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비는 승려의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행적을 기록한 비이다.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하는 부도와 함께 조성된다. 불교가 융성하던 통일신라나 고려 시대에는 고승이 사망하면 국왕이 탑명을 내렸다. 그리고 문신과 명필에게 비문을 짓고 쓰게 해 탑비를 세우는 사례가 빈번했다. 경상도 하동의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 이런 국가적 차원의 조성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부도와 탑비의 조성에 대한 전통은 지속되었다. 탑비는 고승의 학통과 당시 불교계의 여러 가지 상황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불문(佛門)에서는 승려의 시신을 화장하고 남은 사리(舍利), 즉 유골(遺骨)을 돌로 만든 묘탑(墓塔)에 안치하는데, 이를 부도(浮屠) 또는 승탑(僧塔)이라 부른다. 탑비는 이러한 부도와 함께 조성되는 것으로 승려의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는 일생의 행적을 적은 것이다. 불교가 융성했던 통일신라 · 고려시대에는 역대 국왕이 고승(高僧)들을 존경하여 그들이 사망하면 장사를 후하게 치르고, 아울러 시호(諡號)와 탑명(塔名)을 내리면서 당시를 대표하는 문신과 명필에게 비문을 짓고 쓰게 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이처럼 부도와 탑비를 함께 조성하는 사례는 특히 신라 하대로부터 각 선문(禪門)을 개창하거나 그 계보를 이은 고승에 대한 숭앙심이 높아지면서 널리 유행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이러한 관례는 지속되었는데, 그 수량이나 제작 수준은 우리나라 석비의 역사에 있어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이전과 같이 국왕이 탑명을 내리는 국가적 차원의 조성은 매우 드물었지만, 부도와 탑비의 조성에 대한 전통은 꾸준히 지속되었다.
통일신라시대 고승의 탑비 가운데 연대가 올라가는 예로 경주의 고선사서당화상비(800∼808년경)와 진주의 단속사신행선사비(813년) 등이 유명한데, 비문에 탑명이 명시되지 않았지만 이후에 조성된 탑비와 같은 의미에서 조성된 것들이다. 이후 9세기 중반을 넘어서면 탑명을 지닌 부도와 이를 명시한 탑비가 한 벌로 조성되기 시작했는데, 전라도 화순의 쌍봉사철감선사징소탑비(868년경)와 장흥의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884년), 경상도 하동의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887년)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탑비에는 일반 역사책에서 보기 어려운 고승의 일생이 기술되어 있다. 즉 출생으로부터 불문에 들어가 활동하고 사망하기까지 일생의 행력(行歷)이 적혀 있으며, 뒤쪽에는 탑비 조성에 참여한 제자와 문도(門徒)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따라서 탑비는 고승의 학통(學統)이라든지 그를 둘러싼 당시 불교계의 여러 가지 상황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된다. 또 탑비는 당대 최고 수준의 문장과 글씨로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문학사 · 서예사 사료로서도 귀중하다. 특히 금석문 이외의 필적이 드문 통일신라 · 고려시대에 있어 탑비는 서예사 서술에 있어 매우 소중하다.
탑비에 새겨진 글씨체는 일반 석비의 경우와 같이 정자체인 해서(楷書)가 주로 사용되는데, 신라하대 이후 계속해서 조성되었기 때문에 각 시기마다 해서풍의 변화과정을 살필 수 있다. 이외에 행서를 사용하기도 하며 옛 명서가들의 필적을 모아 새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당(唐) 태종(太宗)의 필적으로 집자한 흥법사진공대사비(940년), 통일신라 김생(金生)의 필적으로 집자한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954년), 동진(東晉) 왕희지(王羲之)의 필적으로 집자한 인각사보각국사정조탑비(1295년) 등이 그것이다.
또한 탑비는 석조미술품으로서의 가치도 높다. 그 기본형식은 일반 석비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세부의 장엄에 있어서는 뛰어난 수준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고려중기의 탑비는 제작기술 상의 완성도와 조각기법 상의 화려한 극치를 보여주는데, 원주의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1085년)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일반적으로 탑비는 부도와 함께 조성되거나 부도가 세워진 뒤 몇 년 안에 건립되므로 대부분 조성연대를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탑비에 나타난 양식적 특징은 다른 석조미술품의 양식을 고찰하는 데 기준자료로서의 역할도 한다.
한편 탑비의 일종으로 석종비(石鐘碑)라는 것이 있다. 석종은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일반 부도와 달리 몸체를 범종(梵鐘) 모양으로 만든 사리탑을 말한다. 이 석종형 부도는 고려말에 출현하여 이후 조선시대에 널리 유행되었던 것으로 이전의 부도와 의미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따라서 석종비도 탑비의 한 가지이다. 초기의 예로 묘향산의 안심사지공나옹사리석종비(1379년), 여주의 신륵사보제존자사리석종비(1379년), 양평의 사나사원증국사사리석종비(1386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