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덕사 일원은 일제강점기 경주 고적 보존회에서 소유하고 있었지만, 해방 후 민가에 주1 주2 주변의 대부분은 민간에서 경작지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발굴 조사가 쉽지 않았다.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1969년 1970년 두 차례 발굴되었으며, 2013년에는 경주시와 계림 문화재 연구원에 의해 망덕사지 정비 · 복원을 위한 주3 조사가 이루어졌다.
망덕사 주4 구조는 가장 남쪽에 사찰 출입 시설로 추정되는 계단이 있고, 그 북쪽에 중문이 연결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다시 북쪽으로 동서 목탑이 위치하고, 금당과 강당이 남북으로 차례대로 배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역의 동 · 서 · 남편에 주5이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금당과 동서 회랑을 연결하는 주6이 확인되었다. 이 덕분에 신라의 쌍탑 가람에서 익랑이 필수적이었음이 알려졌다. 망덕사 금당지 동서남북에 각 1개씩 계단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비슷한 시기 조성된 고선사, 감은사 금당과 동일하다. 동 · 서 목탑은 모두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7 건물로 추정되며 탑지 중심에 8각의 심초석이 있다. 각 기단면의 중앙에 계단 시설이 확인되어 사천왕사 목탑과 유사하나 그 규모가 작다. 또한 사천왕사 목탑, 감은사 금당 등이 이중 주8으로 조성된 것에 비해 망덕사의 목탑과 금당은 모두 단층 기단이다.
679년(문무왕 19)에 주9가 침입하자 신라는 사천왕사를 짓고 문두루비법(文豆婁祕法)으로 그들을 물리쳤다. 그 소문이 당나라로 전해지자 신라에서는 당나라 왕실을 위해서 사천왕사를 지은 것이라 변명하였다. 이에 당나라에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사신 악붕귀를 파견하자 그를 속이려고 임시로 절을 지었다. 망덕사라는 절의 이름은 악붕귀가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라고 부른 데에서 정해졌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692년(효소왕 1)에 절을 다시 짓고 낙성재를 베풀었다고 하고, 『삼국사기』에서는 685년(신문왕 5)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755년(경덕왕 14) 이 탑이 흔들렸는데, 그해에 중국에서 안녹산(安祿山)의 주10이 일어났으므로, 신라 사람들은 주11을 위하여 지은 절이니 마땅히 그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이 절은 황룡사(皇龍寺) · 사천왕사 · 황복사(皇福寺) 등과 함께 경주의 중요한 사찰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이 절에는 효소왕이 재를 베풀 때 진신석가(眞身釋迦)를 알아보지 못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공양한 뒤 진신석가로부터 조롱을 당한 설화와, 이 절에서 600부 『반야경』을 주12가 뜻을 이루지 못한 선율(善律)이 주13에 갔다가 경의 완성을 위하여 환생한 설화 등이 전하고 있으나 그 뒤의 사찰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현재 동 · 서 목탑지와 금당지, 강당지, 중문지, 회랑터 등이 남아 있어,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쌍탑 가람 배치를 보이고 있다. 서쪽에는 보물로 지정된 망덕사지 당간지주가 자리하고 있는데 사찰 창건 당시 같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사천왕사, 감은사 등과 함께 통일신라의 대표적 쌍탑 가람 중 하나로, 사천왕사 동 · 서 목탑지와 함께 통일신라 목탑 구조 및 쌍탑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주14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