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사람[人]’을 뜻하는 중생(衆生)은 산스크리트어의 ‘바후자나(bahujana), 잔투(jantu), 자가트(jagat), 사트바(sattva)’ 등을 한역한 것이지만, 원래 불교 용어가 아니라 『예기(禮記)』, 『장자(莊子)』 등의 중국 고전에서 나온 단어였다.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343~413)이라는 걸출한 대역경사 등장 이전인 고역(古譯)의 시기는 불교의 개념을 중국의 전통적인 개념을 차용하거나 음차로 한역하던 시기로, 이때부터 ‘윤회하는 존재’을 중생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어원을 통해 살펴보면, ‘바후자나, 잔투, 자가트’는 ‘태어나다, 생산하다’ 등을 뜻하는 어근 ‘잔(√jan)’에서 파생한 것이며, ‘사트바’는 ‘~이 있다, ~이다, 존재하다’ 또는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하는 어근 ‘아스(√as)’에서 파생한 것이다. 즉, 무언가 존재하는 것, 존재하게 된 것이 산스크리트어에 따른 중생의 일반적인 정의다. 업과 윤회를 기초로 한 인도의 전통 문화 풍조에서는 윤회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윤회라는 개념이 없었던 중국에서는 불교의 동진(東進) 결과 기존 개념을 차용하는 의미 변용을 겪으며 불교 용어로 정착되었다.
중생이란 단어가 산스크리트어의 원래 의미와 충실하지 않다고 본 대역경사 현장(玄奘: 622~664)은 이를 ‘정(情), 즉 인식이 있는 것’이라는 뜻의 ‘유정(有情)’이라는 새로운 번역 용어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이미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중생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유정'은 유식사상을 비롯한 불교 교리를 설명할 때만 종종 등장할 뿐이다. 현장은 ‘윤회하는 존재’ 가운데 특히 인간을 뜻하는 ‘푸드가라(pudgala)’를 ‘보특가라(補特伽羅)’라며 명확하게 구분하여 쓰려고 했으나, 이미 알려진 중생이라는 단어의 대중성을 넘지 못하였다.
‘윤회하는 존재’를 뜻하는 중생은 인간을 비롯한 삼계육도(三界六道), 즉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를 오가는 지옥 중생 · 아귀 · 인간 · 아수라 · 천신 등을 가리킨다. 이 때문에 ‘생류(生類)’라고 옮기기도 했으나, 이것은 오늘날 인도의 대표적인 소수교파로 초목도 윤회하는 존재로 취급하는 자이나교의 이론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식물의 경우 꺾꽂이나 접목 등을 통해서도 번식할 수 있다는 예를 들어, 식물을 중생에 포함하는 자이나교의 주장을 논파한다.
초기 경전인 『잡아함경(雜阿含經, Saṃyuktāgama)』을 비롯해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Abhidharmakośa śāstra)』 등의 논서뿐만 아니라 대승경인 『법화경(法華經, Saddharma puṇḍarīka sūtra)』, 『유마경(維摩經, Vimalakīrti nirdeaśa sūtra)』과 대표적인 대승 논서인 『대지도론(大智度論, Mahāprajñāpāramita śastra)』 등에도 '중생'이라는 표현은 두루 등장하며, 그 의미는 생로병사의 사고(四苦)를 받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五蘊)을 갖춘 존재를 뜻한다. 즉,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얻지 못한 지옥 중생부터 천신까지 모든 윤회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스크리트어 경론에 등장하는 다양한 이름을 뜻하는 ‘윤회하는 존재’가 ‘중생’으로 한역되면서 발생한 가장 큰 문제는 ‘윤회하든 하지 않든’ 사람[人]과 동일하게 취급됨으로 인해 정교한 교학상의 논의를 가로막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윤회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뜻하는 ‘푸드가라’로, 역경사들에 따라 ‘부특가라(富特伽羅) · 복가라(福伽羅) · 보가라(補伽羅) · 부가라(富伽羅) · 불가라(弗伽羅) · 부특가야(富特伽耶) · 인(人) · 중생(衆生) · 수취취(數取趣)’ 등 음차, 의역 등을 통해 다양한 한자로 옮겨졌다.
이 ‘푸드가라’와 ‘윤회하는 존재’를 구분하기 위해서 현장은 중생을 ‘유정(有情)’으로 엄격하게 구분하며 옮겼으며, 그 반대되는 ‘정을 가지지 않는 존재’를 ‘무정(無情)’으로 한역하였다. 그리하여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대(四大)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정과 같이 무상(無常)하지만 윤회하지 않는 존재인 초목과 바위 등의 사물과 구분하였다. 현장의 이와 같은 새로운 역경 언어에 대한 집착은 유식사상에서 반드시 필요한 제팔식(第八識)인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 sarva bīja vijnāna)을 뜻하는 ‘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 vijñāna)’의 전변을 통한 윤회를 설명할 때 정(情), 마음[心], 또는 식(識)에 관련된 것을 명확하게 표현해야 되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가 인도로 구법(求法) 여행을 떠났던 7세기 중엽의 중인도는 소승 정량부(定量部, Sāṁmitīya)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들은 ‘윤회하는 인간’인 푸드가라를 ‘오온의 집합체이기도 하며 아니기도 하다’며 이 주제를 피해 갔었다. 이 때문에 한역 경전권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던 북인도 유부(有部, Sarvāstivada)의 『아비달마구사론』에 따르던 현장은 중생과 푸드가라 등을 명확하게 설명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중생'을 '유정'으로 굳이 바꾸고자 한 현장의 이와 같은 문제는 최소한 한역이 시작된 지 5세기 이후에나 자신들의 언어로 경론을 옮기기 시작한 티벳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화적 층이 얕아 기존에 없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야 했던 티벳의 역경사들은 일반적인 ‘사람’을 ‘미(mi)’로, 중생 또는 유정을 ‘마음을 가진 것’이라는 뜻의 ‘셈쩐(sems can)’으로, 푸드가라는 ‘강삭(gang zag)’으로 명확하게 구분하여 썼다.
삼국시대 불교가 전래된 이후 불교는 언어, 관습 등 다양한 문화적 기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장이 지적한 ‘윤회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인 유정의 의미가 체화되지는 못하였을지라도 오늘날 “이 중생아, 중생아!” 등의 표현을 자연스럽게 쓸 정도로 '중생'은 사람을 가리키는 우리말의 일부가 되었다. 또한 우리말 '짐승'의 어원 또한 '중생'에 있다. 본래 생물 일반을 가리키던 '중생'이 15세기 이후에는 사람 이외의 동물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15세기 말에는 네 발 달린 동물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변형된 것이다. 이처럼 중생은 우리말에도 깊이 뿌리를 내린 불교 용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