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사(衆生寺)는 백률사(栢栗寺)와 민장사(敏藏寺) 등과 함께 신라 때의 대표적인 관음 도량이다. 그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삼소관음중생사(三所觀音衆生寺)’조에 서술되어 있다. 중생사는 현재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경주의 낭산(狼山)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사찰의 창건 시기나 주체도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효소왕 때에 백률사에 대한 관심이 컸다든지 관음신앙이 신라에 수용되던 과정 등을 감안하면 대략 7세기 무렵에 사찰이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유사』에는 중생사와 관련된 종교적인 영험이 기술되어 있어 사찰의 위상과 역사적 변천상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특히 신라 말에 최은함(崔殷諴)이 관음보살에게 기도하여 아들 최승로(崔承老)를 얻었으며,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경주를 공격하였을 때에 무사히 아들을 구한 사례는 당시 중생사의 모습을 짐작하게 해준다. 곧 중생사는 현세구원적인 관음신앙의 도량으로서 존재하였으며, 사찰의 주요한 단월이 6두품에까지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 992년(성종 11)에 중생사 주지 성태(性泰)가 단월이 없어 절을 유지할 수 없었던 어려움을 겪었는데 금주(金州) 사람들의 후원을 받았다. 이러한 기록은 최승로 집안과 중생사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