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 ()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위에서 내려본 모습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위에서 내려본 모습
조각
개념
용의 형상을 조각하여 수호의 의미를 갖도록 한 비신의 머릿돌. 이(螭) · 이룡(螭龍).
이칭
이칭
이(螭), 이룡(螭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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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이수는 용의 형상을 조각하여 수호의 의미를 갖도록 한 비신의 머릿돌이다. 이수라는 용어는 중국, 한국 등 한자 문화권에서 오늘날까지 쓰고 있다. 이수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인 귀부와 함께 비신 상부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이다. 한국의 이수는 뿔이 달린 용으로 많이 조각되었다. 용의 머리는 대부분 옆이나 위를 향하여 승천하는 모습을 표현한다.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에는 이수가 대부분 비신과 다른 돌로 마련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같은 돌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비신 상부에 이수를 갖춘 것은 비의 품격을 높이고 장엄하게 보이게 한다.

정의
용의 형상을 조각하여 수호의 의미를 갖도록 한 비신의 머릿돌. 이(螭) · 이룡(螭龍).
개설

비(碑)는 다양한 기능과 성격을 가지고 여러 가지 재료로 세워졌다. 석비(石碑)는 처음에는 돌로 비신만 세우는 단조로운 형태에서 기술의 발전과 미적 감각의 진보에 따라 추가로 받침대를 마련하고, 그 위에 글자를 새긴 비신을 올리고, 비신 상부도 장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비신의 받침대에는 귀부(龜趺)가 마련되고, 비신 상부에는 이수(螭首)가 조각되었다.

이수라는 용어는 중국에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하여 한국이나 일본 등 한자 문화권에서 오늘날까지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석비가 많이 건립된 동아시아에서 비신의 꼭대기에 표현된 용을 이수라고 관용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석비의 받침부인 귀부와 함께 이수는 비신의 상부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가 되었다.

특히 석비의 머릿돌에는 머리가 비상(飛翔)하는 듯하고 비늘이 표현된 몸체가 구불구불 감겨 꿈틀거리는 모습으로 조각된 이(螭)가 주요 형상으로 등장하였다. 그래서 비신의 머릿돌인 비수(碑首)에 새긴 이라는 의미에서 이수라고 하였다. 이는 석비의 위상과 품격을 높이고, 비신에 새겨진 비문(碑文)의 의미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연원 및 변천

용(龍)은 세계 고대 문명의 발상지에서 오래전부터 신화나 전설의 소재로 등장한 이후 오늘날까지 신성시되고 있는 대표적인 상상의 동물이다. 용은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청동으로 제작한 동기(銅器), 소리를 내는 동종(銅鍾), 궁궐의 장식물과 인장(印章), 돌로 제작된 묘지(墓誌)와 비(碑)의 머릿돌 등 다양한 조형물에 표현되었다.

이(螭)는 중국에서 서주(西周) 후기 무렵부터 다리와 뿔이 없이 작고 긴 몸체를 가진 모습으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동양의 고전인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와 『산해경(山海經)』 등에 의하면, 뿔이 없는 용 또는 호랑이 형태를 하고 비늘을 가진 용을 이룡(螭龍)이라 하였다. 또한 『박물도록(博物圖錄)』에도 이룡은 뿔이 없으며 만물에 해를 끼친다고도 묘사되었다.

석비는 중국 전국시대부터 건립되는데 후한(後漢) 이후 묘비(墓碑)가 성행하면서 여러 형태가 출현하였다. 비신 상부는 반원형 · 삼각형 · 규형(圭形) 등 다양한 형태로 다듬어지고, 표면에 이를 새기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사각형 비좌(碑座) 또는 귀부가 마련된 받침부, 판석형(板石形)으로 넓은 면을 마련하여 글자를 새긴 비신, 이를 새긴 머릿돌 등 3개체가 하나의 조형물로 구비된 전형적인 석비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이어 남북조시대에 들어와 받침부인 귀부와 함께 전형적인 표현 기법으로 조각된 이수가 석비의 주요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양나라 때 건립된 소담묘비(蕭憺墓碑), 소수묘비(蕭秀墓碑, 518년), 소굉묘비(蕭宏墓碑, 526년), 소순묘비(蕭順墓碑, 소순은 양나라 문제) 등을 들 수 있다. 이 석비들은 귀부를 마련하고 비신과 같은 돌로 조각된 이수를 머릿돌로 구비하였다. 이후 이수는 당나라 때 더욱 발전하여 큰 변화 없이 송 · 원 · 명 · 청 대까지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다.

내용

석비에서 이수는 본래의 이룡(螭龍) 모습과 함께, 아직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땅 위에서 구불구불 감겨진 형상으로 몸체가 표현되는 반룡(蟠龍)의 모습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한국의 이수는 뿔이 달린 용으로 많이 표현되는 특징을 보이며, 용의 머리가 아래를 향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옆이나 위를 향하도록 조각하여 승천하는 용의 모습으로 많이 표현되었다. 그리고 여러 마리의 용이 뒤엉키며 한가운데나 꼭대기에 배치된 여의보주(如意寶珠)를 입이나 발로 받치는 형상으로도 표현되었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이수가 대부분 비신과 다른 돌로 마련되는데, 조선시대에는 같은 돌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에는 이수를 대신하여 목조 지붕 형태의 개석(蓋石)이 올려지기도 하였다.

한국은 초기에는 자연석을 그대로 활용하거나 어느 정도 다듬고 표면에 글자를 새긴 석비를 세우다가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중국의 영향을 받아 귀부와 이수가 마련된 석비를 건립하기 시작하였다. 백제 멸망 직후에 건립된 부여의 당(唐) 유인원기공비(劉仁願紀功碑)와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가 가장 이른 예이다. 이들 중 어느 석비가 먼저 건립되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660년대 초반경에는 이수가 석비의 중요 구성물로 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초기에 제작된 이수는 아래로 향한 모습의 용의 머리가 측면에 표현되어 있다.

그 후 이수는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승려들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의 주요 양식으로 정착되었는데, 이때는 구름 속에서 여러 마리의 용이 다양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역동적인 모습이 조각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묘비와 신도비(神道碑) 등 다양한 기능과 성격으로 건립된 석비에 이수가 표현되었다. 조선시대의 이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구름 속의 용이 표현되었는데, 용의 머리가 아래로 향하는 경우도 있고, 서로 마주보고 여의보주를 받친 형상을 취하기도 한다.

의의와 평가

비신 상부에 용의 형상을 조각한 이수를 갖춘 것은 비의 품격을 높이고 장엄하게 보이게 한다. 그리고 특정한 사실을 담고 있는 비신이 이룡의 수호로 파손되지 않고 오래도록 후대에 계승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또한 시대와 지역별로 이수의 조각 기법이 달라 석비 양식의 변천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용, 그 신화와 문화: 한국편』(서영대·송화섭 엮음, 민속원, 2002)
『용봉문화원류』(王大有 지음, 임동석 옮김, 동문선, 1994)
「신라 석조 부도의 표면 장엄과 조형 의의」(엄기표, 『사학지』 33, 2000)
「신라 탑비의 양식과 조형적 의의」(엄기표, 『문화사학』 14, 2000)
「통일신라의 귀부와 이수」(이호관, 『고고미술』 154·155, 1982)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귀부와 이수에 나타난 조형미 연구」(한진섭,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1)
「여초 비신 측면과 쌍룡 고조(高彫)에 대하여」(강인구, 『고고미술』 106·107,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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