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암사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도헌(道憲)이 창건한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희양산(曦陽山)에 있는 사찰이다. 879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지증대사는 심층거사가 희사한 희양산 일대에 사찰을 짓고 선풍을 널리 펴 희양산문을 열었다. 881년 나라에서 봉암사 이름을 내려 주었다. 봉암사는 후삼국을 거치며 폐허 상태가 되었으나 935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였고, 조선시대에도 소실 및 쇠퇴와 중건을 거듭하였다. 1915년에 퇴락한 당우를 다시 중건하였으며, 1982년에 특별수도원으로 지정되어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수행 도량이 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末寺)이다.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희양산파의 종찰(宗刹)로서, 879년(헌강왕 5)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지증대사 도헌(智證大師道憲)이 창건한 이래 현재까지 선도량(禪道場)으로 일관해 온 선찰(禪刹)이다.
창건 당시 심층거사가 지증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喜捨)하여 도량(道場)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다. 대사는 이곳을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싸여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라며 경탄하고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고 하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지었다. 881년(헌강왕 7) 나라에서 봉암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이후 후삼국 때 폐허화되어 극락전만 남아 있는 상태였는데, 935년(태조 18)에 정진대사 긍양(靜眞大師兢讓)이 중창하여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는 기화(己和)가 1431년(세종 13)에 절을 중수한 뒤 오랫동안 머물면서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宜)』를 저술하였다. 그 뒤 1674년(현종 15) 화재로 소실된 뒤 신화(信和)가 중건하였고, 1703년(숙종 29) 불전과 승료가 불탔으나 바로 중건하였다. 1915년에는 세욱(世煜)이 다시 퇴락한 당우(堂宇)를 중건하였으며, 1927년 지증국사의 비각(碑閣)과 익랑(翼廊)을 세웠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신라 경순왕이 한때 피신한 것으로 전해지는 문경 봉암사 극락전이 있는데, 건물의 가구(架構) 방법(架構方法)이 이채(異彩)롭고 천장 꼭대기에 석탑 상륜부의 모양으로 보주(寶珠)를 얹고 있음이 특이하다. 그리고 사문(寺門)과 나란히 있는 요사채 이외에는 모두가 신축된 건물로서 절 중앙 상부에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오른쪽에는 규모가 큰 선원(禪院)이 있으며, 넓은 경내 도처에는 수 채의 건물이 서 있으나 다른 절과는 달리 편액을 걸고 있지 않다.
이 절의 오른쪽에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도헌의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과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가 있다. 그리고 절 앞뜰에는 도헌이 세운 것이라고 전해지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이 있는데, 기단 구조에서 특이함을 보이며, 상륜부(相輪部)가 완존하여 주목되는 탑이다.
그 뒤 이 절은 935년(태조 18)에 정진대사가 중창하였는데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과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가 있다.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는 규모가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와 같으며, 일주문을 100m 앞둔 곳에서 오른쪽으로 계곡을 건너가면 밭 가운데 있다.
희양산 산정에는 40m 정도의 벼랑을 이룬 암봉에 다섯 줄이 파여져 있는데 이것은 명나라의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의 흥기를 막기 위하여 칼로 혈도(穴道)를 끊은 것이라는 전설이 얽혀 있다. 또한 봉암사의 용바위에서는 가뭄이 계속될 때 기우제(祈雨祭)가 행하여졌는데, 특이한 것은 삶은 돼지머리로 지내지를 않고 산 돼지를 몰고 올라가서 바위 위에서 찔러 피를 흘리게 하여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용이 피 묻는 것이 싫어서 비를 내린다는 속신에서 유래한다.
이 밖에도 희양산에는 대궐터라고 불리우는 석성(石城)과 군창지(軍倉址)가 있고, 산록(山麓)에는 홍문정(紅門亭) · 배행정(拜行亭) · 태평교(太平橋) 등 임금과 관련된 명칭을 가지는 곳이 많아 신라 후기의 난세 때에 경순왕의 행궁(行宮)이 있었던 곳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또한 봉암사 주변 계곡에는 기생이 세상을 비관하여 몸을 던졌다는 용연(龍淵)을 비롯하여 최치원(崔致遠)이 낚시를 즐겼다는 취적대(取適臺), 야유암(夜遊巖), 백송담(柏松潭), 백운대(白雲臺) 등의 소(沼)들이 있다.
또한 사찰에서 서쪽으로 300m 떨어진 계곡에 위치한 옥석대(玉石臺)는 암석에 조각된 불상 아래 넓게 깔린 암반에서 목탁 소리가 난다는 명승지이다. 이 옥석대에는 바위의 북벽을 다듬고 7∼10㎝ 정도의 깊이로 감형(龕形)처럼 판 곳이 있는데, 그 안에 높이 약 6m의 좌상(坐像)이 양각되어 있다.
산내 부속 암자로는 절 북쪽 중턱에 백련암(白蓮庵)이 있다.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1871년(고종 8)에 유겸(裕謙)이 중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