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충주(忠州). 속성은 유씨(劉氏). 호는 득통(得通), 당호는 함허(涵虛). 첫 법명은 수이(守伊), 첫 법호는 무준(無準). 법명은 기화(己和). 충청북도 충주(忠州) 출신. 아버지는 전객시사(典客寺事)청(聽)이고, 어머니는 방씨(方氏)이다.
조선 초기의 배불정책이 극에 이르렀을 때, 불교의 정법(正法)과 그 이치를 밝힘으로써 유학의 불교 비판의 오류를 시정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396년(태조 5) 관악산 의상암(義湘庵)으로 출가하였으며, 1397년에 회암사(檜巖寺)로 가서 무학왕사(無學王師)에게 법요(法要)를 들은 뒤 여러 곳을 다니다가, 1404년(태종 4) 다시 회암사에 가서 수도에 정진하였다.
1406년 공덕산(功德山) 대승사(大乘寺)에서 4년 동안 『반야경』을 설했고, 1410년 개성의 천마산 관음굴(觀音窟)에서 선을 크게 진작하였다. 1411년부터 절을 중수하고 승속(僧俗)들을 지도하였다. 1414년 황해도 평산(平山)의 자모산(慈母山) 연봉사(烟峯寺)의 작은 방을 함허당(涵虛堂)이라 명명하고,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를 강의하였다.
1420년(세종 2) 오대산에 들어가 오대의 여러 성인들에게 공양하고, 영감암(靈鑑庵)에 있는 나옹(懶翁)의 진영(眞影)에 제사한 뒤 잘 때, 꿈에 어떤 신승(神僧)이 나타나 이름은 기화, 호는 득통으로 지어 주어 이후 그것을 사용하였다.
1421년 세종의 청에 의하여 개성 대자사(大慈寺)에 머물면서 왕의 어머니를 위해 명복을 빌고, 왕과 신하들을 위해 설법하였다. 1424년 길상산(吉祥山)·공덕산(功德山)·운악산(雲岳山) 등을 편력하면서 일승(一乘)의 진리를 설파하였다.
1431년 문경의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를 중수하고 그곳에서 머물다가, 1433년 입적하였다.
그는 자초(自超)의 법을 이은 선가(禪家)이지만, 교(敎)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겼고, 교학적(敎學的)인 경향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현정론(顯正論)』에 나타나 있듯이, 그의 선사상(禪思想)에는 현실생활과 일상적인 생활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특징이 있는데, 이것은 조선 초기 유학자들이 배불(排佛)을 주창하면서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라고 비판한 것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유·불·도의 삼교일치 사상은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에 의해 시작되어, 그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의 삼교일치론은 송나라 계숭(契嵩)이 지은 『보교편(輔敎編)』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강력한 억불정책으로 불교가 배척당하고 있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주장되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문인으로 문수(文秀)·학미(學眉)·달명(達明)·지생(智生)·해수(海修)·도연(道然)·윤오(允悟) 등이 있다.
저서로는 『원각경소(圓覺經疏)』 3권, 『금강경오가해설의』 2권 1책, 『윤관(綸貫)』 1권, 『함허화상어록(涵虛和尙語錄)』 1권이 있다. 그 밖에도 『반야참문(般若懺文)』 1권이 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봉암사에 비가 있고 가평 현등사(懸燈寺)에 부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