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약 2.42m. 화강암의 부도는 절 밖 도로변에 있고 탑비는 경내에 있는데, 모두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의 부도와 탑이다.
본래 이 부도와 비는 사역(寺域)으로부터 약 1㎞거리의 마을 뒷산에 위치하는 이른바 부도골[浮屠谷]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곳에는 민묘(民墓)가 설치되어 있으나, 원래 한말에 일인의 사리 절취로 인하여 부도가 무너졌다고 전한다. 부도는 그 뒤 1962년 면사무소에서 이전하였다.
부도는 자연석으로 된 지대석(地臺石) 위에 8각의 하대석(下臺石)을 놓았는데, 상면은 급한 경사를 이루었고, 그 중앙에는 8각의 낮은 굄을 나타냈으며, 이 굄과 연이어서 작은 연화(蓮花)를 조각하였다. 그 위의 중석 역시 8각이며, 각 면에는 넓은 구획을 마련하고 그 내부에 동물상을 조각하였으나 뚜렷하지 않다.
상대석 역시 8각이지만 원형에 가깝고, 그 밑에서부터 단조롭고 소박한 연화문을 선각으로 나타냈다. 8각의 탑신 전면 광곽(框郭)내에 ‘보각국사정조지탑(普覺國師靜照之塔)’이라는 자경 6㎝의 해서로 탑명을 새겼다.
후면에는 문비(門扉)가 새겨졌으며, 나머지 6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과 연화좌 위의 보살입상을 돋을새김하였다. 사리공은 탑신 상면에 마련되었고, 8각 옥개석(屋蓋石) 밑에는 낮은 받침이 있으며, 두꺼운 추녀 밑은 전각(轉角)에 이르러 위로 느리게 반전(反轉)되었다.
낙수면(落水面)은 급한 편이며, 여덟 가닥의 우동(隅棟: 옥개석의 귀마루)이 내려온 끝부분에 단조로운 귀꽃을 조각하였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보개(寶蓋)가 있고, 그 위에 앙련(仰蓮)과 화염문(火焰文)을 새긴 보주(寶珠)가 1석으로 마련되었다. 부도의 형식은 팔각원당(八角圓堂)의 기본형식을 취하였으나, 조각수법과 함께 형태가 둔중하다.
현존하는 보각국사비는 점판암(粘板岩)의 석재로 손상이 심하다. 비신의 높이는 1.8m, 너비 1.06m, 자경 약 1.8㎝로 행서이다. 자체는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집자하여 새겼다. 글자는 비신의 전면에 150여 자가 남았고, 비음(碑陰: 비의 뒷면)에는 100여 자가 현존한다.
비문은 월정사 소장의 사본에 의하여 이미 알려져 있었으나 근래 탁본의 전문이 발견되었다. 비문에 의하여 비를 세운 시기는 1295년(충렬왕 21)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부도의 건립 역시 그가 입적한 해인 1289년에서 1295년 사이로 짐작된다. 이같은 시기는 부도 자체의 양식과도 부합되는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