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선문(九山禪門) 중 남악계(南岳系)를 대표하는 대선사(大禪師)이다. 성은 왕씨. 충청남도 공주 출신. 할아버지는 숙장(淑長), 아버지는 양길(亮吉), 어머니는 김씨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남혈원(南穴院) 여해(如解)의 제자가 되었고, 서혈원(西穴院) 양부(揚孚)의 법을 이었다. 900년(효공왕 4) 당나라에 건너가 곡산도연(谷山道緣)에게 석상(石霜)의 종지(宗旨:으뜸가는 가르침)에 대해 물었는데, “대대로 일찍이 계승되지 않았다.”는 곡산의 대답에 크게 깨달았다.
그 뒤,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서 오대산으로 가는 도중 관음사에 머물렀는데, 갑자기 얼굴에 독창이 생겨 치료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홀로 열반당(涅槃堂)에 머물면서 일심으로 관음염불을 하는데, 한 노승이 나타나 숙원을 가진 사람의 원한 갚음이라 하면서, 정성껏 씻어주었는데 그 후, 독창이 깨끗이 나았다.
그 뒤, 오대산·운개(雲蓋)·동산(洞山) 등지를 순례한 뒤, 924년(태조 7) 귀국하여 강주(康州, 현재 경상도 진주)) 백암사(伯嚴寺)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진작시켰다. 경애왕은 그의 덕을 찬탄하여 서신과 함께 봉종대사(奉宗大師)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935년(경순 9) 희양산(曦陽山)봉암사(鳳巖寺)를 중창하고, 후학을 지도하였다.
고려왕실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어 태조·혜종·정종·광종의 존숭을 받았으며, 특히 광종은 그를 청하여 궁중에서 재(齋)를 베풀고 자문을 얻고자 개경의 사나선원(舍那禪院)에 머물게 하고, 증공대사(證空大師)라는 호를 내렸다. 긍양은 왕사로 책봉받은 바 있다. 2년 동안 개경에 머물다가 봉암사로 돌아와 79세로 입적하였다.
그는 중국 청원계(靑原系)의 선교일미사상(禪敎一味思想)을 계승하여 단순히 선만을 지향하지 않고 ≪능가경 楞伽經≫·≪화엄경≫을 열람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선교관은 “색과 공은 다르지 않고, 말과 침묵은 같은 것이다(色空無異 語默猶同).”라는 그의 사상을 증명하기 위하여 정종이 새로 찍은 ≪화엄경≫ 8질을 그에게 보냈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융합적 이해의 태도는 기존의 교학을 버리지 않는 선, 민간신앙까지도 포섭하는 융선적(融禪的)인 남악계의 전통을 보여준다. 특히 선의 고유성과 배타성을 강조하는 순선적(純禪的)인 북산계(北山系)와는 달리 신라적인 선풍을 유지하며 수선하는 방향을 제시해 준 것이다.
법맥은 혜능(惠能)-남악(南嶽)-마조(馬祖)-창주(滄洲)-정현(鼎賢)-도헌(道憲)-양부-긍양으로 이어진다.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과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는 모두 1963년 보물로 지정되어 문경 봉암사에 봉안되어 있다. 시호는 정진국사(靜眞國師), 탑명은 원오(圓悟)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