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상은 불교에서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여 정립된 불교교리이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도 홀로 있거나 홀로 일어나는 일이 없고 모두가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법계연기의 개념을 기초로 하고 있다. 법계연기의 세계는 그 자체로 부처의 자비가 충만한 연화장 세계이다. 불국토 사상과 결합하여 전제왕권국가 체제를 뒷받침하는 구실을 담당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의상과 원효가 방대한 화엄사상을 깊이 이해하고 체계화하여 기틀을 마련했는데, 그 맥은 고려의 균여와 지눌, 조선의 휴정으로 이어졌다.
화엄사상은 법계연기(法界緣起) 개념을 기초로 하고 있다. 즉,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일어나는 일이 없이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이 법계연기라는 개념은 특히 다른 종파의 연기설과 구별하기 위해 '무진연기(無盡緣起)'로도 불린다.
사법계(四法界) · 십현연기(十玄緣起) · 육상원융(六相圓融) · 상입상즉(相入相卽) 등은 이 무진연기를 설명하는 화엄사상의 골자이다.
사법계란 현상과 본체와의 상관관계를 사법계(事法界) · 이법계(理法界) ·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 등 넷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사물이 제각기 한계를 지니면서 대립하고 있는 차별적인 현상의 세계를 사법계라 하고, 언제나 평등한 본체의 세계를 이법계라 한다. 그러나 현상과 본체는 결코 떨어져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어서, 항상 평등 속에서 차별을 보이고 차별 속에서 평등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를 이사무애법계라 한다. 다시 나아가 현상, 그것도 각 현상마다 서로서로가 원인이 되어 밀접한 융합을 유지한다는 것이 사사무애법계이다.
이 사사무애법계는 화엄사상의 특징을 나타낸 것으로, 일반적으로 중중무진(重重無盡:끊임없이 이어짐)의 법계연기라고 하며, 그 특징적인 모습을 열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 10문은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 ·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 ·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 · 은밀현료구성문(隱密顯了俱成門) 등으로서 십현연기문이라고도 한다.
동시구족상응문이라 함은 현세에 과거와 미래가 다 함께 담겨 있음을 뜻하고, 제법상즉자재문은 현상계의 모든 사물이 서로 차별하는 일이 없이 일체화되고 있다는 말이다. 또, 하나[一]는 하나의 위치를 지키고 다(多)는 다의 면목을 유지하는 가운데, 하나와 다가 서로 포섭하고 융합한다는 것이 일다상용부동문이다. 이때 하나가 없으면 다가 없으며, 하나가 있으면 일체가 성립한다. 모든 것이 홀로 고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도 되고 십으로도 되고 일체로도 된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하여 화엄에서 가르치는 일즉일체(一卽一切) · 일체즉일(一切卽一) · 일즉십(一卽十) · 십즉일(十卽一)의 논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또한, 모든 현상의 각각에는 총상(總相) · 별상(別相) · 동상(同相) · 이상(異相) · 성상(成相) · 괴상(壞相) 등 여섯 가지 모습이 함께 갖추어져 있고, 전체와 부분 또는 부분과 부분이 서로 일체화되고 있다는 것을 전개시킨 것이 육상원융의 이론이다.
『화엄경』에서 설하는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는 현상계와 본체, 또는 현상과 현상이 서로 대립하는 모습을 그대로 지니면서도 서로 융합하여 끝없이 전개되는 약동적인 큰 생명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 연화장세계에서는 항상 『화엄경』의 중심불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대광명을 비추어 모든 조화를 꾀하고 있다. 『화엄경』은 우주의 질서를 미적으로 표현한 경전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통일국가의 상징이기도 하다.
화엄의 가르침은 서로 대립하고 항쟁을 거듭하는 국가와 사회를 정화하고, 사람들의 대립도 지양시킴으로써 마음을 통일하게 하는 교설이다. 따라서, 중국이나 우리 나라와 같은 전제왕권국가의 율령정치체제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하는 큰 구실을 담당하였다.
『화엄경』은 인도 용수(龍樹)의 편집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 「용수전」에 의하면, 대룡보살(大龍菩薩)의 인도로 용궁에 들어갔던 용수가 방등경전과 무상묘법(無上妙法)의 글을 얻어왔다는 기록만이 있을 뿐 『화엄경』을 가져왔다는 말은 없다. 다만, 법장(法藏, 643-712)의 『화엄경전기』에서만 용수가 용궁에서 가져왔다고 기록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화엄경』을 사상적인 측면에서 보면 무착(無着)과 세친(世親) 등의 연기사상(緣起思想)에 힘입어 교학의 체계가 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친이 「십지품(十地品)」의 별행(別行)과 『십주경(十住經)』에 의거해서 『십지경론(十地經論)』 12권을 제작하였는데, 이 책은 『대지도론(大智度論)』 · 『섭대승론(攝大乘論)』과 함께 화엄사상의 기초교리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상승(相承)하는 조사(祖師)를 정할 때는 인도의 마명(馬鳴)과 용수, 그리고 중국에서는 두순(杜順, 557-640)을 초조(初祖)로 삼아 지엄(智儼, 602-668)→법장→징관(澄觀, 738-839)→종밀(宗密, 780-841)까지를 합해서 화엄칠조(華嚴七祖)로 세우고 있다.
마명을 화엄조사로 받들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 대승경전을 약축하여 사상을 정립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의 화엄종주들이 한결같이 『대승기신론』을 즐겨 연구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최초로 『화엄경』을 번역한 승려는 동진의 각현(覺賢=佛馱跋陀羅, 359-429)이다. 그 뒤 한역본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종단이 두순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두순은 『오교지관(五敎止觀)』과 『법계관문(法界觀門)』을 저술하여 종지를 확립하였다.
두순의 제자 지엄은 『화엄경』 본문을 해석하는 『법계관문』과 『화엄경』의 요지만을 모은『공목장(孔目章)』, 그 밖에도 『오십요문답(五十要問答)』과 『일승십현문(一乘十玄門)』을 저술하였다.
지엄의 제자로는 중국의 법장과 신라의 의상(義湘, 625-702)이 있다. 의상은 지엄의 인가를 받은 뒤 신라로 돌아와 원효(元曉, 617-686)와 함께 화엄사상을 전파하였다.
법장은 중국에 화엄학을 꽃피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와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은 중국 화엄종의 기초를 확립한 대표적인 저술이다. 법장의 문하에는 혜원(慧苑, 673-?)이 있고 혜원의 문하에서는 징관이 나왔으나, 징관은 『수소연의초(隨疏演義鈔)』를 지어 혜원의 『간정기(刊定記)』가 비정통이라고 논파하였다.
징관의 법맥을 이은 종밀은 『원인론(原因論)』을 지어 유 · 불 · 도 삼교의 사상을 대비시킴으로써 불교의 참뜻을 선양하였고, 교(敎)와 선(禪)의 병행을 논하는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를 저술하여 고려의 지눌(知訥, 1158-1210)에게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종밀의 사상은 송대에 와서 정원(淨源)으로 이어졌는데, 정원(淨源, 1011-1088)은 고려의 의천(義天, 1055-1101)과 사상적인 교류가 많았던 화엄종사이다.
화엄사상은 일찍부터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고, 그 어떤 사상이나 신앙보다 중요시되면서 끊임없이 연구되어 한국불교사상의 한 전통으로 정립되었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가 화엄사상을 수용하여 연구한 사실은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화엄사상을 이 땅에 크게 일으킨 고승은 원효와 의상이지만, 화엄의 진리가 이들에 의하여 펼쳐지기 이전부터도 화엄사상은 이미 신라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지리산화엄사사적」에 의하면, 544년(진흥왕 5) 인도승려 연기조사(緣起祖師)가 화엄원돈(華嚴圓頓)의 깊은 이치를 해동에 유동시키니 계림(鷄林)의 대승불교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하였다.
또 의천은 화엄사에 들러 연기조사의 진영(眞影)을 보고 “일생을 바쳐 노력하여 화엄의 종풍을 해동에 드날렸네.”라는 찬을 남겼다. 그러나 연기조사가 실재인물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고 그에 대한 기록들도 모두 믿기 어려운 점이 많다.
역사적으로 뚜렷이 증명되고 있는 화엄학의 전래자는 자장(慈藏, 590-658)이다. 자장은 흔히 계율을 엄중히 정비하여 신라불교계를 정리한 율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자장은 자신의 개인집을 절로 만들고 그곳에서 『화엄경』을 강의하는 등 포교활동을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엄의 묘의를 통달하였던 인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자기가 태어난 집을 원녕사(元寧寺)로 고치고 낙성회(落成會)를 베풀어 『화엄경』 1만 게(偈)를 강하였을 때 52류(類)의 여인이 감동하여 현신(現身)을 하고 들었다.
또한, 『향전(鄕傳)』에서는 자장이 당나라에 가 있을 때 당태종이 몸소 그를 무건전(武乾殿)에 맞아들여 화엄의 설법을 들었다고 하는데,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기사이다.
통일신라시대로 들어서면서 화엄사상에 대한 이해는 중국을 앞지를 만큼 창의적이었고, 또 그 방대한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체계화시켜 나갔다. 그와 같은 작업은 주로 원효와 의상에 의해 기틀이 마련되었다.
원효의 『화엄경소(華嚴經疏)』는 중국 화엄학의 대가인 법장이 그의 『탐현기』에서 즐겨 인용할 만큼 정평이 있던 명저였을 뿐 아니라 원효의 뛰어난 사상성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원효가 『화엄경소(華嚴經疏)』 가운데서 제시한 삼승별교(三乘別敎) · 삼승통교(三乘通敎) · 일승분교(一乘分敎) · 일승만교(一乘滿敎)의 사교판설(四敎判說)은 교상판석(敎相判釋)의 역사상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사제(四諦)와 십이연기(十二緣起) 등의 소승불교의 가르침을 삼승별교로 보고 『반야경(般若經)』과 『해심밀경(解深密經)』 등의 경전을 삼승통교로 본 것은 이미 중국에서 혜관(慧觀, 368∼438)이 시도한 바 있었으므로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불교의 교설을 삼승과 일승으로 나누고 일승을 다시 분교와 만교로 나눈 뒤, 일승분교에 『범망경(梵網經)』과 『영락본업경(瓔珞本業經)』을 놓고 『화엄경』을 일승만교에 놓아 화엄의 철학을 가장 으뜸된 가르침으로 삼은 것은 분명히 탁견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사교판설이 법장 등 중국의 화엄종에서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계기가 되어 원효를 해동화엄종주로까지 칭하게 되었으나 그 자신은 화엄종에 사로잡히지도, 종주로 자처하지도 않았다. 오직 보다 높은 차원에서, 접하는 경전마다 그 경전의 관점에서 가치를 논하였을 뿐이었다.
다만, 그가 행화(行化)할 때 가지고 다닌 도구를 『화엄경』의 일게(一偈)를 취하여 ‘무애(無碍)’라 명명하였고, 이에 의하여 「무애가(無碍歌)」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원효의 화엄관계 저술로는 『화엄강목(華嚴綱目)』 1권, 『화엄경소』 10권, 『화엄경종요(華嚴經宗要)』, 『화엄입법계품초(華嚴入法界品抄)』 2권, 『일도장(一道章)』 1권, 『보법기(普法記)』 등이 있으나, 이 중에서 『화엄경소』 권3(光明覺品 제9에 해당)만이 현존하고 있다.
의상은 화엄학을 대성시킨 중국의 화엄종주들과 어깨를 견줄 만큼 화엄사상사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다. 676년(문무왕 16)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여 화엄의 종지를 널리 편 이래 오늘날까지 화엄종을 개창한 자로서 숭앙받고 있다. 의상은 원효와는 달리 하나의 조직을 갖추었고 체계화된 방법으로 화엄사상을 널리 선양하여 해동화엄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의상이 남긴 저술 중 화엄관계의 저술은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1권,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鈔記)』 1권,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1권,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 1편 등이 있으나,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은 『법계도』와 『백화도량발원문』 그리고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의 게송 일부뿐이다. 그러나 『법계도』는 그의 화엄사상을 잘 드러내 주는 탁월한 저술이며, 이후의 화엄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법계도』에서, 화엄의 최고경지인 해인삼매(海印三昧)를 물결 없는 넓은 바다에 비유하였다. 천상과 지상의 만물뿐 아니라 수중의 것이 바다에 모두 비치듯이, 부처의 삼매 속에 한량없는 세계가 남김없이 비치고 있는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또, 연기를 가리켜 모든 것이 서로 일체화되어 평등을 나타낸다는 상즉(相卽)으로 풀이하기도 하였다.
그가 내세운 오교판설(五敎判說)이나 십현연기문(十玄緣起門)의 명칭 · 배열 및 설명은 스승인 지엄의 설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이이무애법계(理理無礙法界)라는 독창적인 설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중국의 화엄종에서는 이사무애와 사사무애는 설하였지만 이이무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이무애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서 이(理)의 차별이 있어야 하는데, 의상은 이도 사(事)의 경우처럼 차별적인 것이기도 한 것이라 하여 이의 차별적인 면도 아울러 강조하였던 것이다.
또, 연기를 설명함에 있어서 10전(十錢)을 예로 들어 일즉십 · 십즉일 등의 논지를 전개시킨 것도 그에 의해서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부처의 경지를 논함에 있어서도 수행의 입장에서 열 가지 특징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행경십불(行境十佛)만을 지적하고, 지혜를 그 기준으로 삼는 해경십불(解境十佛)을 지적하지 않음으로써 지혜보다 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해경십불만을 지적한 법장의 설과는 크게 대조를 이루는 불신론(佛身論)이다.
그는 화엄의 요지를 7언 30구 210자로 요약한 『법성게(法性偈)』를 지었다. 처음 4구와 다음 18구에서는 각각 자리행(自利行)과 이타행(利他行)을, 그리고 나머지 8구에서는 보살이 닦는 수행의 이득을 말하였다. 그리고 이 법성게를 54각의 굴곡으로써 도시(圖示)하되 그 전체의 모양을 사각형으로 하였다.
첫귀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의 첫 법(法)자를 한가운데 놓고 그로부터 각형을 따라 좌하→좌상→우상→우하로 전진하여 끝귀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의 마지막 불(佛)자에서 끝나도록 배열하였다.
법성게가 끊기지 않고 잇대어 연속되는 것은 만물의 총상과 화엄의 일승사상을 나타내기 위함인데, 그 사이에 굴곡을 두었음은 별상을 나타내어 중생의 자질이 서로 같지 않다는 삼승을 보이려는 것이다.
그 굴곡의 54수는 화엄의 수행단계인 54위(位)를 가리키는 것이며, 사각형의 네모는 각각 자(慈) · 비(悲) · 희(喜) · 사(捨)의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뜻한다. 특히, 불교를 상징하는 불 · 법 · 승 삼보(三寶)를 강조하게끔 불(佛) · 법(法) · 중(衆) 3자를 가운데에 나란히 배열시켰음은 주목된다.
의상의 문하에는 3,000여 명의 학승이 따랐다. 그 가운데 10명의 제자인 표훈(表訓) · 신림(神琳) · 지통(智通) · 오진(悟眞) · 진정(眞定) · 진장(眞藏) · 도융(道融) · 양원(良圓) · 상원(相源) · 능인(能仁) 등은 그의 화엄사상을 전수하여 후세에 의상의 학덕을 선양하였으며, 통일기의 신라불교를 융성하게 한 고승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학풍은 여러 사찰을 중심으로 전파되었는데, 이 사찰을 의상화엄전교십찰(義湘華嚴傳敎十刹)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의상전교조」와 최치원(崔致遠)이 찬술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기록된 십찰의 명칭은 서로 일치하지 않고, 또 『삼국유사』의 것은 10개가 되지 못하여 문제가 있다.
이를 대비하면 〈표 1〉과 같다. 이 화엄십찰들의 창건연대를 살펴보면 몇몇 사찰은 의상이 생존하였던 시기와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의상이 직접 창건한 사찰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문하제자들에 의하여 그의 사상이 전승된 곳이거나, 신라 화엄사상의 중심도량이 되었던 곳임에는 틀림이 없다.
연번 | 삼국유사 | 법장화상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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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太白山 浮石寺 | 北岳 浮石寺 |
2 | 原州 毘摩羅寺 | |
3 | 伽倻 海印寺 | 伽倻山 海印寺 普光寺 |
4 | 毘瑟 玉泉寺 | 毘瑟山 玉泉寺 |
5 | 金井 梵魚寺 | 良州 金井山 梵魚寺 |
6 | 南岳 華嚴寺 | 南岳 智異山 華嚴寺 |
7 | 中岳 公山 美理寺 | |
8 | 熊州 迦耶峽 普願寺 | |
9 | 鷄龍山 岬寺 | |
10 | 全州 毋山 國神寺 | |
11 | 漢州 負兒山 淸潭寺 | |
〈표 1〉 삼국유사 · 법장화상전의 화엄십찰 |
의상에 의하여 정착된 신라 화엄사상은 후학들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의상의 10대제자 중 지통과 도신(道身)은 각각 『화엄요의문답(華嚴要義問答)』과 『화엄일승문답(華嚴一乘問答)』을 찬술하여 의상의 화엄사상을 계승하였고, 법장의 문하에서 수학한 승전(勝詮)은 692년(효소왕 1) 당나라로부터 귀국할 때 법장의 저서인 『화엄경탐현기』 등을 의상에게 전하는 한편, 갈항사(葛項寺)에서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또, 그의 제자 가귀(可歸)는 『화엄경의강(華嚴經義綱)』을 저술하여 화엄의 요의를 밝혔다.
승전 이후의 고승인 범수(梵修) 심상(審祥, ?-742) · 태현(太賢) 등도 화엄의 대가였다. 특히, 심상은 법장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740년(효성왕 4)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 화엄종의 초조가 되었다.
이 밖에도 많은 신라승들이 화엄에 관한 저술을 남겼으나 오늘날 온전하게 전해 오는 것은 표원(表員)의 『화엄경문의요결문답(華嚴經文義要決問答)』과 견등(見登)의 『화엄일승성불묘의 (華嚴一乘成佛妙義)』, 명효(明皛)의 『해인삼매론(海印三昧論)』 등이다.
표원은 그의 저술에서 화엄교학과 관련되는 문제들을 18과(科)로 나누어 석명(釋名) · 출체(出體) · 문답의 삼문분별(三門分別)로 그 각각을 정의, 분석하고 설명하였다.
그 주된 내용은 ① 『화엄경』 자체에 관한 문제, ② 화엄교설의 특수 연기사상, ③ 진실성으로서의 실제 · 여여(如如) 등에 관한 문제, ④ 역대의 교상판석(敎相判釋)과 일승론, ⑤ 보살의 수행도에 관한 문제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견등은 그의 『화엄일승성불묘의』 가운데서 성불(成佛)을 위성불(位成佛)과 행성불(行成佛)과 이성불(理成佛)의 셋으로 구별하여 설명하였다. 이것은 의상의 화엄사상과 주류를 달리하는 것으로, 그가 법장을 사조(師祖)로 삼은 점으로 보아 법장의 사상체계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견등의 화엄사상은 천태(天台) 및 『기신론』의 논리와 상통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화엄사상은 일본에서 크게 선양되었다.
생몰연대 미상인 견등과 표원은 그의 저술에서 다같이 원효와 의상의 설은 물론 중국 화엄종의 지엄 · 법장 · 안름(安廩, 507∼583)의 설까지를 널리 언급하고 있으면서도 화엄과 선의 일치를 주장한 중국화엄종의 제4조 징관의 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로 보아 그들은 당나라에서 돌아온 범수에 의해서 처음으로 징관의 『화엄경소(華嚴經疏)』가 신라에 소개된 799년(소성왕 1) 이전의 승려인 듯하다.
명효 역시 신라의 어느 때 인물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해인삼매론』을 저술하고 화엄의 요지를 7언 28구 196자로 요약하였던 화엄학의 대가이다. 그는 의상의 『법계도』와 비슷한 모양으로 삼매도를 만들었다.
첫 귀절인 생사열반비이처(生死涅槃非異處)의 첫 생(生)자를 한가운데에 놓고 그로부터 각형을 따라 전진하여 마지막 귀절인 부지생사즉열반(不知生死則涅槃)의 끝 반(槃)자에서 끝나도록 맺었으나, 그 이어가는 진로는 의상의 것과 달리 우하→우상→좌상→좌하로 하였다.
그러나 이 삼매론은 우리 나라에서는 별로 유통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일본에서 크게 선양되었다. 『화엄경』은 때때로 국가적 규모로 강설되었는데 754년(경덕왕 13) 법해(法海)가 황룡사에서 강경한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삼국통일 전후로부터 경덕왕대까지의 당나라 불교는 화엄종과 법상종(法相宗)이 성행하였기 때문에 신라의 입당승(入唐僧)도 대부분이 화엄과 법상학을 전래하였지만, 혜공왕 이후에는 당나라에서 화엄종과 선종이 흥행하게 됨에 따라 입당승들도 대부분 선을 배우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선문구산(禪門九山)의 선승들 대부분이 화엄을 겸수(兼修)하고 있는데, 이것은 화엄사상이 선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북종선(北宗禪)을 전래한 신행(神行, 704-779)의 뒤를 이어 821년(헌덕왕 13)에 남종선(南宗禪)을 최초로 전한 도의(道義)는 지원승통(智遠僧統)과의 문답 중 화엄의 4종법계를 논의하고 있다. 그것을 보면 도의도 화엄에 깊은 조예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또, 실상산파(實相山派) 홍척(洪陟)의 제자 수철(秀徹, 817-893)도 화엄을 수학하였고, 동리산파(桐裏山派) 혜철(惠哲, 785-861)도 부석사에서 화엄을 배웠다.
성주산파(聖住山派)의 무염(無染, 801-888)도 언설 및 정토와 예토(穢土:사바세계)를 천명하는 교문의 응기문(應機門)과, 무설(無說) 및 부정불예(不淨不穢)를 천명하는 선문의 정전문(正傳門)을 구별할 때 “교문의 극치는 여래심(如來心)을 증득하는 것이니 그것을 해인정삼종세간법인(海印定三種世間法印)이라 한다.”고 한 것으로 보면 그 역시 화엄의 이치를 깊이 체득하여 화엄으로써 교문을 대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범일(梵日, 810-889)과 같이 남전(南泉, 748-835) 문하의 선을 전한 도윤(道允, 798-868)도 귀신사(鬼神寺)에서 『화엄경』을 청강하였고, 절중(折中)도 부석사에서 화엄을 수학하였다. 위앙종(潙仰宗)을 널리 폈던 순지(順之)가 사대팔상(四對八相)의 원상상전(圓相相傳)을 천명한 것도 역시 화엄의 원교(圓敎)에서 기인한 것이다.
석상(石霜, 807~888)의 선을 전승한 행적(行寂, 832-916)도 가야산 해인사에서 화엄묘의를 수득하였고, 그의 동학인 개청(開淸)도 화엄사에서 화엄의 오묘한 종지를 수학하였다. 이상을 통하여 볼 때 선문구산의 선승들이 거의 화엄과 인연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의 화엄관계 찬술문헌은 〈표 2〉와 같다.
저자 | 문헌명 | 권수 | 현존여부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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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曉 | 華嚴綱目 | 1 | 失 | |
華嚴經疏 | 10 | 一部存 | 서문, 권3현존 | |
華嚴經宗要 | 미상 | 失 | ||
一道障 | 1 | 失 | ||
普法記 | 미상 | 失 | ||
大乘觀行 | 3 | 失 | ||
華嚴入法界品抄 | 2 | 失 | ||
義 湘 | 華嚴一乘法界圖 | 1 | 存 | |
入法界品鈔記 | 1 | 失 | ||
華嚴十門看法觀 | 1 | 失 | ||
一乘發願文 | 1篇 | 存 | ||
白花道場發願文 | 1篇 | 存 | ||
智仁 | 佛地論疏 | 4 | 失 | |
智通 | 華嚴要義問答 | 2 | 失 | 錐洞記 |
道身 | 華嚴一乘問答 | 2 | 失 | 道身章 |
義 寂 | 華嚴經綱目 | 2 | 失 | |
表員 | 華嚴經文義要訣問答 | 4 | 存 | |
華嚴經要義問答 | 3 | 失 | ||
明皛 | 海印三昧論 | 1 | 存 | |
太賢 | 華嚴經古迹記 | 10 | 失 | |
宗一 | 華嚴經料簡 | 1 | 失 | |
大華嚴經疏 | 20 | 失 | ||
緣起 | 華嚴經要訣 | 12 | 失 | |
華嚴經眞流還源樂圖 | 1 | 失 | ||
華嚴經開宗決疑 | 30 | 失 | ||
見登 | 華嚴一乘成佛妙義 | 1 | 存 | |
珍嵩 | 華嚴孔目記 | 6 | 失 | |
義融 | 華嚴經釋名章 | 1 | 失 | |
審祥 | 華嚴起信觀行法門 | 1 | 失 | |
華嚴經疏 | 12 | 失 | ||
梵如 | 華嚴經要訣 | 6 | 失 | |
可歸 | 華嚴經義綱 | 1 | 失 | |
法融 | 法界圖記 | 미상 | 失 | 法融記 |
崔致遠 | 唐大薦福寺故寺主翻經大德法藏和尙傳 | 1 | 存 | |
〈표 2〉 신라시대 찬술 화엄사상관계저서 |
신라 말 선종이 크게 유행하는 분위기 속에서 신라 의상 계통의 화엄종 문도들은 서로 다른 법통을 주장하며 대립의 일면을 보이게 되었다. 신라 말 가야산 해인사에는 두 사람의 화엄종장(華嚴宗匠)이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의 귀의를 받았던 희랑(希朗)과 후백제 견훤의 귀의를 받았던 관혜(觀惠)이다.
희랑의 문도들은 북악부석사(北岳浮石寺)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관혜의 문도들은 남악화엄사(南岳華嚴寺)를 근거로 활동하였다. 이렇게 화엄은 남북 양악(南北兩岳)으로 나누어졌고, 그 주장하는 바도 각각 달라 양파간의 논쟁이 치열하였다. 그 상황이 물과 불의 관계와 같아서 서로를 조금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남악과 북악의 화엄사상이 어떻게 달랐는지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다만, 고려시대의 저술인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에 남악 관혜의 수전법사상(數錢法思想)이 인용되어 있다. 고려 광종 때의 『균여전(均如傳)』에는 선공초삼십여의기(先公鈔三十餘義記)의 간단한 내용이 나타나 있는데 이것이 북악의 사상과 연결되고 있는 정도이다.
이를 통하여 살펴보면, 남악사상은 성기(性起:性에서 일어난다는 뜻으로, 깨달은 佛果의 입장에서 사물의 現起를 설하는 것)를 나타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연기(緣起:緣에 의하여 일어난다는 뜻으로, 깨달음에 향하는 因의 입장에서 사물의 現起를 설하는 것)에 더 비중을 두었고, 북악사상은 연기가 나타나 있지 않은 대신 성기가 나타나 있고 육상(六相)의 원융한 면이 강조되었다.
이 논쟁에 대하여 균여는 깊이 탄식하고 하나의 화엄종 속에 이 둘을 귀일하게 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균여의 화엄사상은 본래 북악의 융회불교의 입장에서 남악의 사상까지를 종합하여 화엄종 교단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법상종의 세력까지 흡수하기 위하여 성상융회사상(性相融會思想)을 주창하였다.
균여의 성상융회사상은 광종이 중소토호(中小土豪:규모가 작은 족벌) 이하의 세력을 흡수하여 왕권의 광범한지지 기반을 성립시키는 근거가 되었기 때문에 광종의 깊은 신임을 얻었다. 균여는 광종의 귀의를 받아 귀법사(歸法寺) · 개태사(開泰寺) · 법수사(法水寺)에서 화엄종풍을 크게 천명하였다.
그의 저서로 『석화엄교분기원통초(釋華嚴敎分記圓通鈔)』 등 총 10종 74권이 있는데, 대부분 중국의 지엄과 법장의 저서를 주석하는 데 주력하였고, 의상에 관한 것은 『법계도기(法界圖記)』 두 권뿐이다. 북악의 계승자인 균여의 저술이 중국의 화엄과 깊이 연결되고 있는 것을 통하여, 남악은 의상의 화엄사상을 전승하는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나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균여의 화엄사상이 비록 광종대의 전제정치의 이념으로 성립되어 갔지만 당시 화엄종파를 대표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968년(광종 19) 이후에 균여는 같은 화엄종 승려인 정수(正秀)와 귀법사 내에서 대립하게 되었다. 정수는 균여를 이정수행자(異情修行者)라고 배척한 것으로 보아 순수교리적 화엄사상가로 이해된다. 그에 비하여 균여는 이정을 닦는 융회불교를 펴고 있었다. 이러한 대립은 일단 균여의 승리로 끝맺어지지만 그가 화엄종단 전체의 지지를 받고 있지 않았음을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균여의 사상은 후에 의천 등에 의하여 배척을 받으면서 그 세력이 크지 못하였으나, 무신의 난 이후 조계선종(曹溪禪宗)에 의하여 다시 주목을 받게 되어 고려대장경 속에 그의 저술 일부가 판각되어 들어가게 되었다. 아울러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를 향가로 지어 민간에 널리 유포함으로써 화엄교학의 대중화에 노력한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균여 당시에 그와 함께 귀법사에 머물렀던 화엄종주로서 탄문(坦文)이 있다. 그는 북한산 장의사(藏義寺) 신엄(信嚴)으로부터 화엄을 배웠고, 이 후 구룡산사(九龍山寺)에서 화엄을 수학하였으며, 당시 서백산(西伯山)의 신랑(神朗)이 방광비종(方廣秘宗)을 강연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화엄원리를 논하여 굴복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고려 왕실의 깊은 귀의를 받기도 하였다. 즉위 직후 혜종은 『화엄경』 삼본(三本)을 사경(寫經)하여 천성전(天成殿)에서 법연(法筵)을 설할 때 탄문을 청하여 『화엄경』을 강연하게 하였으며, 정종과 광종도 그에게 귀의하였다. 탄문이 귀법사에 머무른 것은 963년(광종 14)이다.
이때 귀법사의 주지는 17년 후배인 균여였다. 그들은 모두 성상융회사상의 경향을 지녀 서로 통할 수는 있었지만, 탄문은 화엄사상 내에 선종사상을 융회하려는 경향을 지녀 균여의 성상융회사상과는 결국 일치하지 않게 되었다.
탄문과 균여의 뒤를 이은 화엄의 대덕으로는 결응(決凝)이 있다. 그는 정종의 왕사, 문종의 국사가 되었는데, 항상 화엄삼매를 닦았다. 만년에 고향에 절을 창건하였을 때 문종은 화엄안국사(華嚴安國寺)라는 칙액(勅額)을 내렸다. 결응 이후 의천 사이의 시기에는 화엄학자로 보현사(普賢寺)의 탐밀(探密)과 그의 제자 굉확(宏廓)이 있었고, 문종 때에 이르러서는 화엄의 대가 해린(海麟)과 난원(爛圓)을 주로 한 불사가 성행하였다.
1067년(문종 21) 흥왕사(興王寺)가 창건된 이후 이 절에 홍교원(弘敎院)을 두어 항상 화엄교의를 설하게 하였고, 1077년에는 금자화엄경(金字華嚴經)을 전경(轉經)하게 하였다. 이 당시 활동한 난원은 곧 의천의 스승이다.
이때의 화엄종 사찰로서는 광종 이후의 중심사찰인 귀법사와 문종 이후의 중심사찰인 흥왕사를 비롯하여 흥교사(興敎寺) · 홍호사(弘護寺) · 불일사(佛日寺) · 진관사(眞觀寺) · 봉선사(奉先寺) · 영통사(靈通寺) · 구산사(龜山寺) · 숭선사(崇善寺) · 묘지사(妙智寺) · 송천사(松川寺) · 귀신사(歸信寺) · 홍원사(洪圓寺) · 부석사 · 해인사 · 화엄사 · 보원사(普願寺) 등이 그 대표적인 사찰이다.
당시 고려의 불교는 화엄종과 법상종이 크게 대우를 받으면서 대립하였고, 제3의 종단이었던 선종은 선종대로 자체의 분파성을 극복하지 못한 채 교선대립의 상황에 처하여 있었으며, 각 교단은 귀족세력과 연결됨에 따라 생겨난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의천이 화엄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고려불교의 중흥을 표방하게 되었다.
의천은 문종의 제4왕자로서 11세에 출가하였다. 난원의 문하에서 처음 수업하기 시작한 곳이 화엄종의 영통사였으며, 죽은 뒤 그의 유골을 안치한 곳도 이 영통사의 동산(東山)이었다. 일찍이 중국화엄종의 제4조인 징관의 글을 보고 그 뒤부터 불교의 이해가 날로 더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의천이 영통사에서 처음 공부한 것이 『화엄경』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23세 때 제일 먼저 강론하기 시작한 경전도 정원신역(貞元新譯)의 『화엄경』과 그 소(疏)였다.
그 뒤 의천이 송나라에서 귀국한 이래 계속 머물렀던 흥왕사는 금자화엄경을 봉안한 고려화엄종의 본거지였으며, 해인사로 퇴거하기 직전에 머물렀던 홍원사도 법장 · 징관 등 화엄조사의 구조당(九祖堂)이 있는 화엄종의 사찰이었다. 뿐만 아니라, 송나라에 갔을 때 만났던 50여 명의 승려 중 10명이 화엄종의 승려였으며, 중국승려 중 가장 오래 접촉하고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도 화엄종의 정원이었다.
의천이 정원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송나라로 가기 전부터였고, 의천이 송나라에 갔을 때에는 의천에게 혜인원(慧因院)에서 특별히 화엄을 강하여 주었으며, 그 강이 끝난 뒤 전법(傳法)의 표시로 의천에게 수로(手爐)와 불자(拂子)를 주었다. 이후 정원은 의천을 화엄승통(華嚴僧統)이라고 불렀다.
김부식(金富軾)이 찬한 「대각국사탑비문」에 의하면, 의천이 화엄종뿐만 아니라 점돈대소승(漸頓大小乘)의 경율론장소(經律論章疏)에 이르기까지 탐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불교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넓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의천의 중심사상은 화엄이었으며 그 자신도 화엄종의 승려로 자처하고 있었다.
특히,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편찬함에 있어 권1의 제일 앞에 『화엄경』을 배당하였으며, 그 서문에 자신을 해동전화엄대교사문(海東傳華嚴大敎沙門)이라고 자서하였다. 그리고 그가 편찬한 『신집원종문류(新集圓宗文類)』의 원종은 화엄종을 말하는 것이다.
그 서문에 “화엄종의 이론은 대단히 복잡하기 때문에 그것을 인용하기도 어려운 것인데, 더욱이 근세에 이상한 것을 좋아하는 우리 종(華嚴宗)의 무리들이 근본을 버리고 지말을 좇아 억설이 분분하므로 조사의 현지(玄旨)가 막혀 통하지 못하게 된 것이 10 중 7, 8이나 된 것을 개탄하여 광문(廣文)을 간추려서 분류하여 요람으로 만들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화엄종의 입장에서 화엄종의 여러 이설들을 종합, 통일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의천은 선종의 원찰로서 화엄종의 사찰이었던 홍원사에 구조당을 설치하고 그때까지 통일되지 않았던 화엄종의 조보(祖譜:법맥, 조사들의 계보)를 새로 정하여 마명 · 용수 · 천친 · 불타(佛陀) · 광통(光統) · 제심(帝心) · 운화(雲華) · 현수 · 청량(淸凉) 등을 9조로 하였다는 것도 화엄종의 교리와 종단의 통합에 대한 의천의 노력의 일단을 말하는 것이다.
의천은 화엄사상 가운데 법계연기론(法界緣起論)을 가장 중요시하였고, 화엄종에 있어서의 실천수행과 이론적 교리조직으로서 삼관오교를 주장하였다. 삼관은 화엄종에서 법계의 진리를 증득하기 위하여 닦은 법계삼관(法界三觀)의 약어로 다음과 같다.
① 모든 법은 실성(實性)이 없고 유와 공의 두 가지 집착을 떠난 진공임을 관하는 진공관(眞空觀), ② 차별 있는 현상의 법과 평등한 본체의 법은 분명하게 존재하면서도 서로 융통하는 것임을 관하는 이사무애관(理事無碍觀), ③ 우주의 온갖 사물은 개개가 모두 일체를 포용하고 있음을 관하는 주변함용관(周遍含容觀)을 말하는 것이며, 오교는 화엄종의 교상판석인 소승교 · 대승시교(大乘始敎) · 종교(終敎) · 돈교(頓敎) · 원교(圓敎, 화엄)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삼관오교는 학문과 실천, 교와 관을 함께 닦는 것을 그 내용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의천이 보기에는 당시 고려의 화엄종은 말법투쟁(末法鬪爭:법의 질서가 흐트러짐)의 시기를 당하여 모순이 격화된 채 그 도 자체가 거의 끊어지게 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 모순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교관병수(敎觀並修:이론과 실천수행을 함께 닦음)를 주창하였는데, 자연히 모순이 극화된 고려화엄종이 아닌 신라화엄종의 전통을 재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신라의 원효와 의상을 추모하여 그들의 사상을 천명하기에 노력을 기울였다.
의천은 화엄종 관련 장소(章疏)의 정리와 강론, 문도의 양성, 종보의 통일 및 교관병수의 주장 등을 통하여 화엄사상의 통일과 화엄종단의 정비에 주력하였으나, 그의 불교개혁운동은 자신의 종파인 화엄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화엄종을 중심으로 다른 종파를 하나로 회통시키고자 함에 있었다. 그는 각 종파를 종합, 정리함으로써 그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일불승(一佛乘)의 사상체계로 회통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화엄종의 삼관오교로써 화엄종 내의 모순을 극복하고 다른 교종의 여러 파를 종합하여 절충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할 수는 있었으나, 교종과 대립되어 있던 선종까지를 포섭하여 불교를 쇄신하고 전체 불교계의 사상을 통일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말년에 새로운 종파로서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하게 되었다.
이것은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융섭하려 하였던 사상적 흐름인데, 그 밑바닥에는 화엄사상이 잠재되어 있었다. 의천은 신라의 원효와 의상 이후 해동화엄중흥조(海東華嚴中興祖)로서 평가되고 있다.
의천의 뒤를 이어 화엄을 널리 전파한 승려로는 계응(戒膺)과 혜소(惠素) · 낙진(樂眞) · 징엄(澄儼) 등이 있다. 태백산 각화사(覺華寺)의 계응이 화엄을 설할 때에는 언제나 1,000여 명 이상이 경청하였으며 40여 년 동안 화엄의 대법을 선양하였다고 한다.
또, 서호견불사(西湖見佛寺)의 혜소는 의천의 입적 후 대각국사행록 10권을 지었으며, 인종을 위하여 『화엄경』을 강설하기도 하였다.
화엄의 학장(學匠:학문의 대가) 낙진은 의천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을 때 정원으로부터 그 총명을 인정받았으며, 귀국 후에는 봉선사 · 담화사 · 불국사 · 안엄사 등의 사찰에서 화엄을 전교하였다.
징엄은 의천의 밑에서 화엄을 통달한 뒤 홍원사 · 개태사 · 귀신사 · 흥왕사 등지에 머무르면서 화엄을 가르쳤으며, 인종이 즉위하자 계율종(戒律宗) · 법상종 · 열반종 · 법성종 · 원융종을 총괄하는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었다.
고려 의종은 즉위 즉시 영통사에서 『화엄경』을 50일 동안 강하게 하였고, 1156년(의종 10)에는 흥왕사에 행행(幸行)하여 『화엄경』을 전교한 법회 종사자들에게 상을 주고 금은자화엄경(金銀字華嚴經) 2부를 사경하여 흥교원에서 소장하게 하였다. 그러나 의종 이후 법문의 문란은 극에 달하였고, 무신의 난 등 국내정세로 인하여 고려의 불교는 의식 중심의 형식불교로 흐르고 있었다.
이때 지눌이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여 고려불교의 새로운 기운을 회복시켰다. 지눌이 화엄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29세 때 학가산 보문사(普門寺)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그때 지눌은 혜능(慧能)의 『육조단경(六祖壇經)』을 통하여 즉심시불(卽心是佛:마음이 곧 부처)의 선지(禪旨)를 체득하였으나, 자심(自心)만 찾고 사사무애를 체득하지 못하면 불과(佛果)를 이룰 수 없다는 말에 크게 자극을 받았다.
지눌은 교학이 된 불어(佛語)가 어떻게 선(禪)인 불심과 계합하는가 하는 의문을 품고 보문사에서 『화엄경』을 탐독하였다. 그 뒤 이통현(李通玄)의 『화엄론(華嚴論)』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을 저술하여 화엄사상을 천명하였다. 지눌은 순수한 이론 중심의 교의문(敎義門)과 실천을 중심으로 하는 관행문(觀行門)이라는 화엄학의 2대 문 가운데 후자를 따랐다.
그러나 그의 관행문은 중국의 화엄사상가들과는 달리 일진성해(一眞性海)의 본체를 바로 반조하여 돈오(頓悟)하는 선문으로 회통시킨 특징이 있다. 일찍이 중국의 징관과 종밀은 선과 화엄을 융회하려 하였지만 화엄의 교의문에 서서 선을 바라보면서 그 공통점을 찾으려 하였고, 문익(文益)과 연수(延壽)는 선사로서 화엄교를 선적(禪的)으로 응용하였으나 화엄을 완전히 선문으로 흡수하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지눌은 선에 입각하여 화엄교지가 선과 상통한다는 점을 발견하였고, 특히 이통현의 『화엄론』을 중국의 화엄사상가와는 다른 원리로서 터득하였다. 그는 『화엄론』의 요지인 부동지불을 중생의 본원심지(本源心地)로 삼고, 그 부동지불에 대한 자각을 부처의 인지(因地)로 삼는다는 주안점을 명확히 파악하여, 본래 깨끗하고 물듦이 없는 일심의 근원에서 부동지불을 발견하는 것이 곧 선문의 돈오와 같다고 주창하였다.
나아가 자기의 몸과 말과 뜻의 경계가 여래의 몸과 말과 뜻의 경계임을 직관하여, 생각마다 보현행원(普賢行願)을 닦아 선재동자(善財童子)의 공행(功行)을 성취하는 것이 주초성불의(住初成佛義)임을 주장하였다.
지눌은 이론만으로 교를 논하거나 반조만 하면서 원행(願行:발원과 수행)을 닦지 않는 것을 모두 배척하였다. 지눌은 당시의 교계를 주도하던 화엄교지를 선에로 귀납시켜 원돈관행문(圓頓觀行門)을 설정한 것이다.
또, 종래의 선문에서 돈오견성(頓悟見性)하면 모든 수행을 끝마친 듯이 여겼던 지견지상주의(知見至上主義)를 지양하고, 그 돈오가 십신초위(十信初位)임을 자각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꾸준히 정혜력(定慧力)을 길러 십주초위(十住初位)에 들어가서 물러남이 없는 믿음을 성취하고 보현(普賢)의 광대한 원행을 실천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화엄을 선문으로 회통시키려 함이었고, 중국의 지견주의(知見主義) 선을 행원문으로 바꾸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지눌의 화엄사상으로 인해 선문과 화엄학은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후의 한국불교사상을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분기점이 되었다.
지눌의 뒤를 이은 혜심(慧諶)은 화엄사상을 기본으로 한 선교일치사상을 천명하고 있으나 지눌의 사상을 넘어설 만한 특기 사항은 없다. 충지(冲止)도 화엄과의 관계 속에서 몇 편의 선시(禪詩)만을 남겼을 뿐이다. 충렬왕 때의 혜영(惠永) 또한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의 사상을 천명하였으나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세우지는 못하였다.
고려 말 화엄사상의 천명에 새로운 전기를 맞게 한 승려로는 충숙왕과 충혜왕 때에 활동한 화엄종의 체원(體元)을 들 수 있다. 체원은 이제현(李齊賢)의 가형(家兄)이다. 그가 20세를 전후하여 출가하였을 당시의 화엄종단은 정치적인 배경을 잃고 사상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지 못한 채 기층사회 속에서 실천신앙을 강조하는 입장에 있었다.
따라서, 체원은 개경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해인사를 근거지로 하여 인근 법수사(法水寺) · 반룡사(盤龍寺) · 동천사(東泉寺)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경주지방의 지방토호 등과 유대를 맺으며 저작활동을 하였다. 그는 『백화도량발원문약해(白華道場發願文略解)』 · 『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華嚴經觀自在菩薩所說法門別行疏)』 · 『화엄경관음지식품(華嚴經觀音知識品)』 등과 『 삼십팔분공덕소경(三十八分功德疏經)』이라는 위경(僞經)의 발문을 남겼다.
이 저술들은 1330년 전후의 저작이며, 『화엄경』의 관음신앙과 전통적인 민간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저작된 순서별로 그의 입장은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별행소』는 40권 『화엄경』 중 관음보살의 법문을 통해서 관음신앙에 대한 이론적 바탕을 정리하는 한편, 영험과 신이(神異)를 통해서 실천신앙을 강조한 것이었다. 『약해』는 의상이 지은 『백화도량발원문』에서 신라화엄종의 관음신앙에 대한 예를 구하려 한 것이었다.
『지식품』은 지송용(持誦用)으로 저작한 것이며, 실천신앙을 현실 속에 정착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체원이 발문을 지은 『공덕소경』은 기층사회의 독자적인 형태의 전통적 민간신앙과 화엄종의 염불신앙을 결합시켜 영험과 공덕을 강조함으로써 기층사회의 실천신앙을 정착시키려 한 의도로 저작된 것이다.
당시 화엄종단의 주축이었던 체원의 이러한 노력은 실천신앙을 통해서 기층사회와 결합하고, 영험과 공덕을 강조함으로써 14세기 고려사회의 현실적 자각과 발원을 기대하였으며, 기층사회의 전통신앙과 화엄종의 실천신앙을 결합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4세기 이후의 화엄종은 전체 사회 속에서 이념적 기능을 담당할 수 없었고 한 단계 진전된 사상을 표방하는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실천신앙과 영험만을 강조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던 한계점을 보이기도 하였다.
고려 말 공민왕의 신임을 받은 우운(友雲)은 화엄교관에 통달하였고 연도(燕都)를 내왕한 화엄종사였다. 그의 제자 의침(義砧)은 판화엄종사(判華嚴宗事)를 역임하였으나 이들의 화엄사상은 자세히 전래되지 않고 있다. 고려의 화엄관계 찬술문헌은 〈표 3〉과 같다.
저자 | 문헌명 | 권수 | 현존여부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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均如 | 釋華嚴敎分記圖通鈔 | 10 | 存 | 敎分記釋 |
釋華嚴旨歸章圖通鈔 | 2 | 存 | ||
華嚴三寶章圖通記 | 2 | 存 | 三寶章記 | |
十句章圖通記 | 2 | 存 | 十句章記 | |
一乘法界圖圖通記 | 2 | 存 | 法界圖圓通記 | |
搜玄方軌記 | 10 | 失 | ||
孔目章記 | 8 | 失 | ||
五十要問答記 | 4 | 失 | ||
探玄記釋 | 28 | 失 | ||
入法界品抄記 | 1 | 失 | ||
赫連挺 | 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並序 | 1 | 存 | |
義天 | 圓宗文類 | 23 | 一部存 | 14·22권 |
知訥 | 華嚴論節要 | 3 | 存 | |
圓頓成佛論 | 1 | 存 | ||
李藏用 | 華嚴錐洞記(潤色) | 1 | 失 | |
體元 | 華嚴經觀自在菩薩所說法門別行疏 | 2 | 存 | |
華嚴經觀音知識品 | 1 | 一部存 | 後半部 | |
白華道場發願文略解 | 1 | 存 | ||
미상 | 法界圖記叢髓錄 | 4 | 存 | |
〈표 3〉고려시대 찬술 화엄사상관계저서 |
억불숭유라는 국가적 시책에 의하여 조선시대 태종 · 세종대에는 불교종파의 폐합이 강행되어 불교의 12종은 7종으로 줄었다가, 다시 선종과 교종의 양종만 남게 되었다. 이에 따라 화엄학도 이전의 한국불교사의 주종이었던 역사적 특성을 잃어버리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계속되는 쇠퇴의 길을 걷던 불교는 1549년(명종 4)부터 보우(普雨)의 노력에 힘입어 확장되기 시작하였고, 1551년 선교양과를 신설하여 선교양종을 중심으로 한 승과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때 선종은 『전등(傳燈)』과 『염송(拈頌)』에 의거하였고, 교종은 주로 화엄사상에 중점을 두었다. 이는 천태학을 중심으로 한 『법화경』 연구에 주력하였던 조선 초기의 불교학이 중기에 들어서면서 화엄학으로 전환하게 된 획기적인 일면이다.
이와 같은 조선시대의 화엄사상을 불러일으킨 인물은 보우로서, 그의 저서인 『나암잡저(懶菴雜著)』에서는 화엄의 삼원관설(三圓觀說) · 일정설(一正說) 등의 독특한 주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화엄학을 전문으로 강수한 사실이 없고, 화엄학에 직접 관련된 논저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조선불교의 태두는 휴정(休靜)이지만 그가 화엄사상을 특별히 천명한 바는 없다. 다만, 그의 수제자인 사명(泗溟)은 화엄의 교학을 높이 평가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화엄경발(華嚴經跋)』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화엄경의 돈교는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 그 실체는 본래 생긴 것이 아니므로 처음도 끝도 없으며, 그 작용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이루어지는 일도 무너지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모든 교의 근본이요 모든 법의 으뜸이다. · · · · · · 이것을 넓혀 충실히 하면 물건마다 모두 비로자나불의 진신이요, 이것을 믿어 행하면 걸음마다 모두 보현보살의 묘행(妙行)이다. 그리하여 이것을 듣는 사람은 부처를 이루고, 이것을 따라 기뻐하면 범부를 뛰어넘는다. 그러므로 그 재주가 천종(天縱)을 뛰어나고, 그 지혜가 생지(生智)를 넘어선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능히 바른 믿음을 내고 큰 서원을 세우며 이 뜻을 크게 펼 수 있을 것인가.”
이 글만 보면 사명이 화엄교가(華嚴敎家)가 아닌가 착각하리만큼 철저한 화엄사상의 신봉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명은 화엄사상을 중심으로 한 저술은 남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보다는 선수(善修)의 제자들 중에서 화엄학을 연구한 승려가 많았다. 특히, 『화엄경』을 전승한 사람으로는 각성(覺性)의 제자 수초(守初)가 있고, 수초의 제자 성총(性聰)이 있다.
한편, 의심(義諶)은 『화엄경』의 동이(同異)를 연구하고 음석(音釋)을 가하였으며, 같은 편양(鞭羊) 문하의 도안(道安)은 화엄종주라고 불릴 정도로 화엄을 설법하였다. 도안 문하의 지안(志安)은 1725년(영조 1)에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개설하였는데 그때 법회에 참가한 자는 모두 1,400명에 이르렀다.
정혜(定慧)는 화엄에 깊이 통달하였으며, 화엄을 강설하는 데 있어 당대의 독보적 존재였다고 한다. 이 때부터 조선불교는 선사상보다 화엄사상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도안 문하의 새봉(璽封)도 화엄강회를 선암사에서 베풀었는데 그때 모였던 1,207명의 회중 명단은 지금도 남아 있다.
조선 후기의 화엄종사로는 상언(尙彦)과 의소(義沼)와 유일(有一) 등이 있다. 상언은 체정(體淨)의 제자로서 33세에 용추사(龍湫寺)에서 강석(講席)을 열었다. 그는 오교삼승(五敎三乘)의 교학을 모두 통달하였지만 특히 화엄학에 정통하였다. 그는 강원의 주교재인 징관의 『화엄경소초(華嚴經疏鈔)』 가운데 소과(疏科)가 결여된 것을 찾아내어 도표로써 보완하였고, 인문(引文)이 잘못된 것을 하나하나 교정하였다.
또한, 징광사(澄光寺) 화엄경판본이 불타 없어졌을 때 대교수호(大敎守護)의 대원을 발하여 이를 다시 각판하여 봉안하는 등 평생을 화엄학의 연구와 홍포에 힘썼다. 그러나 그의 화엄학에 관한 논저가 남아 있지 않아 사상을 살펴볼 수는 없다. 그의 맥은 의소와 유일에게 전하여졌다.
의소는 상언의 맥을 전승하여 비슬산(琵瑟山) · 팔공산(八公山) · 계룡산(鷄龍山) · 불령산(佛靈山) 등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화엄을 강하며 행화(行化)하였다. 그의 제자는 100여 명이나 되었으며, 『화엄경사기(華嚴經私記)』를 남겼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엄종주 유일은 30여 년 동안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화엄학을 강설하였으며, 『화엄현담사기(華嚴玄談私記)』 2권과 『화엄유망기(華嚴遺忘記)』 5권을 저술하였는데, 이후의 화엄학 강사들은 모두가 그의 『화엄현담기』를 지침서로 삼았다.
이 『화엄현담기』는 당시 우리 나라 불교강원에서 주교재로 사용하던 『화엄경소초』 중 해석상 의견을 달리하였거나 오류를 보인 부분에 대하여 선교융합의 태도를 취하면서 교의적인 면과 본분적인 면을 종합하여 가장 요령 있게 해석하고 정리한 것이다.
현대 화엄사상가로는 탄허(呑虛)를 꼽을 수 있는데, 그는 이통현(李通玄)의 『화엄론절요』에 대한 우리말 번역과 주소를 출판하였다. 유일 이후 조선의 승려들은 거의 대부분이 화엄과 염불과 선을 함께 체득하는 독특한 사상체계를 보이고 있는데, 이와 같은 경향은 고려시대 지눌의 화엄사상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화엄사상관계 찬술문헌을 보면 〈표 4〉와 같다.
저자 | 문헌명 | 권수 | 현존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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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岺 | 華嚴一乘法界圖註 | 1 | 存 |
性聰 | 華嚴經持驗記 | 3 | 存 |
定慧 | 華嚴經疏隱科 | 未詳 | 失(?) |
尙彦 | 淸涼鈔摘抉隱科 | 1 | 存(?) |
鉤玄記 | 1 | 存(?) | |
最訥 | 華嚴科圖 | 1 | 失(?) |
華嚴品目 | 1 | 存 | |
華嚴品目會要 | 34면 | 存 | |
有一 | 華嚴玄談私記 | 2 | 存 |
玄談畫足 | 1책 | 存 | |
華嚴解題玄談 | 1책 | 存 | |
華嚴玄談重玄記 | 存 | ||
重玄記 | 30 | 存 | |
(零落本) | |||
玄談遺忘記 | 1책 | 存 | |
華嚴疏抄遺忘記 | 1책 | 存 | |
華嚴遺忘記 | 5 | 存 | |
有聞 | 法性偈科註 | 1 | 存 |
義沾 | 三寶私記 | 1 | 存 |
三寶記 | 1 | 存 | |
十地記 | 1 | 存 | |
雜華柄 | 1 | 存 | |
華嚴經私記 | 1 | 存 | |
華嚴記 | 1 | 存 | |
華嚴柄鉢 | 2 | 存 | |
會玄記 | 1 | 存 | |
天旿 | 華嚴法華略纂摠持 | 1 | 存 |
李長者 | 大方廣佛華嚴經禮懺文 | 1 | 存 |
鼎奭 | 華嚴大禮文 | 1 | 存 |
未 詳 | 光明記 | 3 | 存 |
大寶鏡 | 1 | 存 | |
玄談重玄記 | 1 | 存 | |
〈표 4〉 조선시대 찬술 화엄사상관계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