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이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을 현창하기 위해 893년(진성여왕 7) 무렵에 찬술한 비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924년(경애왕 1)에 세워진 것으로,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봉암사 경내에 있다.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의 하나로서 선의 전래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개창에 관한 기록이 많다.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1월 4일 국보로 승격되었다.
도헌이 882년(헌강왕 8)에 봉암사에서 입적하자 왕은 ‘지증(智證)’이라는 시호와 ‘적조(寂照)’라는 탑명을 내리고 당에서 귀국한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비문에 적힌 최치원의 관직명으로 보아 893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뒤 30년이 지난 924년에 분황사 승려 혜강(慧江)이 비문을 쓰고 이를 새겨 건립하였다.
지증대사 도헌은 속성이 김씨이며 경주사람이다. 처음에 화엄종의 범체(梵體)에게 득도하였고, 혜은(慧隱)에게서 선지(禪旨)를 배웠다. 후에 희양산에 봉암사를 짓고, 구산선문 중 희양산문을 개창하였다.
최치원이 지은 본 비문에는 통일신라시대 불교계의 상황을 전하는 귀중한 기록을 담고 있다. 우선 비문에는 “(도헌의) 법의 계보를 보면, 당의 제4조 도신(道信, 580∼651)을 오대 스승으로 하여 점차 동쪽의 이 땅에 법을 전하여 왔는데, 법맥을 위로 따져보면 쌍봉의 제자는 법랑, 손제자는 신행, 증손제자는 준범, 현손제자는 혜은, 내손제자가 대사이다.[法胤唐四祖爲五世父 東漸于海 遡游數之 雙峰子法朗 孫愼行 曾孫遵範 玄孫慧隱 來孫大師也]”라고 전하고 있다. 이 기록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선을 전래한 사람은 7∼8세기경 법랑(法朗)으로서, 제4조 도신(혹은 쌍봉(雙峯)이라고도 함)의 법을 전했다고 한다.
다음에는 한국 조계종의 개조로 일컬어지는 도의(道義)가 남종선(南宗禪)을 전한 과정도 기록되어 있는데, “장경(821∼824) 초기 도의가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가서 서당지장의 심오한 법력을 보고 지혜의 광명을 지장선사에게 배워 돌아왔으니, (선종의) 현묘한 뜻을 최초로 말한 사람이다.[洎長慶初 有僧道義 西泛睹西堂之奧 智光侔智藏而還 智始語玄契者]”라고 되어있다. 도의는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迦智山門)의 개조로서, 784년에 입당하여 남종의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의 법을 배운 후 821년에 귀국하였다. 이에 의해 우리나라에 남종이 처음으로 전해졌는데, 이 기록은 그것을 서술한 것이다.
한편 또 다른 기록에 “혹 중국에서 득도하고는 돌아오지 않거나 득도한 뒤 돌아오기도 했는데, 그중 거두가 된 사람은 손꼽아 셀만하다. 중국에 귀화한 사람으로는 정중사의 무상과 상산사의 혜각이 있는데, 익주의 김화상과 진주의 김이라는 사람이 이들이다. 고국에 돌아온 사람은 앞에서 말한 북산의 도의와 남악의 홍척, 그리고 조금 뒤에는 대안사의 혜철, 혜목산의 현욱 … (중략) … 굴산사의 범일, 양조국사인 성주사의 무염 등이 있다.[或劍化延津 或珠還合浦 爲巨擘者 可屈指焉 西化則靜衆無相常山慧覺 禪譜益州金鎭州金者是 東歸則前所敍 北山義南岳陟 而降大安徹國師慧目育 … (중략) … 孤山日兩朝國師聖住染]”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활약하다 사망한 정중무상(淨衆無相, 684∼762)과 귀국 후에 구산선문을 개창한 승려들에 대한 기록이다. 홍척(洪陟)은 실상산문(實相山門)의 개조이며, 혜철(慧徹, 785∼861)은 동리산문(桐裡山門), 현욱(玄昱, 787∼868)은 봉림산문(鳳林山門), 범일(梵日, 810∼889)은 사굴산문(闍崛山門), 무염(無染, 800∼888)은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조이다.
비석의 크기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 등이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비신은 청석(靑石)으로 귀부(龜趺)·이수(螭首) 및 비좌(碑座)의 조각이 뛰어나다. 글씨는 자경 2㎝ 크기의 행서로 왕희지(王羲之) 글씨의 영향을 받고 있으나 꾸밈없는 필획은 일가를 이룬 글씨이다.
본 비문은 사산비명 중의 하나로서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선 전래 초기의 상황을 전하는 거의 유일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본 비문을 통해서 비로소 법랑에 의해서 최초로 우리나라에 선이 전래되었음이 알려졌으며, 구산선문을 개창한 조사들의 면목이 드러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