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봉성암은 1713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던 성능대사(聖能大師)가 북한산성 축성 시 산성의 수비를 위하여 25칸 규모로 건립한 12개의 사찰 중 하나이다. 현재 성능대사의 것으로 전해지는 부도는 북한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능선의 끝 지점에 서향(西向)을 고려하여 석축을 쌓아 비교적 넓게 대지를 조성한 후 건립되었다. 이는 부도가 입적한 승려의 유골이나 사리를 봉안한 시설물이었기 때문에 건립 시 서방 극락정토를 고려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부도는 성능대사의 살아 생전 행적 등 여러 정황으로 보아 현재의 자리가 원위치로 보인다.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도괴된 것을 1960년대에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다고 한다.
부도의 주인공으로 전하는 성능대사는 호가 ‘계파(桂坡)’로 자세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 숙종∼영조 대에 활약한 승려였다. 그는 구례 화엄사의 벽암 각성(碧岩覺性)의 문하에서 3년 동안 수행하고, 화엄사 장육전의 화주승으로서 숙종의 지원을 받아 1702년에 공역을 마무리하였다. 숙종은 장육전이 완공되자 ‘각황전(覺皇殿)’이라 사액하였다. 이 일로 성능대사를 신임한 숙종은 1711년 한양 수비의 요충인 북한산성 축성을 그에게 위임하고 팔도도총섭의 직위를 내렸다. 성능대사는 북한산성 축성이 완료된 후 다시 화엄사로 가서 「산성기사(山城紀事)」를 집필하고, 『북한지(北漢誌)』를 찬하고 판각하여 1745년 신임 도총섭인 서봉(瑞鳳)에게 인계하였다고 한다.
성능대사는 1745년 이후 오래지 않아 입적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부도도 성능대사 입적 직후 세워졌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18세기 중반경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봉성암의 부도는 성능대사의 성공적인 북한산성 축성과 연관지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구례 화엄사 부도군에도 ‘계파당(桂坡堂)’이라는 당호를 새긴 석종형 부도가 전해지고 있다. 계파는 성능대사의 호인데, 생전 화엄사에서의 활약상으로 보아 입적 후 분사리(分舍利)되어 화엄사에 부도가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능대사는 숙종의 신임 및 후원은 물론이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유학자들도 중시한 북한산성 축성을 원만하게 마무리함으로써 거기에 상응하는 예우를 받았을 것이다. 이는 성능대사의 부도가 당시로서는 상당히 우수한 양식에 큰 규모로 건립되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봉성암 전성능대사 부도는 기단부에서 상륜부까지 모든 부재가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옥개석 일부가 파손되기는 하였지만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하다. 기단부에서 지대석은 지상으로 많이 노출된 상태인데, 4매의 긴 사각형 석재를 잘 짜 맞추어 평면이 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대석 수법은 조선 후기의 부도에서 많이 활용된 기법이다. 그리고 하대석은 사각형으로 상면의 모서리 부분은 호형(弧形)으로 다듬고, 1단의 굴곡을 두어 장식적인 기교가 엿보인다. 또한 하대석의 상면 가운데에는 원형으로 낮은 1단과 높은 1단의 괴임대를 마련하였다. 중대석은 납작한 원구형(圓球形)인데, 가운데는 볼록한 형태로 다듬었다. 이러한 중대석은 용문사 정지국사(正智國師) 부도 등 조선 전기에 건립된 일부 부도에서 채용된 수법이다. 상대석은 평면 팔각형으로 하부에 낮은 각형(角形) 2단의 받침을 마련하고, 그 위에 갑석(甲石)처럼 높게 단을 두었다.
탑신부에서 탑신석은 평면 팔각형으로 간략하게 치석하였으며, 옥개석은 하부에 4단으로 구성된 받침을 두고, 그 위에 넓고 높은 1단의 받침을 추가하였다. 옥개석의 처마부는 두툼하게 하여 다소 둔중한 인상을 주는데, 이는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모서리마다 굵게 마루부를 표현하고, 그 끝에 음각선으로 좌우대칭을 이룬 귀꽃을 표현하였다.
상륜부는 원형으로 잘 다듬어진 복발(覆鉢)과 보륜(寶輪)을 마련하고 꼭대기에 보주(寶珠)를 올려 마무리하였다.
봉성암 전성능대사 부도는 기단부에서 상륜부까지 정연한 결구 수법을 보여 주고는 있지만 신라와 고려시대 부도에 비하여 정교함은 다소 떨어진다. 옥개석은 처마부가 두툼하고 마루부를 굵게 처리하여 조선시대 부도 양식을 보이고 있다. 또한 옥개석의 처마부에 선각으로 귀꽃을 표현한 수법도 조선시대 들어와 많이 쓰인 기법이다. 특히 옥개석과 상륜부의 양식은 조선시대 왕릉이나 사대부 묘 앞에 건립된 장명등의 옥개석과 친연성을 보인다. 이러한 특징들로 보아 이 부도는 건립 시기를 알려 주는 기록은 없지만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도는 전체적으로 규모가 크고, 조선 후기 건립된 부도들 중에서는 상당히 우수한 양식이라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귀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