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의 잔등에 장방형의 비좌(碑座)를 마련하고 그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는 일은 중국 당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그뒤 전시대를 통하여 성행하였는데, 그것은 거북이 만년을 산다는 장수의 상징으로서 비의 영원성을 표현하는 데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의 석비는 대체로 비좌 없이 그대로 땅에 묻어 세우거나, 혹 비좌가 있다 하더라도 자연석을 비좌로 삼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이후 당나라 석비의 영향을 받아 귀부를 비좌로 삼게 되어 그 뒤로 이러한 형태는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석비의 전형적인 형식이 되었다.
현존하는 귀부 중 가장 오래된 것은 661년에 세워진 경주 태종무열왕릉비(국보, 1962년 지정)의 귀부로서, 목을 앞으로 쭉 뻗고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다문 거북의 모습이 사실적이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수법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러한 생기있고 박력있는 거북의 모습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김인문묘(金仁問墓) 앞의 귀부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8세기에 이르면 창림사지(昌林寺址) 귀부에서와 같이 거북의 머리는 점차 용머리의 형상으로 변하게 되며, 9세기 이후에는 거의 모두가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변하고, 귀부의 표현도 사실적인 형태에서 차차 위엄있고 추상적인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하여 귀부는 완전히 용의 머리에 거북의 몸을 한 형태로 변하며,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장식적으로 되었으나, 12세기경에 이르면 갑자기 귀부형태의 비석받침돌이 대석(臺石) 형태로 바뀌면서 차차 귀부는 사라지게 된다.
그 뒤 조선시대에도 일부 귀부가 나타나기도 하나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그 양식도 통일신라시대를 답습하고 있지만 훨씬 퇴화하고 도식화되었다. 비문(碑文)에 의하여 조성연대를 알 수 있어 조성 당시의 조각양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