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일은 824년(헌덕왕 16)에 머리를 깎고 수행을 하다가 829년(흥덕왕 4) 20세에 경주로 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후 경주에서 활동하던 범일은 태화 연간(827~835)에 당나라로 가던 신라 왕자와 함께 뱃길로 당으로 갔다. 이때 입당사(入唐使)였던 신라 왕자는 김의종(金義琮)으로 보기도 하고 김능유(金能儒)로 보기도 한다. 당으로 간 범일은 중국에 머물며 염관 제안(鹽官齊安)의 문하에서 6년 동안 수행하며 깨달음을 얻었다. 837년(희강왕 2)에는 약산 유엄(藥山惟儼)에게로 가 8년 동안 선을 배우고 인가(印可)를 받았다. 844년 당 무종(武宗)의 회창폐불(會昌廢佛)로 상산(商山)의 산에서 반년 가량을 숨어 지내다가 소주(韶州)에서 6조 혜능(慧能)의 탑에 참배하였고 847년(문성왕 9)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범일은 3년 정도 경주에 머물며 문성왕의 귀의(歸依)를 받았다. 이후 경주를 떠나 백달산(白達山)에서 정진하던 중 851년(문성왕 13) 명주 도독 김공(金公)의 청으로 명주 굴산사(崛山寺)에 주석하며 산문을 개창하였다.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이 차례로 범일을 국사(國師)로 받들며 경주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그는 이를 모두 사양하였다. 낙산사(洛山寺)에 전각을 짓고 돌로 만든 정취보살상(正趣菩薩像)을 봉안(奉安)하기도 하였다. 범일은 굴산사에서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경보(慶甫)가 당나라에 유학을 가기 전 굴산사로 범일을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 범일은 개청(開淸), 행적(行寂), 신의(信義) 등 ‘십성제자(十聖弟子)’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범일은 굴산사에 주석한 뒤 889년(진성여왕 3) 입적할 때까지 40여 년 동안 신라 왕실 및 경주의 귀족들과는 거리를 두었고, 전법(傳法)과 문도(門徒)를 양성하는 데 힘썼다. 범일과 사굴산문(闍崛山門)의 영향력은 명주뿐만 아니라 강원도 일대로까지 확산되었다.
고려 후기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는 범일이 선(禪)과 교(敎)의 뜻을 물은 진성여왕에게 대답하였다고 하는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이 수록되어 있다. 진귀조사설은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샛별을 보고 도를 깨우친 뒤 진귀조사에게서 선을 배웠다는 내용인데, 이는 신라 특유의 선 사상으로 알려져 있다. 교에 대한 선의 우위를 주장하는 진귀조사설이 범일의 사상인지 혹은 후대에 범일에게 가탁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범일은 입적 후 통효대사라는 시호와 연휘지탑(延徽之塔)이라는 탑명을 받았으며, 왕명으로 굴산사에 비석과 승탑이 세워졌다. 따라서 현재의 굴산사지에 있는 승탑을 범일의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당시의 비석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굴산사지에서 비석의 비편이 발견되었다. 또한 신라 말의 문신이자 학자인 박인범(朴仁範)이 지은 「범일국사영찬(梵日國師影讚)」이 전하고 있어 범일이 입적한 후 그의 진영(眞影)을 굴산사에 봉안했음을 알 수 있다. 범일과 동시대를 살았던 최치원이 「지증대사비문(智證大師碑文)」에서 ‘덕이 두터워 중생들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도가 높아 왕의 스승이 될 만한’ 선승들을 꼽으며 여기에 범일을 넣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 말 범일은 신라 사회에서 명성 높은 선승이었다.
범일이 입적한 이후 민간에서는 범일과 관련된 설화가 등장하였다. 특히 신비롭게 윤색된 범일의 탄생과 활동이 전승되면서 범일은 신승(神僧)으로 인식되었다. 18세기 후반이 지나면서 범일은 신으로 추숭되어 강릉 성황사에 그의 위패가 봉안되었다. 범일에 대한 추숭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대관령 산신을 맞이하는 강릉단오제에서 그는 대관령국사성황신(大關嶺國師城隍神)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강릉단오제의 주신(主神)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