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사 ()

불교
유적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산(母岳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 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이칭
이칭
국신사(國信寺), 국신사(國神寺), 구순사(狗脣寺), 귀신사(鬼神寺)
유적/건물
건립 시기
676년
소재지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6길 40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귀신사는 전라북도 김제시 모악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 시 명칭은 국신사(國信寺)로 화엄십찰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귀신사로 개명된 시기와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9세기 초에 귀신사로 불렸다. 고려시대에 원명국사가 중창하여 고려 말까지 번성하였다. 15세기 중후반에는 폐쇄되었으나 16세기 중반 사세를 회복하였고,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으나 17세기에 중창하였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대적광전과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전라북도 유형문화재인 삼층석탑, 승탑, 석수(石獸) 등의 문화재가 있다.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산(母岳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 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건립경위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금산사(金山寺)의 말사(末寺)이다. 1998년 귀신사의 주지를 역임한 범현스님에 의해 종합적으로 정리된 바 있고, 2003년과 2005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문화재청에서 정밀 실측 조사와 해체 보수 조사를 하면서 사찰 건축이 파악되었다.

귀신사의 연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가장 이른 것은 최치원의 「법장화상전」이며, 조선시대의 상황을 전하는 자료로 1633년에 작성된 「낙성문」, 자수무경(子秀無竟)의 「전주무악산귀신사사적사인(全州毋岳山歸信寺事蹟詞引)」, 1823년 중수 후 작성된 「귀신사중수기(歸信寺重修記)」 등이 있다.

최치원의 「법장화상전」에서 화엄십찰의 하나로 언급한 ‘전주 모악산 국신사(國信寺)’가 귀신사의 옛 이름으로, 676년(문무왕 16)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국신사(國神寺)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또 다른 설은 599년(법왕 1) 왕실의 자복 사찰(資福寺刹)로 창건되었다는 것인데, 「전주무악산귀신사사적사인」에 백제 왕실의 원당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다만 599년설은 『금산사지』에 ‘금산사가 백제 법왕 원년 왕의 자복 사찰로 개창되었다’라는 내용이 착종(錯綜)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명칭인 귀신사로 개명된 시기와 이유는 분명치 않다. 다만 신라 하대 고승 철감선사 도윤(道允, 798~868)이 귀신사에서 출가했다는 기록이 있고, 2002년 전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할 당시 “귀신사(鬼神寺)”라고 새겨진 명문(明文)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9세기 초에는 귀신사로 알려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변천

고려시대 왕자였던 국사 원명(圓明, 10901141)이 주지를 역임하며 중창하였고, 그 제자 국사 현오(玄悟, 11271179)도 주지가 되어 사세를 이어갔다.

『고려사』에 따르면 1376년(우왕 2)에 ‘왜구 300여 기(騎)가 전주를 함락한 후 이 절에 주둔하였는데 병마사 유실(柳實)이 격퇴하였다’고 하여 당시에는 대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들어서 김시습(1435~1493)이 탑이 무너지고 비석이 부서져 있는 폐허가 된 귀신사를 보고 지은 「귀신사허(歸信寺墟)」라는 시가 있어 15세기 중후반에 사찰이 폐쇄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1553년(명종 8)과 1561년(명종 16) 기록에 귀신사 이름이 보여 16세기에 다시 재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임진왜란의 전화(戰火)로 폐허가 된 것을 덕기(德奇)가 1624년에서 1633년까지 중창하였다. 「전주무악산귀신사사적사인」에서 이때 “옛 터를 옮겨 다시 새 터에 복거하였다”고 하며 “ 선조의 5남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의 명으로 중창되었다”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1609년에 이 절에서 간행한 『법화경(法華經)』이 전하고 있어 17세기 전반에 대대적인 중창 불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715년에는 팔상전(八相殿)이 건립되었고, 1823년에 대적광전(大寂光殿)을 수리했는데 2층이었던 법당이 단층으로 축소되어 이 무렵 사찰의 기운이 기울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1873년(고종 10)에 춘봉(春峯)이 중창한 뒤 구신사(狗脣寺)였던 사찰 이름을 귀신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1943년에 작성한 「김제군 금산면 귀신사 인계목록」에는 대적광전, 명부전, 나한전, 요사(寮舍) 등의 건물만 남아 있었고 해방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1990년대 들어 사찰의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한 불사가 계속되었다.

현황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보물로 지정된 김제 귀신사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 산신각 · 요사채 등이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보물인 김제 귀신사 소조 비로자나삼불 좌상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귀신사 석탑, 귀신사 부도, 귀신사 석수 및 영산전 소조 석가삼존상과 나한상, 명부전 소조 지장보살 좌상과 시왕상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귀신사 석탑은 귀신사의 창건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선이 정밀하고 옥개석(屋蓋石)의 곡선이 거의 평행을 이루면서도 신라시대의 미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빼어난 작품이다.

승탑은 청도원 마을 입구의 논 가운데 있는데, 전성기에는 이 부도가 있는 곳까지가 절의 경내였음을 알 수 있다. 석탑과 통일된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다. 또 석수(石獸)는 다른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앉아 있는 석수의 등 위에 남근(男根) 같은 석주(石柱)가 꽂혀 있다. 이 석수가 백제 왕실의 복을 구하는 자복(資福)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유물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민간신앙의 남근 숭배 사상이 불교와 융합되어 형상화된 것으로 추정되며, 석수와 석주가 조화롭지 못해 현재 상태가 원형이 아닐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의의

귀신사는 신라 중앙의 입장을 대변하는 화엄 십찰(華嚴十刹) 중 하나인 국신사로 출발하여 고려시대에 왕자였던 원명 국사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인조의 아버지였던 원종의 명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전하는 등 왕실 및 중앙과의 관련성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17세기 이후 중창을 거듭하여 조선 후기 사찰 건축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원전

자수무경(子秀無竟), 「전주무악산귀신사사적사인(全州毋岳山歸信寺事蹟詞引)」(『無竟集』 卷之二)
최치원,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단행본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상』(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범현 편저, 『천삼백년 고찰 호남의 화엄성지 귀신사』 (김제 귀신사 불서간행위원회, 1998)
손신영, 「귀신사의 역사적 추이와 건축조형」 (『한국불교사연구』 17, 한국불교사학회, 2020)
정병삼, 「8세기 화엄교학과 화엄사찰」 (『한국사상과 문화』 62, 한국사상문화학회, 2012)
『김제 귀신사』 (전북대학교박물관·김제시, 전주, 2002)
『한국의 고건축 : 귀신사 대적광전』 (국립문화재연구소, 2003).
집필자
박미선(명지대)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