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설의 ()

불교
문헌
고려후기부터 조선전기까지 생존한 승려 함허기화가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를 해석한 불교서. 불교주석서.
이칭
이칭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
정의
고려후기부터 조선전기까지 생존한 승려 함허기화가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를 해석한 불교서. 불교주석서.
개설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일명 『금강경』)은 삼국시대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 대단히 많이 읽혀졌다. 『금강경』은 특히 선의 소의경전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선종이 주도권을 쥐게 되는 고려 말 이후부터는 매우 중요시되었다. 그래서 해석서도 많이 간행되었는데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등이 있다.

『금강경삼가해』는 『금강경오가해』 중에서 야보(冶父)·종경(宗鏡)·기화(己和)의 주석을 발췌해서 실은 것으로, 1482년(성종 13)에 보림사(寶林寺)에서 간행된 것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외에 언해본(諺解本)도 출판되어 있다.

본서는 기존에 유통되고 있던 『금강경오가해』에 기화가 설의(說誼)를 덧붙인 것인데, 『금강경오가해』는 당나라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의 『금강경소찬요(金剛經疏纂要)』, 당나라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의 『금강경해의(金剛經解義)』(구결이라 함), 양나라 부대사(傅大士, 497∼570)의 『금강경제강송(金剛經提綱頌)』, 송나라 야보도천(冶父道川)의 『금강경』에 대한 착어(著語)와 송(頌), 송나라 예장종경(豫章宗鏡, 904∼975)의 『금강경제강(金剛經提綱)』에 해당된다.

편찬/발간 경위

1415년(태종 15)에 기화가 기존에 유통되고 있던 『금강경오가해』의 여러 간본을 대조하여 교정본을 내고(기화의 오가해서설에 의함), 그 후 1417년부터 1418년 사이에 이를 강의하여 ‘설의’를 편찬하였다. 이 설의를 1457년(세조 3)에 신미(信眉)·홍준(弘濬) 등이 『오가해』와 합하여 한 권으로 만들어 간행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전서』 제7책에 수록되어 있다.

서지적 사항

1457년(세조 3)에 동활자(銅活字)로 간행된 이후 조선시대에 수차례 복각(覆刻)·재복각(再覆刻)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의 간본을 들면 ① 경상도 운흥사(雲興寺)판: 1482년(성종 13) ② 황해도 심원사(深源寺)판: 1525년(중종 20) ③ 경상도 광흥사(廣興寺)판: 1530년(중종 25) ④ 전라도 신안사(身安寺)판: 1537년(중종 32) ⑤ 전라도 동원사(同願寺)판(동국대학교 소장): 1569년(선조 2) ⑥ 경기도 용복사(龍腹寺)판(흥천사(興天寺)·동국대학교 소장): 1632년(인조 10) ⑦ 함경도 석왕사(釋王寺)판(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634년(인조 12) ⑧ 전라도 운주사(雲住寺)판(연세대학교 소장): 1635년(인조 13) ⑨ 경상도 운흥사판(서울대학교 소장): 1679년(숙종 5) ⑩ 경상도 봉암사(鳳巖寺)판: 1701년(숙종 27) 등이 있다.

『한국불교전서』 제7책에 수록되어 있는 용복사(龍腹寺)본을 기준으로 하면, 목판본으로 간행된 2권 2책으로 26.9×19.1㎝이다.

내용

기화의 『금강경오가해』에 대한 설의는 『금강경』 본문과 야보의 착어와 송, 그리고 종경의 제강에 대해서만 붙이고 있다. 특히 야보의 착어와 송에는 상·하권 전반을 통하여 일일이 설의를 가하였다. 전체적인 차례는 『금강경』 32분(分)의 체제에 따르고 있는데, 상권은 제1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에서 제14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까지이며, 하권이 제15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에서 제32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까지이다.

『오가해』 가운데에서 야보와 종경에 대해서만 설의를 붙이고 있는 이유에 대해 고익진(高翊晋)은 “금강반야(金剛般若)를 개연(開演)함에 있어서 오가는 각각 각도를 달리하고 있다. 규봉은 무착(無着)·세친(世親)의 십팔주(十八住)·이십칠단의설(二十七斷疑說)을 계승하여 철저하게 논리적인 입장에 서 있으며, 육조(六祖)와 부옹(傅翁)은 반야의 무상(無相)·무주(無住)·묘용(妙用)을 밝히고 있으면서도 교학적인 색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야보와 종경은 그런 교학적인 거리감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금강반야의 철저한 무상(無相)·무주(無住)는 곧 우리의 일상 현실에 밀착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 (중략) … 함허가 처해있던 여말선초는 유신(儒臣)들이 불교를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로 비난하고, 함허는 이런 배불론에 대해서 『현정론(顯正論)』을 저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함허의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그로 하여금 야보나 종경의 선적인 반야관에 뜻을 두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야보나 종경에 중점을 두는 그의 설의 방식이 잘 이해되고 이것은 또 그의 반야관이 매우 ‘현실적’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고익진의 주장에 의하면, 기화의 반야관은 매우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종밀·혜능·부대사의 교학적인 주장과는 맞지 않으며 대신에 야보와 종경의 선적인 해석과 합치한다. 나아가 이러한 인식은 불교를 비현실적이고 고답적인 것으로서 비판한 여말선초의 시대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금강경오가해설의』의 서두에 실린 혜능의 『금강경해의(金剛經解義)』에는 “대저 『금강경』이라고 하는 것은 모양이 없음을 종(宗)으로 삼고, 머뭄이 없음을 체(體)로 삼으며, 묘유(妙有)를 용(用)으로 삼는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것은 이 경을 전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치를 깨닫고 성품을 보게 하기 위해서이다(夫金剛經者 無相爲宗 無住爲體 妙有爲用 自從達磨西來 爲傳此經之意 令人悟理見性)”와 같이 『금강경』을 해설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기화는 “반야의 신령스러운 근원은 텅 비어서 어떠한 모양도 없으며, 탁 트여서 머물 곳도 없고, 공(空)하여 존재하지 않으며, 담연하여 지(知)도 없다. 지금 이 경전은 이것을 종(宗)으로 삼고 체(體)로 삼아서, 지(知)가 없으면서도 모르는 것이 없으며,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있지 않는 곳이 없고, 머뭄이 없으면서도 머물지 않는 곳이 없고, 모양이 없으면서도 제상(諸相)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것이 묘유를 용으로 삼는 까닭이다. 모든 부처가 깨달은 것은 이것을 깨달은 것이다(般若靈源 廓然無諸相 曠然無所住 空而無在 湛而無知 今此一經 以此爲宗爲體 無知而無不知 無在而無不在 無住而無所不住 無相而不礙諸相 此所以妙有爲用也 諸佛所證 蓋證此也)”와 같이 설의를 붙이고 있다.

『금강경』은 반야사상(般若思想) 즉 공(空)을 주장하는 경전이다. 그래서 혜능은 “모양이 없음을 종으로 삼고, 머뭄이 없음을 체로 삼는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기화는 “머뭄이 없으면서도 머물지 않는 곳이 없고, 모양이 없으면서도 제상(諸相)을 방해하지 않는다.”라고 설의한다. 이것은 불성(佛性)은 공한 것이 아니라, 인간세계에 신령스럽게 작용하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불교를 ‘허무적멸지도’라고 비판한 유신들에 대한 반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의의와 평가

본서는 우리나라에서 저술된 대표적인 『금강경』에 대한 해석서로서, 숭유억불시대였던 조선시대에도 끊임없이 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한글 번역본이 나오는 등 여전히 활발하게 읽히고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나라에서 『금강경』이 선(禪)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불교전서』제7책(동국대학교 한국불서전서편찬위원회, 동국대학교출판부, 1989)
『한국불교찬술문헌총록』(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동국대학교출판부, 1976)
「함허의 금강경관 고찰: 「설의」와 「윤관」을 중심으로」(김영두, 『한국선학』22, 2009)
「함허의 금강경오가해설의고」(고익진, 『한국찬술불서의 연구』, 민족사, 1987)
집필자
정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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