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목 또는 도목정이라고 줄여서 일컫기도 하였으며, 1년에 한 번 행하는 것은 단도목(單都目), 두번 행하는 것을 양도목(兩都目), 네번 행하는 것을 4도목(四都目)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문·무 양반은 원칙적으로 6월과 12월에 두 번 행하고, 토관(土官)·녹사(錄事)·서리(書吏)도 양도목이었다. 잡직(雜職)은 4도목으로서 1월·4월·7월·10월에 행하였다. 그러나 군사의 도목정사는 복잡해 양도목·4도목 외 6도목·3도목·1도목도 있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선전관(宣傳官)·겸사복(兼司僕)·내금위(內禁衛)·공신적장(功臣嫡長)·친군위(親軍衛)·별시위(別侍衛)·갑사(甲士)·습독관(習讀官)·궁인(弓人)·시인(矢人)·제원(諸員)·제주자제(濟州子弟)·반당(伴倘)·나장(羅將)·조례(皁隷)·보충대(補充隊)는 양도목으로 1월·7월에 행하였다.
또한 족친위(族親衛)·충의위(忠義衛)·의원(醫員)·승문원제원(承文院諸員)·장용위(壯勇衛)·동몽훈도(童蒙訓導)·파진군(破陣軍)은 4도목으로 1월·4월·7월·10월에, 정병(正兵)은 6도목으로 2월·4월·6월·8월·10월·12월에 행하였다.
이밖에 충찬위(忠贊衛)·태평소(太平簫)·취라적(吹螺赤)·파적위(破敵衛)·대졸(隊卒)·팽배(彭排)는 3도목으로 4월·7월·10월에, 관령(管領)·수군(水軍)·조졸(漕卒)은 1도목으로 1월에 행하였다. ≪속대전≫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있어 선전관·공신적장·습독관이 양도목에서 4도목으로, 충찬위는 도목수는 같으나 실시 기간이 4월·7월·10월에서 1월·4월·7월로 바뀌었다.
도목정사는 삼국시대는 자료가 없어서 알 수 없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그 윤곽이 밝혀지는데, 이는 무신집권시대의 기록을 통해서이다. 즉 희종 때 최충헌(崔忠獻)이 권세를 오로지 하여 반정(頒政)이 무상(無常)하였다. 그러나 예전부터 내려오는 관행에 따르면 반정은 6월에 하는 것을 권무정(權務政), 12월에 하는 것을 대정(大政)이라 하였다.
이 때가 되면 이부·병부의 판사(判事)가 동료와 같이 본부에 모여 공 있는 자를 올리고 죄 있는 자를 쫓아내되 모두 왕명을 받고, 이 시기가 지나면 비록 빈 자리가 있어도 보충하지 않았다.
그런데 권무정의 권무는 임시의 뜻으로서 문자상으로는 임시 보궐의 필요에서 나온 인사 행정인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고 6월에만 행하던 정기적인 것이었다. 왜 권무라는 말을 썼는지 알 수 없으나, 12월에 행하던 정사(政事)를 대정이라 한 것을 보면, 6월에 행하던 정사는 규모가 작아서 정기에 행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뜻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권무정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실제로 조선시대도 6월에 행하던 도목정을 소정(小政), 12월에 행하던 것을 대정이라 하여 6월의 것은 규모가 작았다. 고려시대 말기에는 때 없이 정사를 행하던 전동정(轉動政)이 기록에 보인다. 전동정은 산정(散政)이라고도 한다.
고려 후기에 오면 인사 행정이 점차 복잡해져서 6월의 권무정은 그야말로 정기적인 소규모의 정사로 바뀌었다. 대신 때 없이 행하던 전동정이 따로 생겨나지 않았나 생각되며, 이것은 조선시대 그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조선시대는 정치 기구의 확대에 따라 인사 행정의 규모가 커지고 더 복잡해져서 문·무 양반은 양도목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잡직은 4도목이 되고, 병사는 1도목에서 6도목까지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