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현등사(懸燈寺)는 창건된 이후 여러 번의 중창과 중수가 있었다. 통일신라 말기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사탑비보설(寺塔裨補說)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이 크게 중창하여 절 이름을 현등사라 하였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는 기화대사(당호는 涵虛)가 중창하였으며, 1470년 3월에는 대방부부인(帶方府夫人) 송씨(宋氏)가 시주하여 사리 5과가 출토된 3층석탑을 수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7~18세기에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1845년에는 화담당(華潭堂) 경화(敬和, 1789~1848)가 주석하면서 크게 번창하였다. 이러한 현등사의 연혁에서 3층석탑과 함께 기화대사의 승탑인 득통탑(得通塔)과 그 앞에 세워진 석등은 조선 초기 현등사의 위상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승탑의 주인공인 기화대사는 충주 출신으로 1396년 관악산 의상암으로 들어가 삭발하고 출가하였다. 다음해인 1397년에는 회암사에 머물고 있던 무학대사 자초를 찾아가 법요(法要)를 들은 후 주요 산사를 찾아다니며 수행에 전념하였다. 이후 대승사(大乘寺), 관음굴(觀音窟), 연봉사(烟峯寺), 대자사(大慈寺), 봉암사(鳳巖寺) 등에 거처하면서 선풍을 진작하거나 강론을 널리 펼쳤다. 특히 1421년에는 세종의 부탁으로 개성 대자사에 머물며 선비대비(先妣大妃)의 명복을 빌고 왕과 신하들에게 설법을 펼치기도 하였다. 기화대사가 1433년 4월 입적하자 세종은 그의 사리탑을 세우도록 하였고, 그의 사리탑은 분사리되어 평산 연봉사, 가평 현등사, 강화 정수사, 문경 봉암사 등에 세워졌다고 한다.
승탑과 석등은 현등사 경내에서 서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능선 자락에 나란히 서 있다. 승탑은 석축을 쌓아 좁게 대지를 조성한 후 일직선상에 석등과 함께 세워져 있는데, 기화대사가 입적한 1433년 건립 당시의 위치 그대로로 추정된다. 승탑과 석등을 일직선상에 배치하는 방식은 회암사의 지공선사(指空禪師) 사리탑의 예에서 보듯 고려 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승탑은 지형적으로 남향을 고려하고 있어 길지(吉地)를 선정하여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승탑은 현등사 경내를 벗어난 외곽 지역의 능선 상에 위치해 있는데, 이것은 신라시대부터 이어 온 전통으로, 승탑이 묘탑적(墓塔的)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등은 평면이 사각형으로 조선시대 사대부묘 앞에 건립되던 장명등(長明燈)과 동일한 양식을 보인다.
승탑은 팔각당형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지대석은 팔각형으로 마련하고 그 위에 2단의 팔각 대석(臺石)을 올렸다. 이와 같이 팔각당형 승탑에서 기단부를 하대석-중대석-상대석으로 구성하지 않고 간략한 판석형(板石形) 대석으로 하는 수법은 순천 송광사를 중심으로 하여 고려 후기부터 나타난다. 상단 대석 상면에는 원형의 홈을 파서 원구형(圓球形) 탑신석이 삽입, 고정되도록 하였다. 탑신석은 가운데가 볼록한 구형으로 남면에 ‘함허당득통(涵虛堂得通)’이라고 명문을 새겼다. 이 명문으로 승탑의 주인공과 건립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옥개석은 하부에는 넓은 1단의 받침을 두고 낙수홈을 마련하였다. 옥개석의 처마부는 살짝 들어 올려 다소나마 경쾌한 인상을 준다.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합각부에는 마루부가 표현되었다. 이처럼 승탑에서 옥개석의 높이가 높고, 낙수면이 급경사를 이루며, 처마부에 목조 건축물의 부재를 간략화하여 표현한 수법 등은 조선 전기에 많이 나타난다. 상륜부는 복발과 보륜, 보주를 간략하게 올려 마무리하였다.
현등사의 득통탑은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의 양식, 특히 고려 말기에 건립된 회암사의 지공선사나 선각왕사(先覺王師)의 승탑들과 강한 친연성을 보여 조선 초기 경기도 지역에서 성행한 부도의 양식을 채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 초기 불교계의 위축 속에서도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던 승려의 경우 여전히 승탑이 건립되었음을 알려 준다. 이 득통탑과 석등은 조선 초기 왕실이나 사대부가의 묘역에 건립된 석조물들과도 강한 친연성이 있다. 불교적인 조형물인 승탑은 묘탑적 성격의 조형물로 유교적인 조형물인 묘역에서 봉분에 해당한다. 그리고 석등은 묘역의 장명등에 해당한다. 즉 일직선상에 배치된 득통탑과 석등에는 묘역과 동일한 조영 기법이 적용되어 있는 것이다. 나아가 분사리에 의한 다수의 승탑 건립은 고려 말기에 새로이 나타나 조선 후기에 본격화하는 전통인데 기화대사의 승탑은 그 교량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