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1962년 국보로 지정된 황복사지 삼층석탑 등 석재유물 몇 점만이 남아 있다. 절 이름으로 보아 창건이 왕실과 관계되는 것만 추정할 수 있을 뿐, 창건자 및 창건연대는 미상이다.
의상(義湘)이 출가한 사찰이며, 54대 경명왕이 사망한 후 이곳에서 화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층석탑은 692년(효소왕 1)에 왕이 아버지인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이후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즉위한 지 5년만인 706년에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탑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1942년 착수된 탑 해체수리 과정에서 2층 지붕돌 안에서 발견된 금동 사리함 뚜껑 안쪽에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다. 함께 발견된 구황동 금제 여래좌상과 금제 여래입상은 1962년 각각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 밖에 은과 동으로 만든 고배(高杯), 무수한 유리구슬, 팔찌·금실 등이 커다란 도금청동함(鍍金靑銅函) 속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유지에는 십이지상(十二支像)이 탑의 동편에 있다. 모두 9상이 남아 있는데 평복의 부조가 신라 12지상 중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세련되었으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또, 탑의 동서쪽에는 머리가 잘린 귀부(龜趺) 3좌가 있는데, 이는 탑비(塔碑) 또는 가람비(伽藍碑)의 귀부로 추정되며, 이 근처에서 비편(碑片)들이 발견되었다. 이 밖에도 당간지주(幢竿支柱) 일부와 석정(石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