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사서를 정리한 결과에 의하면, 국통(國統)을 최초로 둔 나라는 신라였다. 신라는 불교계의 관할을 위한 제도로 국통을 책봉하기 시작하였으며, 진흥왕 때 고구려의 승려인 혜량(惠亮)을 맞이하여 최초의 국통으로 삼았다. 선덕왕 때에는 자장(慈藏)이 국통이 되었다. 통일 뒤 제도가 완비되었던 신문왕 때에는 백제의 웅천주(熊川州) 출신 경흥(憬興)을 국로(國老)로 대우하였다. 효소왕 때에는 혜통(惠通)이 국사로 책봉됨으로써, 최고의 승관(僧官)인 국통과 이념적인 국사가 분리되어 존립하였다. 그 뒤 국사의 책봉은 자주 나타나는데, 이 제도는 조선 초기까지 이어진다.
고려의 태조는 국사와 함께 왕사(王師)를 두어 자신의 불교에 대한 신심을 나타내었다. 이 왕사 제도는 조선 초기까지 계속되었으나, 신라에서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자주 보이던 국통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 국통은 국사와는 달리 군통(郡統)이나 주통(州統) 등을 거느리는 승관의 우두머리로 승정(僧政)을 관장하는 것이므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국사나 왕사와는 구별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승계가 발달하여 이를 기준으로 주지를 임명하거나 법계의 승급이 일반 관료와 같은 과정을 거쳤으므로, 승관은 축소되고 승록사(僧錄司)의 기능도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국통은 법계가 발달하기 시작한 광종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몽고의 압제 시기에는 국사와 왕사의 명칭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즉, 국사를 국존(國尊)이라 불렀으며, 충렬왕 말기와 충선왕 때에는 국통을 두었는데, 이때 국통은 신라시대의 국통과 국사의 소임을 함께 하고 있었다.
왕사와 국사는 생존 때 책봉된 경우와 사후에 추봉하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왕사가 죽을 경우 국사로 추봉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왕사는 국사와 함께 고려 태조 때부터 있어 왔지만, 확고한 제도로 정비되어 그 전형을 보인 때는 광종 이후였다. 그리고 호칭에서 시호 다음에 국사를 붙여 비문의 제액(題額)으로 쓴 최초의 예는 1025년(현종 16)에 세워진 원종국사(圓宗國師) 지종(智宗)의 비문이다.
이보다 앞서 977년(경종 2)에 건립된 법인국사(法印國師)의 비문에는 ‘고국사제증시법인삼중대사(故國師制贈諡法印三重大師)’라 하여, 광종 이후에 법계가 갖추어짐으로써 당시의 최고 법계인 삼중대사를 붙여서 표현한 과도기적인 형식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신라 말과 고려 초 고승의 경우에는 민심을 포섭하기 위한 정책으로 고승을 초치하여, 국사 · 왕사에 가까운 극진한 예우를 베푼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을 모두 국사 · 왕사로 책봉하여 같은 시기에 2인 이상의 국사 · 왕사가 존재하였던 예는 볼 수 없으므로 이들을 모두 국사 또는 왕사로 포함시키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다.
신라시대에는 복속된 지역의 고승을 폭넓게 국사로 책봉함으로써, 불교 신앙이 보편화된 민심을 결합시키고 있었다. 고려 태조에 이르러서는 이와 같은 경향은 더욱 두드러졌으며, 그 뒤 고려는 유학을 닦은 지식인을 왕사로 맞이하지 않고, 고승을 국사나 왕사로 삼아 민심을 수습해 갔다. 즉, 불교가 많은 사람의 신앙으로 정착되어 있었으므로 민중을 정치에 직접 참가시키지는 못하는 대신, 그들을 도덕으로 교화할 수 있는 정신적 지도자인 고승을 국사로 책봉함으로써, 고려의 정치 이념을 구현하는 데 큰 구실을 하게 하였다.
고려시대 국사와 왕사의 책봉 의식은 금석문에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신라시대의 기록은 극히 드물다. 다만, 경문왕 때의 무염(無染)에게 왕의 친서를 가진 사신을 보내 국사가 되어 주기를 청하였고, 그를 궁궐로 맞이한 다음 왕족이 모인 가운데 왕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예배하였음을 볼 수 있다. 당시의 선정 방법이 어떠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왕족이 모인 가운데 책봉 의례를 올린 점으로 보아, 왕실의 권한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광종은 긍양(兢讓)을 왕사로 책봉할 때, 여러 사람의 찬성을 들은 다음에 비로소 정한 예가 있다.
국사 · 왕사를 선정하기 위해서 왕은 상부(相府)에 자문을 구하거나, 왕이 직접 고승을 정하여 추천한 경우도 있었으며, 무신 집권 때에는 실권자가 선정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책봉될 국사 · 왕사가 선정되면, 5품 이상의 관직을 제수할 때의 경우와 같이 낭사(郎舍)의 서경(署經)을 거쳐야 하였다. 이와 같이 광종 이후 성종 때까지는 책봉에서 서경을 거치는 제도가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책봉될 고승이 선정되면 먼저 칙서를 가진 대신을 고승이 있는 사찰로 파견하여 책봉을 수락할 것을 청하는데, 이것을 서신지례(書紳之禮)라 하였다. 고승은 칙서가 도착하면 세 번 사양을 하였다. 이때 왕의 간곡한 뜻을 찬앙지정(鑽仰之情)이라 하였으며, 세 번 사양하는 예를 삼반지례(三反之禮)라 하였다. 여러 차례 사양하다가 마지못하는 양 사양표(謝讓表)를 그치게 되며, 왕은 곧 국사의 의장(儀仗)에 해당하는 물품을 보내 개경으로 모시도록 하였다.
고승은 하사받은 가사 및 장신구를 갖추고 하산하는데, 이것을 하산례(下山禮)라 한다. 하산례 때는 통과하는 주군(州郡)에서 성인을 맞이하는 의식을 구경하기 위한 인파로 길이 메었다. 고승은 일단 개경에 있는 대찰에 머무르게 되는데, 왕은 이때 고승에게 제자의 예를 행하였다. 신라시대에는 왕족과 왕이 모인 자리를 마련하였으나, 고려시대에는 문무 양반과 승관이 모인 자리에서 행해졌다.
왕은 태조의 영당(影堂)이 있는 봉은사(奉恩寺)에 행차하여 면복을 갖추고 고승을 상좌에 앉힌 뒤 그 아래에서 절하였다. 이때 고승이 상좌에 앉기를 사양하는 것을 피석지의(避席之儀)라 한다. 왕은 또 책봉의 조서를 내리는데 이를 관고(官誥)라 하였으며, 이러한 관고는 『동문선』과 『동국이상국집』에서 볼 수 있고, 금석문에도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의식 절차를 맡아서 주관하던 임시 관청으로 봉숭도감(封崇都監)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의식을 통틀어 국사지례(國師之禮)라 하였으며, 왕의 국사에 대한 입장을 밝혀 ‘제자지례(弟子之禮)’라고 간단히 표시되는 경향은 중기 이후 더욱 많아진다. 국사와 왕사는 대체로 최고의 법계를 가진 고승 가운데에서 책봉되었다. 법계를 가진 고승은 극소수의 왕사 이외에 모두 승과를 거쳤다.
무신 집권 이후에 일반 과거 급제자인 혜심(惠諶) 또는 충지(冲止) 등이 승과를 거치지 않고 국사로 책봉되었지만, 이들도 법계를 가지고 있었다. 출생 신분은 대체로 호장(戶長) 이상의 자손으로 과거에서 제술업(製述業)에 급제한 신분층과 일치하였으며, 승과에 합격한 신분층과도 같았다. 또한, 대덕(大德)에게 별사전(別賜田)이 주어졌던 점으로 미루어, 왕사나 국사에게는 충분한 경제적 대우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청정한 생활을 통한 정신적 존숭을 받았던 만큼, 경제적인 배경이나 사회적인 명성을 이용한 영향력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왕사나 국사가 죽으면 왕은 크게 애도하면서, 대신을 보내어 송사(送死)에 대한 모든 처리를 맡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비를 세워 그 덕을 추모하고, 3일간은 모든 공무를 중단하고 조회를 폐함으로써 온 나라가 조의를 표하였다.
승정과 승과가 문란했던 충렬왕 이후의 후기와 원종 이전의 전기에는 그 기능이 현저하게 달랐다. 전기의 실례를 살펴보면, 906년(효공왕 10)에 국사였던 행적(行寂)은 효공왕에게 도를 높이는 데는 희헌(羲軒)의 정치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요순(堯舜)의 교화로 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전설을 이상화한 도덕 정치를 들어 민심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왕에게 이상적인 도덕 정치를 권고하였을 뿐, 직접적인 교화의 방법이나 구체적인 정치 개혁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그들만이 특별히 주관한 종교 의식도 찾아볼 수 없으며, 책봉 의식 외에는 일반 고승과 구분되는 아무런 기능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국사 · 왕사가 기우 의식(祈雨儀式)을 주관하거나 대선(大選)의 시관(試官)이 된 때도 있었고, 궐내에서 열린 강회(講會)에서 강주(講主)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행사마저도 일반 고승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국사나 왕사의 전담 행사는 아니었다. 대체로 고려 전기에는 국사의 실질적인 기능보다는 이들에게 극진한 예우로 책봉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모든 민중을 신자로 포용한 당시의 사회에서 민심을 받들어 왕정을 편다는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정치 사상을 불교와 결합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교권(敎圈)과 통치권과의 갈등을 피하고, 타협과 조화로써 불교의 교화를 통치에 이용할 수 있는 역량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후기인 충렬왕 이후에는 승과도 별로 실시되지 않았고, 왕의 측근에서 뇌물을 써서 법계를 얻는 등 전기의 질서가 크게 무너짐에 따라, 승정이 낭사의 서경을 거치지 않고 이루어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승정의 변화는 충숙왕 때의 자정국존(慈靜國尊) 미수(彌授)에 이르러서 뚜렷해진다. 충숙왕 때를 전후하여 국사 · 왕사의 대우도 크게 달라졌다.
충숙왕은 즉위년에 국통으로 책봉한 정오(丁午)를 위해서 그의 고향인 순창현에 감무(監務) 대신 지군사(知郡事)를 두어 군으로 승격시켰는데, 이러한 사례는 견명(見明) · 청공(淸恭) · 보우(普愚) · 천희(千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와 같은 우대는 전기에는 볼 수 없었던 것으로, 몽고와 결탁한 왕실의 영향이 컸던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초기까지 계속되어 조구(祖丘)의 경우에는 그의 출생지인 담양현(潭陽縣)을, 그리고 자초(自超)의 경우는 삼가현(三嘉縣)을 각각 군으로 승격시켰다. 또한, 국사의 부모를 추봉하는 사례도 그들의 고향을 승격시키는 때와 같이하여 나타난다.
고려 후기에는 왕사 · 국사로 하여금 독립된 관부(官府)를 형성하여 승정을 전담하게 되자, 유학자로서 과거를 통하여 진출한 일반 관료들의 권한은 점점 축소되었다. 이때 더욱 큰 충격을 준 계기는 신돈(辛旽)의 등장이다.
신돈은 1367년(공민왕 16) 자기의 지지를 받은 화엄종의 천희와 선현(禪顯)을 각각 국사와 왕사로 봉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아직도 보우가 왕사로 있었다는 점이다. 왕사나 국사가 죽기 전에 축출되고 다른 고승을 책봉한 사실은 전에 없었던 것으로, 제도상의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불화는 불교계를 스스로 약화시키고 분열시켰으며, 이와 함께 승정은 물론, 일반 국정에까지 참가한 신돈은 조신들과도 충돌하였다. 이는 성리학을 닦은 유학자들의 강한 반발과 상소의 대상이 되었고, 마침내 1390년(공양왕 2)에 그들의 뜻대로 승려의 봉군(封君)을 폐지시켰다.
이와 같이 불교 세력의 약화는 왕사 · 국사 제도의 폐지와 때를 같이하였다. 조선 태조는 성리학적 사상 기반이 약했던 무인이었으며, 그를 옹립시킨 이방원(李芳遠)과 신진 사류와는 달리 조구를 국사로, 자초를 왕사로 삼았으며, 이들은 태조를 중심으로 한 호불(護佛)의 최종 보루가 되었다. 그 뒤 대신 가운데서 연령이 높은 사람을 사부로 삼는 제도가 확립됨에 따라, 자초와 태조가 죽은 뒤의 불교계는 큰 사태(沙汰)를 이루어 불교와 관련된 경제적 기반까지 재편성하는 사회의 변혁이 시작되었다.
역대의 국사 · 왕사의 배출을 통하여 불교사의 시대 구분을 시도해 볼 수 있다. 대체로 신라 통일기 이후 헌안왕 이전에는 교종의 여러 학파에서 국사가 배출되었고, 헌안왕 이후 958년(광종 8)까지는 무염을 효시로 모두 선종 출신의 국사 · 왕사가 배출되어 선종 극성기를 이루었다.
균여(均如)의 활동으로 화엄학의 세력이 회복된 958년 이후에는 화엄종에서 국사와 왕사가 주로 배출되었고, 현종 이후 예종 때까지는 유가업(瑜伽業)도 화엄종과 함께 교종의 중심을 이루어 국사 · 왕사를 배출하게 되었다. 이때, 선종은 법안종과 교류의 영향을 받아 그 성격의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극히 적은 국사와 왕사를 배출하였다.
인종 이후 강종까지는 선종과 천태종에서 비슷한 배출을 보이면서 선종의 세력을 만회하였다. 그 뒤 사굴산(闍崛山)의 수선사(修禪社)를 중심으로 조계종으로 선종이 뭉치고, 뒤이어 백련사(白蓮社)를 중심으로 천태종이 확장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이들 종파의 출신들이 책봉되었다.
충선왕 이후에는 세력 있는 종파에서 배출된 것과는 달리, 몽고와 결탁한 왕실에 의해 좌우됨에 따라 종파 간의 이해를 둘러싼 충돌이 일어났다. 즉, 전기에 왕사와 국사를 배출하였던 화엄종과 유가종, 중기의 천태종과 조계종 등은 서로 국사와 왕사의 배출에 힘을 기울였는데, 이 시기를 종파 난립기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이 틈에 신진 사류들은 불교계의 부패를 비판하기 시작하였으며, 점점 불교 교리를 비판하는 것으로 확대되면서 국사 · 왕사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성리학을 닦은 태종과 정치를 담당한 성리학자들에 의해 왕사 및 국사 제도는 완전히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