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합천 적연선사 승탑은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중촌리 마을 뒤편으로 형성된 낮은 능선에 있다. 승탑 주변에서 사지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고 다른 유적이나 유물도 발견되지 않아 이곳에 승탑만 단독으로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승탑에서 가까운 곳에 영암사가 있으며, 영암사에 이 승탑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귀부 등이 남아 있다.
승탑의 양식과 적연국사(寂然國師) 영준(英俊, 932~1014)의 탑비문을 토대로 그의 승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적연국사의 탑비문에 의하면, 그는 고려 광종∼현종 대에 왕의 만수무강과 종묘 사직의 평안을 기원하는 등 중앙에서 주요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011년 병이 들고 노쇠하자 현종에게 지방으로 낙향할 뜻을 전하였고 현종은 스님을 합천 영암사에 머물도록 하였다. 영암사에 있던 스님은 얼마 후에 입적할 것을 알고 시자(侍者)에게 명하여 큰 종을 쳐서 대중을 모아 놓고 꼿꼿이 앉아 1014년 6월 2일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그러자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6월 28일 영암사 서쪽 산봉우리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승탑이 영암사에서 다소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탑비문의 기록대로 서쪽 방향에 위치해 있고, 승탑의 양식 등이 적연국사의 입적 시기와 잘 맞아떨어진다. 따라서 이 승탑의 건립 시기는 1014년일 것으로 추정된다.
승탑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후 어느 시기에 심하게 파손되었고, 그 과정에서 일부 부재가 결실된 것으로 보인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 말기에 이 산 주인이 부도를 계곡에 넘어뜨리고 그 자리에 자기 선조의 묘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후 부도재들이 홍수에 밀려 아래로 내려왔다고 하므로 현재의 자리는 원래 위치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원래의 위치는 현재 능선 위쪽에 있는 여러 기의 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지만 지형이 크게 변하여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부도재들은 1984년 영암사지 발굴 시에 수습되었다고 한다. 이후 일부 부재가 결실된 상태로 세웠다가 다시 새로운 부재들을 추가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재현하였다.
합천 적연선사 승탑은 현재 기단부의 하대석을 구성하고 있는 하단석-상단석-중대석-상대석-옥개석 등이 수습되어 총 5매의 부재가 남아 있다.
하대석은 하단석과 상단석이 남아 있어 원래부터 2단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하단석은 평면이 팔각형으로 하부에 3단 괴임을 마련하고, 각 면을 고르게 치석한 다음 각 면에 1구의 사자상(獅子像)을 조각하였다. 사자상들은 대부분 왼쪽을 보고 있지만 오른쪽을 향하고 있는 상도 있다. 모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정면을 보거나 고개를 돌려 측면을 보고 있는데, 1구의 사자상은 누워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해학적이다. 상단석은 2단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하부에는 구름 문양을, 상부에는 구름 속에 세 마리 용이 뒤엉켜 있는 운룡문(雲龍紋)을 조각하였다. 하대석의 사자상이나 운룡문은 수호의 의미로서 신라와 고려의 승탑에서 자주 표현되었다. 중대석은 평면 팔각형으로 각 면에 안상(眼象)을 새겼는데, 안상 안에 추가 장식은 없으며,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평범한 모양이다. 상대석은 하부에 3단의 각형 받침을 두고, 그 위에 총 16엽의 연화문이 표현되었는데, 각 연화문 안에 화문(花紋)이 추가 장식되어 상당히 화려하다.
옥개석은 하부에 2단 받침을 두고 낙수홈을 마련하였다. 옥개석 일부가 파손되기는 하였지만 낙수면이 유려한 곡선형을 이루고 있고, 마루부는 높게 표현되었다. 마루부 상부에 2단 받침이 마련되어 있어, 부분적으로 목조 건축물을 모방하여 설계와 시공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마루 끝에는 삼각형 화문을 새겨 넣어 석공의 뛰어난 기교를 보여 준다. 현재 상륜부는 모두 결실된 상태이지만 옥개석 상부에 팔각 받침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화려한 상륜부가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합천 적연선사 승탑은 고려시대 들어와 입적한 승려의 극락왕생과 풍수지리 등을 고려하여 건립되었는데, 대부분 사찰에서 가까운 지점에 위치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사찰에서 다소 떨어진 지점에 건립되기도 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또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의령 보천사지 승탑과 양식적으로 강한 친연성을 보이고 있어, 비슷한 시기인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적연국사의 승탑과 탑비는 고려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비신은 남아 있지 않지만 영암사지에 남아 있는 2기의 귀부 중 1기가 적연국사 영준의 탑비에 사용된 귀부임을 알려 준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