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7년(문성왕 9)에 범일(梵日)이 창건하고 전교(傳敎)한 사찰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범일이 당나라에 유학하였을 때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서 왼쪽 귀가 떨어진 승려를 만났는데, 그는 신라 사람으로 집이 명주계(溟州界) 익령현(翼嶺縣: 지금의 강원도 양양군)의 덕기방(德耆房)에 있다고 밝히고, 뒷날 범일이 본국에 돌아가거든 자신의 집을 지어 줄 것을 간청하였다. 847년에 귀국한 범일은 그 승려의 청에 따라 그의 고향이라 일러준 곳에 굴산사를 창건하고 가르침을 전했다고 한다.
창건 이래 이 절은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사굴산파의 본산으로 발전하였으며, 전성기에는 사찰 당우의 반경이 300m에 이르렀고, 승려 수도 200여 명이었으며, 쌀 씻은 뜨물이 동해까지 흘렀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절의 역사 및 폐사 연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1936년 홍수로 6개의 주춧돌이 노출되었고, 이때 정주교(鄭胄敎)가 ‘闍掘山寺(사굴산사)’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를 발견함으로써 이 절이 굴산사였음이 밝혀졌다.
문화유산으로는 범일의 것으로 믿어지는 강릉 굴산사지 승탑(보물, 1963년 지정),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보물, 1963년 지정), 석불 3위 등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김극기(金克己)의 「굴산종시(掘山鐘詩)」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신라종이 안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부도는 일제강점기에 도굴꾼에 의해 붕괴되었는데, 당시 이를 조사하기 위하여 조선고적보존위원회가 기단석을 들추어보았더니, 기단석 아래 구형의 지하석실이 있고 오백나한을 안치한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간지주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불 3위는 이 당간지주를 중심으로 서 · 남 · 북 각 500m 지점에 있었다. 서쪽과 북쪽의 석불은 1968년에 불당을 짓고 함께 봉안하였으며, 높이 1.5m의 동남쪽 비로자나불좌상은 얼굴이 파손된 채 머리에는 큰 관모를 쓰고 있다. 이밖에도 절 주위에는 범일의 탄생에 얽힌 설화를 간직한 학바위〔鶴巖〕와 석천(石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