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종은 화엄경의 사상을 기반으로 형성된 불교 종파이다. 신라 의상이 당 화엄종의 지엄 문하에 유학하여 그 교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였고, 부석사를 건립하고 화엄종을 열었다. 신라 말에 선종의 성행으로 타격을 받은 화엄종은 후삼국 통합 후에 다시 부각되었고 균여, 의천 등에 의해 화엄교학이 발전하였다. 고려 후기 화엄종의 동향은 체원의 저술, 사경과 불화를 통해 실천적인 경향이 강조되었다. 조선시대에 독자적인 교단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사상적인 영향이 적지 않았고, 조선 후기 화엄 강경이 유행하고 다양한 주석서가 저술되었다.
화엄종은 중국 불교에서 『화엄경(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의 약칭)』을 불전 가운데 최고의 경전으로 강조하고, 화엄경의 사상을 근본적인 기반으로 교학을 형성한 불교 종파이다. 화엄경은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경전의 하나이며, 60권본, 80권본, 40권본이 각각 한역(漢譯)되었다. 40권본은 경의 마지막인 입법계품(入法界品)만을 늘려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북위에서 주로 지론종(地論宗) 승려들이 화엄경에 대한 주석과 강의를 하였고, 오대산을 화엄경에서 중시하는 문수보살의 성지로 신앙하는 흐름이 확산되었다. 지엄(智儼)이 화엄교학의 기초를 제시하고, 이어 법장(法藏)이 화엄교학의 사상 체계를 형성하면서 화엄종이 성립되었고, 이후 이통현(李通玄), 징관(澄觀)과 종밀(宗密) 등에 의해 화엄교학이 심화되었다.
신라에서는 자장(慈藏)이 화엄경을 수용하였으며, 오대산 문수 신앙을 전하였다. 이후 의상(義相)이 지엄의 문하에 유학하여 화엄교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다. 의상은 670년에 신라에 돌아왔고 국가의 도움을 받아 영주에 부석사(浮石寺)를 건립하고 화엄종을 열었다. 의상은 실천행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화엄 관련 저술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의 화엄사상은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에 드러나며, 다라니 법을 강조하고, 수십전유(數十錢喩), 육상설(六相說) 등에 독자적인 면이 드러난다. 의상의 제자는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 이른바 십대 제자가 활약하였다. 가노(家奴) 출신인 지통은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 『추동기(錐洞記)』를 지었고, 도신의 『도신장(道身章)』과 함께 일부 남아 있다. 의상계는 부석사계, 표훈계, 해인사계 등 여러 갈래로 나뉘었으며, 신라 화엄종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한편 이들과 다른 비주류로 원효계와 지리산계, 황룡사계를 비롯한 다양한 집단이 존재하였다. 화엄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연기(緣起)는 화엄경 사경을 주도하였고, 『화엄경요결(華嚴經要決)』을 비롯한 저술을 남겼다. 황룡사계에는 법해, 표원(表員) 등이 활동하였다. 표원은 『화엄경문의요결문답(華嚴經文義要決問答)』을 편찬하였는데, 법장 사상을 토대로 하면서 원효와 중국 정영사 혜원 등의 학설을 인용하였다.
신라 하대에 화엄종은 해인사, 옥천사, 범어사, 화엄사 등 화엄십찰(華嚴十刹)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신라 하대에 선종이 확산되면서 화엄종은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고, 선종에 대한 대응을 다양하게 모색하였다. 화엄종은 화엄 조사들을 추모하는 사업과 화엄경 결사를 추진하여 선종에 대응하였다.
한편, 신라 말에 화엄종은 관혜(觀惠)를 중심으로 하는 남악(南岳)과 희랑(希朗)을 중심으로 한 북악(北岳)으로 분열하였고, 각각 후백제 견훤과 고려 태조의 후원을 받았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합하고 집권적 지배 체제를 강화하면서 화엄종이 다시 부각되었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병합한 직후에 개태사를 창건하고 화엄 법회를 개최하였다. 광종 때에 탄문(坦文)과 균여(均如) 등이 대표적인 화엄 학승으로 부상하였다. 균여는 북악파의 입장에서 신라 화엄학의 주요 논의들을 정리하여 체계화하였다. 이를 토대로 주요한 화엄학 문헌들을 해설하였고, 남악파와 북악파의 이론적 차이를 회통 하였다. 균여는 의상의 「일승법계도」, 지엄의 『수현기』, 『공목장』, 『오십요문답』, 『입법계품초』 등과 법장의 『탐현기』, 『교분기』, 『지귀장』, 『삼보장』 등 의상 문도들이 정리한 『십구장』을 강의하였는데 일부가 남아 있다. 균여는 화엄의 가르침과 그밖의 경전들의 가르침을 각기 별교일승(別敎一乘)과 동교(同敎)로 구별하고, 전자는 부처의 깨달음을 전한 것이라면 후자는 그것을 중생의 근기에 맞게 조절한 불완전한 가르침이라고 보았다. 그는 일승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법으로서 열 쌍의 보법(普法)과 십현문(十玄門)을 터득하게 하는 관법(觀法)의 실천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화엄 신앙의 실천을 권장하는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를 지었다.
균여 이후에 화엄종에서는 정종 때에 왕사, 문종 때에 국사로 책봉되었던 결응(決凝), 왕사로 책봉된 난원(爛圓) 등이 활약하였다. 난원의 문하에 출가한 의천(義天)은 처음 균여의 화엄학을 수학하였지만, 송의 승려들과 교류하면서 균여의 화엄학설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송의 화엄교학과 균여 사상의 차이라든지 의천의 사상적 지향과 관련된다. 균여는 의상, 지엄, 법장 등의 이론을 중시하면서 법계연기를 강조하였고, 화엄교학을 절대적인 가르침으로 보았다. 그에 반해 송의 화엄학은 징관, 종밀의 교학을 계승하여 현상 세계가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라는 입장이었고, 『대승기신론』, 『능엄경』, 『원각경』 등을 중시하고 화엄교학과 관법 수행을 함께 하는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주장하였다. 한편, 의천의 사후에 계응(戒膺)이 각화사(覺華寺)를 중건하였고, 계응의 문도인 석윤(釋胤)과 제자인 운미(雲美)는 예천 용수사(龍壽寺)와 상주 용암사(龍巖寺)를 창건하여 화엄학을 선양하였다. 석윤의 제자인 확심(廓心)은 의천이 지은 『원종문류』의 주요 문장을 해설한 『원종문류집해(圓宗文類集解)』를 지었다.
12세기 후반에 화엄종은 무신정권과 대립하면서 종세가 약화되었다. 또한 의천의 문도들이 밀려나고 균여 계열이 부활하였다. 균여의 저술과 함께 의상의 『일승법계도』에 대한 주석서인 『대기(大記)』, 『법기(法記)』, 『진기(眞記)』 등을 모아 편집한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이 간행되었다. 원 간섭기에 선종과 천태종에 비해 화엄종이 위축되었는데, 관음신앙을 중시하는 경향이 대두하였다. 고려 후기 화엄종의 동향은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구체적인 양상을 알기 어렵지만, 충숙왕 때에 반룡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체원(體元)의 저술이 남아 있다. 체원의 『화엄경관음지식품(華嚴經觀音知識品)』은 40권본 『화엄경』 가운데 선재동자가 관음을 찾아 보살도를 구하는 관음법문 부분만을 발췌하여 지송용으로 간행한 것이다. 또한 체원은 징관의 『화엄경소(華嚴經疏)』와 종밀(宗密)의 『화엄경소초』 등을 인용하여 해석한 『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華嚴經觀自在菩薩所說法門別行疏)』(이하 『별행소』)를 지었다. 이 저술에서 체원은 화엄계 관음을 『법화경』 보문품과 대비시켜 해석함으로써 두 경전의 관음신앙을 융합하였다.
한편 14세기 불화와 사경 자료를 통해 화엄종이 여전히 사상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존하는 130점 이상의 고려 불화 가운데 52점이 화엄사상과 관련된다. 특히 고려 후기에 조성된 아미타팔대보살도(阿彌陀八大菩薩圖)는 약 14점 정도이며 아미타불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으며 화엄 정토 신앙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약 100점이 남아 있는 고려 사경 가운데 36점이 『화엄경』이며, 특히 그 가운데 「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이 9점이다. 또한 신돈이 집권하면서 공민왕 초기에 태고 보우로 대표되는 선종 중심의 불교계 운용에서 탈피하여 화엄종의 천희(千熙)를 국사로 발탁하였던 것에서도 화엄종이 여전히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의 화엄종은 실천적 경향이 강화되는데, 그것은 진각 국사 천희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천희는 만년에 중국 강남 지방에 유학하여 임제종의 만봉시울(萬峯時蔚)을 찾아가 인가를 받았으며, 고려 말 선종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던 간화 선사로 유명한 몽산덕이(蒙山德異)가 주석하였던 휴휴암(休休菴)을 찾아갔다.
조선 시기에 국가의 불교 억압 정책과 함께 다양한 종파가 정리, 통폐합되면서 화엄종이 독자적인 종파로서의 면모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화엄사상은 여전히 불교계에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승과에 화엄경이 중시되었고, 승려의 교육 체계인 이력 과정에서도 화엄경이 대교과에 포함되었다. 화엄교학의 영향은 조선 후기에 화엄경 강경이 금산사, 선암사, 대흥사 등 대사찰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던 것에서 잘 드러난다.
부휴문파의 백암 성총(栢庵性聰)이 임자도에 표류한 상선에서 구한 징관의 『화엄경소초』와 원(元)의 보서(普瑞)가 징관의 『화엄경소초』 가운데 화엄의 개설에 관한 것을 모은 『화엄현담(華嚴玄談)』 9권을 다시 40권 분량으로 주석한 『화엄현담회현기(華嚴玄談會玄記)』를 간행하여 화엄교학이 부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부휴문파의 회암 정혜(晦菴定慧)는 징관의 『화엄경소초』의 어려운 부분을 풀어낸 『화엄은과(華嚴隱科)』를 저술하였고, 화엄경 강의를 수십 차례 하였다.
서산문파의 설파 상언(雪坡尙彦)은 『청량소초적결은과(淸凉疏鈔摘抉隱科)』를 저술하고, 화엄경 강의를 25회나 하였다. 연담 유일(蓮潭有一)은 설파에게 화엄경을 수학하고 30여 년간 화엄경 강경에 전념하였다. 이외에 연담의 『화엄현담사기(華嚴玄談私記)』, 최눌(最訥)의 『화엄과도(華嚴科圖)』, 의첨(義沾)의 『화엄사기(華嚴私記)』 등 화엄교학의 번성을 보여 주는 저술이 잇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