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7.54m. 석탑이 있던 곳이 개국사(開國寺)터로 알려져서, 개국사탑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개국사는 다른 곳에 자리하였고, 석탑이 있던 곳은 남계원이 있었던 곳으로 밝혀져, 석탑의 이름이 지금처럼 고쳐 불린다. 곧 석탑은 경기도 개성시 덕암동 남계원터에 있던 것으로, 1915년에 기단부(基壇部)를 제외하고 탑신부(塔身部)만 경복궁으로 옮겼다가, 그 뒤에 원래 있었던 곳을 다시 조사한 결과, 땅 속에서 2중으로 구성된 기단부의 나머지 돌이 발견되어, 역시 경복궁으로 옮겨 졌다. 현재는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를 모두 조립하여, 서울특별시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의 야외 석조물정원에 자리하고 있다.
석탑은 2층의 받침돌 위에 7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리고,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를 놓은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따랐다고 할 수 있지만 세부 모습에는 변화가 있다. 여러 장의 돌로 구성된 받침 부분인 기단부는 현재 몇 장의 돌이 없어진 상태이다. 아래층 받침돌의 면석은 신라의 일반형 석탑보다는 훨씬 높아진데 반해 윗층 받침돌은 약간 낮아진 듯 보인다. 아래와 윗층 덮개돌은 온전한 상태는 아니다. 윗층 받침돌의 덮개돌은 밑면에 쇠시리인 부연(副椽)이 가지런하고 다듬은 솜씨도 세련미를 보이고 있다.
탑신부는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었다. 몸돌에는 각 면마다 좌우에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었는데, 예리하게 조각된 신라 석탑과 달리 얕게 새겨져 퇴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각 층의 지붕돌은 같은 수법으로 만들어졌는데, 밑면에 3단의 받침이 낮게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아무런 굄대도 없이 윗층의 몸돌을 받치고 있다. 낙수면은 평박(平薄)하지만 밑면의 받침이 낮아서 중후한 느낌을 주며, 추녀가 두꺼워지고 전각(轉角)에 이르러서는 윗면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반전되듯이 밑면도 이에 따라 반전되어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때문에 이 석탑은 신라 석탑의 경쾌한 느낌과는 달리 경박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7층 지붕돌 꼭대기에 하나의 돌로 만든 노반(露盤)과 복발(覆鉢)만 남아 있고, 그 외의 부재는 없어졌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2층 이상 탑신부의 체감률이 낮지만 웅건한 기풍과 정제된 결구 수법을 보여,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각 부분의 수법과 양식이 모두 일치하지 않으므로, 후대에 보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1915년에 옮겼을 때, 몸돌에서 7축(軸)의 『감지은니묘법연화경(紺紙銀泥妙法蓮華經)』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고려 충렬왕 때에 사경(寫經)한 것으로, 1283년(충렬왕 9)에 석탑을 다시 수리하면서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