. 그들은 과거에서 드러나는 현상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한편 다양한 개혁안을 구상하게 되었다. 흔히 실학자로 불리는 남인 계열의 학자들이 그러하였다. 유형원(柳馨遠)과 정약용(丁若鏞)의 개혁론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유형원은 과거제를 폐지하고 그 대신 공거제(貢擧制)를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공거제는 학교와 과거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일원화하자는 것이었다. 각 학교에서 우수한 자들을 천거해서 더 높은 학교로 올라가게 하고, 최고 학부 태학(太學)에서 천거하는 자를 관리로 등용하자는 것이다. 다양한 과거 시험을 없애는 반면 천거, 즉 추천을 중시한다는 점에 중점을 두었다. 천거를 통해서 재능은 물론 덕행까지 볼 수 있다는 점, 몇몇 벌열(閥閱)이 독점하다시피 하는 관직을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개방한다는 진취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과거제의 현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였다.
유형원의 개혁안은 학교와 천거가 연계되어 있는 만큼, 누구나 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점, 추천자가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공정하지 못한 천거를 할 수도 있다는 문제도 없지 않았다. 그래선지 유형원은 적절치 못한 자를 천거한 자는 엄벌에 처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정약용은 경과 명목으로 자주 실시되던 부정기 과거를 완전히 혁파하고 식년시 하나만 보강해서 남겨두자고 하였다. 거기서 비롯되는 인재 선발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음관(蔭官)의 천용제(薦用制)를 병용하자고 주장하였다. 과거와 공거를 함께 시행해서 서로 보완, 아니 더 정확하게는 과거제의 미비점을 보완하자는 것이었다. 그 같은 취지하에 정약용은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정약용 개혁안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식년시와 함께 음관의 천용제를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선발 첫 단계에 공거제를 두었으며, 마지막 단계에 조고(朝考)를 두어 능력 있는 인재를 엄밀하게 선발하고자 하였다. 또한 선발된 인원과 관직 사이의 불균형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 당시 빈번하게 치러지는 과거로 합격자는 많이 배출되었지만, 실제로 나아갈 수 있는 관직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외에도 많은 지식인들은 과거제를 비판하면서 독자적인 개혁안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세부적인 부문에서는 개인에 따라 달랐지만 대체로 형식화된 과거제 외에 직접적인 추천에 의한 천거제를 적절하게 수용하거나 그들 두 방식을 병용하는 과천병용론(科薦倂用論) 주장을 펼쳤다.
조선시대 과거는 교육, 문화 등 사회전반에 걸쳐서 끼친 영향이 지대하였다. 시험을 통해서 신분 상승과 더불어 관로(官路)에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문은 정치와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
과거에서 선발하는 인원은 법제적으로 지역별 할당제가 있었다. 식년문과 초시의 도별 거주자를 대상으로 실시되는 향시에서 도별로 150인을 정원으로 정하였다. 무과에서도 각 도의 병마절도사가 주관하는 향시에 도별로 120인을 선발하였다. 복시, 전시 시험에서 지역별 안배에 관한 제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합격자 배출에서 지역 간의 격차가 심하였다. 문과와 무과 비정기 시험인 각종 별시는 단시제 혹은 초시와 전시 두 단계로 치러졌으며, 서울에서 보는 것이 상례였다.
점차로 서울 집중도가 높아졌으며 지역 간 격차도 커지게 되었다. 현존하는 방목을 토대로 각 시험 합격자들의 거주지별 분포를 정리해 보면 문과, 무과, 생원진사시, 잡과 합격자 모두 서울 거주자의 비율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합격 이후에도 관직 등용에서 차별을 받는 지역이 있었다.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서북 지방은 관직 등용에서 서울과 삼남 지방에 비해서 차별을 받았다.
건국 초기에 과거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식년시가 주축을 이루었으며, 그 외에 수시로 실시하는 증광시 · 별시 · 정시 · 알성시 등이 있었다. 하지만 후기로 가면서 다양한 이름의 시험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마다 과거를 설행하기도 하였다. 빈번한 과거 설행은 관직을 갈구하는 양반들의 욕구와 바람을 충족시켜 주어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기능도 없지 않았다.
빈번한 과거 설행에 따른 합격자의 증가는 또 다른 문제를 낳게 되었다. 관직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급제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관직 임용 자체가 어려워졌으며, 중앙 정계에서 당쟁이 격화되고 세도정치가 행해지자 이 현상이 한층 더 심해지게 되었다. 실권을 장악한 당파에서는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자신들과 가까운 당인(黨人)을 등용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사풍(士風) 역시 쇠미해지고, 심한 경우 타락해가기도 하였다. 지식인, 사상가들이 과거 개혁안을 구상하였던 것은 그런 현실에 대한 비판이자 대안 모색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과거제는 조선시대의 학교제와 학문 경향에 대해서도 크고 깊은 영향을 미쳤다. 과거에는 유학(幼學)도 응시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교육 제도로서의 관학이 쇠퇴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건국 초기 관시(館試) 응시 자격 부여와 특전 제공 등으로 원활하였던 성균관 입학과 교육이 후대로 갈수록 정원을 다 채우지 못하게 된 것이 뒷받침해 준다.
과거는 시험 답안지로 합격을 결정하는 만큼, 합격한 응시자의 인격이나 덕행까지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등과 자체가 목적인 응시자도 적지 않았다. 그 같은 과유(科儒)에 대해서, 이익은 사회를 좀먹는 여섯 가지 좀 중의 하나라 하였다.
과거 시험은 학문의 경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경학(經學)과 사장(詞章)을 같이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주자학 내지 성리학 경향이 농후하였다. 시험과목 자체가 그러하였으며, 특히 참고가 되는 주석이 중요하였다. 이로써 주자의 주석이 권위를 누리게 되었는데, 과거 합격이 일차적인 과제였기 때문이다.
과거를 준비하던 유생들이 공부한 시 · 부 · 표 등의 사장에도 일정한 형식이 있었다. 따라서 점차 모범 답안식의 문장을 짓게 되었는데, 과문(科文)에서의 형식의 존중은 자유로운 의사표시를 저해함으로써 문예 발전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쳤다.
과거는 거시적으로 한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종의 출세의 사다리로 기능하였으며, 학문이 뛰어난 자는 정치에 나아갈 수 있었다. 문인 지배와 문치주의를 떠받쳐주는 기둥이기도 하였다. 무과가 있기는 하였지만, 역시 중심은 문과였다. 독서인(讀書人)이 되지 않으면 사회의 지배층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1876년 개항 이후 새로운 변화의 물길이 일기 시작하였다. 문호 개방과 더불어 새로운 문물과 지식이 물밀듯이 들어오게 되었다. 변화 속에서 모든 것이 다 달라져야 하였으며, 관리등용 시험으로서의 과거 역시 새로운 시대에 걸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개화를 주장하는 개화파 관료들에게 과거 시험으로 관리를 선발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여겨졌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오랜 기간 동안 인재 충원 통로로 기능하던 과거를 폐지하게 되었다. 새 시대에 알맞은 지식과 교양을 가진 인재와 그들을 선발하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1894년 7월 군국기무처에서는 「 선거조례(選擧條例)」와 「전고국조례(銓考局條例)」를 마련해서 시행하게 되었다. 선거란 인재 선발을 의미하며, 전고국은 의정부 산하에서 관리의 임용과 승진을 담당하던 관서를 말한다. 새로운 관리 등용제도가 마련된 것이다.
「선거조례」는 전체 4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각 부(府), 아문의 대신(大臣)은 관하의 주임관(奏任官), 판임관(判任官) 등을 선임한다.
② 조정과 민간의 관리와 선비, 서울과 시골의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을 따질 것 없이 품행이 단정하고 재주와 기술이 있고 겸하여 시무(時務)를 아는 사람을 진지하게 선발하고 그 사람의 직업, 성명, 나이, 본적, 거주지를 자세히 기록하여 추천서를 발급하고 전고국에 보내 재능에 따라 시험 보일 것을 청한다.
③ 예비 선발된 사람의 추천서에는 그의 재능이 어느 국, 어느 과에 알맞은가를 밝히고, 전고국을 거쳐 보통시험에 합격하기를 기다려 다시 특별시험을 본 다음 국(局)을 나누고 각 부, 아문에서 불러 임용한다.
④ 학교를 널리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기 전에는 의정부에서 오도(五都)와 팔도에 공문으로 신칙하여 향공법에 의하여 추천하여 올린다. 경기에서 10인,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15인, 경상도에서 20인, 평안도에서 13인, 강원도와 황해도에서 10인, 함경의 남도와 북도에서 각각 5인, 오도와 제주에서 각각 1인을 서울로 보내 각각 그 재능에 따라 소원대로 어느 아문에 응시하게 하고 각 아문의 대신이 선발하도록 한다.
주목되는 것은 새로운 선거 방식은 근대식 교육과 짝을 이루는 것이므로, 일종의 경과조치로 향공법에 의거하여 추천하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전고국조례」에 의하면, 전고국에서는 각 부, 아문에서 보낸 선발 추천된 사람들을 시험 보는 일을 맡는다. 그 시험에는 두 가지 방법, 즉 보통시험과 특별시험이 있다. 보통시험은 국문(國文), 한문(漢文), 사자(寫字), 산술(算術), 국내 정사, 외국사정, 국내사정, 외무관계를 시험 보게 하였으며, 특별시험은 당사자가 휴대한 추천서 안에 언급되고 있는 재능에 대해 시험 보게 하였다.
보통시험과 특별시험은 한 번의 시험으로 끝났다. 합격자에게는 그 증명서를 만들어 주어 당해 대신(大臣)이 살펴보도록 하였다.
보통시험에서 치르는 국문, 한문, 사자, 산술, 국내 정사, 외국사정, 국내사정, 외무관계 등을 종래 과거의 시험과목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외국사정과 외무관계〔내정외사(內情外事)〕는 상징적이다. 유교 지식과 교양을 근간으로 하던 전통시대의 과거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자면, 시험과목과 내역이 달라진다 하더라도 시험을 통해서 능력 있는 관리를 선발한다는 점에서는 과거제의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