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림산문 ()

창원 봉림사지
창원 봉림사지
불교
단체
신라 말에 형성된 선종(禪宗)의 한 산문(山門).
이칭
이칭
봉림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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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신라 말에 형성된 선종(禪宗)의 한 산문(山門).
산문의 형성 배경

선종은 당 불교계에서 8세기 후반에 마조 도일(馬祖道一)과 석두 희천(石頭希遷)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부각되었고, 그들의 문도들이 번창하면서 점차 독립된 교단으로 형성되었다. 본래 선종의 수행자는 각지를 다니면서 몇 사람의 스승에게 배웠으며, 인가를 받은 후에도 선지식을 계속해서 찾는 경우가 많았고, 스승과 제자 사이에 사제 관계 인식을 달리하는 경우도 존재하였다. 그러나 전등사서(傳燈史書)가 편찬되면서 선승을 배타적으로 한 사람의 스승에 연결하는 경향이 확대되었고, 선종 특유의 법통설에 입각한 법계의식이 고양되었으며, 어느 사원이 특정 일파에 의해 계승되는 경향이 점차 확산되었다.

선종이 갖는 이러한 특성과 함께 9세기 중반 당의 회창(會昌) 폐불을 계기로 입당 유학승들이 신라로 돌아오면서 특정 개산 조사의 법통을 계승한 문도들이 특정한 사찰을 중심으로 한 산문을 지역에서 형성하였다. 선사들은 거주한 사원 단위로 각각 세력을 이루면서 서로 연결된 산문으로 성장하였다.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제자들이 특정 사원을 중심으로 대집단을 이루었다. 나아가 산문은 왕실, 중앙귀족, 호족의 후원을 받아 본사를 중심으로 곳곳에 장사를 두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었다.

역사적 변천

원감대사(圓鑑大師) 현욱(玄昱, 787869)의 제자인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 855923)가 효공왕 때에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산에 봉림사를 창건하여 봉림산문(鳳林山門)을 개창하였다.

현욱은 824년(헌덕왕 16)에 당에 유학하였으며, 837년(희강왕 2)에 왕자 김의종(金義宗)을 따라 신라로 돌아왔다. 그는 실상사에 머물렀으며, 민애왕, 신무왕, 문성왕, 헌안왕의 귀의를 받았다. 이후 840년(문성왕 2) 왕명에 따라 현욱은 혜목산의 고달사(高達寺)로 옮겼다가 입적하였다. 『조당집(祖堂集)』 권17 「동국혜목산화상(東國慧目山和尙)」조에는 현욱이 마조 도일의 제자인 장경 회휘(章敬懷暉, 754~815)의 법을 이었다고 되어 있지만, 현욱이 당에 유학하였을 때에는 이미 장경이 입적하였기 때문에 실제 있었던 일로 보기 어렵다. 현욱은 13세에 불과한 제자 심희에게 심인을 전하면서 자신의 법계가 ‘조계 혜능-남악 회양-마조 도일-장경 회휘’로 이어진다고 하여 중국 남종선의 법통을 강조하였다. 대부분의 선승이 중국에 유학을 하였던 것과 달리 심희의 경우에는 유학하여 전법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남종선의 법통을 강조하였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심희는 9세에 혜목산에 가서 현욱에게 출가하였으며, 19세에 구족계를 받은 후 각지를 유력하였다. 그는 중국에 유학을 가지 않았고, 진성왕 때에는 송계와 설악에 머물렀으며, 경주로 오도록 한 왕의 요청에 따르지 않았다. 이후 그는 김해 지역의 호족인 김인광, 소율희(김율희와 동일인) 등의 후원을 받아 봉림사를 창건하였다. 이 무렵 심희는 경명왕의 귀의를 받았으며, 918년(경명왕 2)에는 왕의 초청으로 경주에 가서 설법하기도 하였다.

심희의 문하에는 경질(景質), 융제(融諦) 등 500여 인의 제자들이 있었다. 융제는 상주 삼랑사(三郎寺)에서 선풍을 일으켰다. 원종대사 찬유(璨幽, 869958)는 삼랑사의 융제에게 갔다가 융제의 지시로 심희에게 출가하였다. 찬유는 당에 건너가 투자 대동(投子大同)의 선법을 계승하고 921년(경명왕 5)에 신라에 돌아와 삼랑사에 머물렀다. 이후 그는 개경으로 가서 고려의 태조 왕건을 만났고, 왕건의 명으로 광주(廣州) 천왕사(天王寺)에 머물다가 혜목산에서 선풍을 진작하였다. 찬유는 고려의 혜종과 정종의 후원을 받았으며, 광종 초에는 국사(國師)로 책봉되었다. 찬유는 90세로 입적하였는데, 그가 주로 머문 혜목산 고달원은 고려 초에 위상이 높았다. 심희의 제자인 충담(忠湛, 869940)도 중국에 유학하였는데, 귀국한 후 김해에 한동안 머물다가 이후 개경으로 이동하였다.

봉림산문은 김해와 창원 지역의 호족 세력이 주요한 단월(檀越)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후삼국 전쟁기에 후백제가 경상도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후백제와 신라, 후백제를 견제하고자 하는 고려 모두에게 전략적 요충지였다. 소율희가 지배하던 시기에는 봉림산문이 건재하였으나, 고려와 후백제의 쟁패가 본격화되면서 산문의 안정이 흔들리게 되었다. 915년(신덕왕 4)에는 이엄을 비롯한 선승들이 신변의 안전을 기약할 수 없어서 다른 사찰로 떠나게 되었다. 923년(경명왕 7) 심희가 입적하고, 927년(경애왕 4)에 후백제가 경주를 침공하면서 김해와 창원 지역의 호족세력이 몰락하였는데, 이로써 봉림산문은 쇠락하였다.

참고문헌

『조당집(祖堂集)』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창원 봉림사지』(창원문화재연구소, 2000)
『나말여초 선종사상사 연구』(추만호, 이론과 실천, 1992)
「신라 말 고려 초 김해 창원 지역의 호족과 봉림산문」(구산우, 『한국중세사연구』25, 2008)
「진경심희의 활동과 봉림산문」(배상현, 『사학연구』74, 2004)
「신라 말 봉림산문과 신라왕실」(조범환, 『진단학보』78, 1994)
「신라 말 김해지방의 호족세력과 선종」(최병헌, 『한국사론』4,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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