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지는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로서 성균관·승문원·훈련원에 분관(分管)되어 임용 대기 중인 견습 관원이다. 을과(乙科)·병과(丙科) 등수의 급제자들 중 급제 전 관직이 없었던 이들이 권지로 임명된 후 해당 부서에서의 권지 근무 기간에 따라 실직(實職)에 임용되었다.
권지(權知)는 임시로 어떤 일을 관장함을 뜻하는 것으로, 조선 초기에는 과거의 급제 여부와 상관없이 여러 관서에서 두고 있던 비정규직이었다. 뒤에는 과거 급제자를 우선 임명하게 되었고, 과거 급제자가 아닌 남행(南行) 등을 권지로 임명하는 일은 점차 없어졌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문과 급제자 33인 중 갑과 3인 및 6품 이상의 관직에 있던 이들만이 실직에 바로 임용되었고, 그 이하는 성균관 · 승문원 · 교서관의 삼관(三館)에 권지로 분관되었다. 무과 급제자는 문과의 예에 따라 관직을 제수하며 별시위와 훈련원 권지로 임명되도록 했던 만큼, 권지 분관은 훈련원에만 이뤄졌다. 이들의 직명은 권지승문원부정자 · 권지성균관학유 · 권지훈련원봉사 혹은 훈련원권지 등으로 호칭되었다.
문과 급제자의 권지 임명은 삼관의 업무 성격 및 급제자들의 재능과 연령에 따라 이루어졌다. 사대문서를 다루는 승문원은 연소(年少) · 선서(善書) · 총민(聰敏)이 분관의 요건이었다. 경적의 인쇄와 인장의 전각을 관장하는 교서관도 연소와 총민이 분관의 기준이었다. 성균관은 유생의 교육을 담당하므로 노숙하고 덕망 있는 자를 분관하도록 했다. 삼관 분관은 승문원이 먼저 권지로 임명할 자를 선택하고, 성균관과 교서관은 이조에서 일괄 분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만큼, 승문원의 위상이 성균관과 교서관보다 높았다. 또한 성균관과 교서관 권지와 달리 승문원의 권지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외관(外官)에 나아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 명문화되었고, 권지 이후 승문원뿐만 아니라 사관(四館)에 포함되는 예문관이나 성종 대에 예문관에서 분리된 홍문관의 관직을 역임하는 경우가 교서관이나 성균관보다 많았다.
권지가 실직(實職)으로 임용되는 거관(去官)은 매년의 도목정사(都目政事)에서 근무 기간에 따라 이뤄졌다. 그러나 삼관이나 훈련원의 거관 인원이 한정되어 있어 후대로 갈수록 권지의 적체 인원이 누적되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기적인 도목정사 외에 별천(別遷)을 시행하기도 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급제자들이 적체되어 권지로 임명된 뒤 보통 6, 7년을 기다려야 9품 실직에 임용되었다. 승문원 · 교서관의 경우 4년, 성균관의 경우 8년이 경과한 뒤에 6품직인 참상관으로 승진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관직 수에 비해 너무 많은 급제자들이 쏟아져 나왔으므로, 평생을 권지로 지내는 사람들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