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높이 13.5m. 고려 후기 충목왕 때 조성된 석탑으로 기존의 신라계 석탑과는 양식을 달리하는 특수형 석탑이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원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 경천사지에 세워져 있었는데, 1909년경 우리나라에 대사로 와 있던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田中光顯]에 의하여 일본 도쿄[東京]로 불법 반출되었다. 그 뒤 반환되어 오랫동안 경복궁 근정전회랑에 방치되었다가 1959년 재건에 착수하여 1960년 완공 되어 경복궁에 전시되었다. 1980년대 들어 경복궁 복원계획의 진행에 따라 1995년 해체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서 복원작업을 거쳐, 2005년 신축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실내에 전시되고 있다.
이 탑은 기단부 위에 탑신부와 상륜부가 건조되었는데, 각 부는 그 평면과 부재의 구조 등에서 각기 특수한 건조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다.
현재의 지대석은 본래의 것이 아니고 재건 되면서 다시 조성된 것이다.
기단부는 3층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평면은 사면두출성형(四面斗出星形)의 아(亞)자형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각 층의 면석에는 각기 불(佛) · 보살 · 인물 · 초화(草花) · 반룡(蟠龍) 등을 조각하였으며, 각 모서리[隅角]에는 절목원주형(節目圓柱形)을 모각하였다.
갑석은 각 층이 같은 형식으로서, 측면은 굽형을 노출시키고 상하에는 연화문을 조식하였는데, 삼층의 갑석만은 상단부에 난간을 돌리고 그 위에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다른 일반형 석탑에서의 탑신 굄대와도 같은 의장(意匠)의 가구(架構)인 것 같다.
탑신부는 10층으로 이루어졌는데, 초층과 2·3층은 기단부와 같이 사면 두출성형의 아(亞)자형을 이루었고 그 위의 4층부터는 방형이다. 4층부터의 체감은 없는 편이나 초층과 2·3층에서는 감축(減縮)을 느낄 수 있다.
탑신의 구조는 각 옥신 위에 옥개석을 겹겹이 쌓았는데, 옥신석의 각 모서리에는 원주형을 모각하고 각 층, 각 면에는 십이회상(十二會相)을 조각하여 불 · 보살 · 천부(天部), 기타의 문양을 빈틈없이 전면에 조각하였다. 그리고 각 층 옥신석 하단부에는 높직한 난간을 돌리고 있는데, 이것도 옥신굄의 의장일 것으로 여겨진다.
각 층의 옥개석은 하면에 다포(多包)집 형식의 두공(枓拱) 형태를 모각하고 상면 낙수면부는 팔작(八作)집 형태의 지붕모양과 기왓골이 표현되어 목조건축물을 연상하게 한다. 특히, 3층은 이중의 옥개를 이루고 있어서 마치 화려한 전각을 모조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각 층의 추녀도 전각부(轉角部)에 이르면서 곡선을 보이고 반전을 일으켜서 경쾌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상륜부는 단조로운 형식으로 평면은 원형이며, 노반과 연주문형(連珠文形)의 복발, 그리고 앙련(仰蓮)으로 된 앙화(仰花)가 있고 그 위에 보탑형(寶塔形)과 보주가 있다.
개성경천사지십층석탑의 제1층 옥신 이맛돌에는 조탑명(造塔銘)이 새겨져 있어 건립연대와 조성배경에 관해 알 수 있어 주목된다. 명문에 의하면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건립된 것으로 ‘지정 8년 무자 3월(至正八年戊子三月日)에 대시주(大施主) 강융(姜融)과 원사(元使) 고용봉(高龍鳳), 대화주(大化主) 성공(省空), 시주(施主) 법산인(法山人) 육이(六怡) 등이 원나라의 황제의 수복(壽福)을 기원하며 천기가 순조롭고 국태민안하며 불법이 더욱 빛나고 법륜이 항상 움직여 수복을 얻고 다 같이 불도를 이루기를 기원한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은 원의 순제(順帝)가 집정하던 시기였는데, 순제의 부인이 바로 고려인 기자오(奇子敖)의 딸로서 그 소생이 순제의 후계자로 책봉되어 기씨는 기황후의 칭호를 받고 있었다. 중국의 정세가 이렇게 되자 고려에서는 기씨 일족과 이에 부응하는 친원세력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는데, 이러한 배경에서 개경에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경천사에 원의 번영과 원나라 황제의 천수만세를 기원하는 대리석탑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경천사십층석탑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특수형의 석탑으로 분류되고 있는데, 아(亞)자형의 사면 돌출형의 평면과 다포식 조영, 조각사적인 친연성 등이 그 이유가 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탑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진데 반해 이 석탑은 전제가 회색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데 특징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세장(細長)하고 불안정한 느낌을 주는 것 같으나 3단의 기단부와 3층까지의 탑신이 안정된 아(亞)자형을 이룬 평면이고, 3층까지의 체감이 뚜렷하여 오히려 경쾌하고 날씬한 가운데 안정감을 주고 있다.
그리고 각 부재(部材)세부의 조각은 부분에만 그치지 않고 기단 탑신부 할 것 없이 전면에 가득 차 있는데, 이들 조식(彫飾)은 장려하고 변화가 많으며, 전체의 균형 또한 우미하여 고려시대의 석조탑파 중 가장 특이하고도 정련한 기교를 보이고 있다.
아울러 상륜의 각 부재형태가 우리나라 탑의 상륜형식(相輪形式)과는 달리 원대(元代)의 라마탑(喇嘛塔)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옥개석(屋蓋石)에 목조 건물의 처마구조가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당시의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개성경천사지십층석탑은 원각사지십층석탑의 선구적인 모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수법이나 양식적인 면으로 볼 때 고려시대의 석탑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