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은 불교의 한 종파이다. 신라 말에 남종선이 전래된 뒤 고려에 이르기까지 선사들의 비문이나 행적기에 있는 조계라는 낱말은 중국 선종의 제6조 혜능(慧能)을 가리킨다. 1424년(세종 6) 예조의 계청에 따라 불교의 모든 종파를 통합하여 선종과 교종만을 남기게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30개 교구로 나누어진 불교계는 각황사에 연합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일제강점기 선교양종이라고 하다가, 1941년 태고사(현 조계사)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고, 종단 이름을 조계종이라 하였다.
고려시대의 11종(宗), 조선시대의 7종 가운데 하나이며, 근대 불교계 유일의 종파로 재발족되었던 종단이다. 고려시대에 처음 성립되었으나 언제 누구에 의하여 어떻게 이루어진 종파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을 알 수 없으며, 내력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분분하다.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불교통사』의 「보조후시설조계종조(普照後始設曹溪宗條)」에서, 지눌(知訥)이 순천의 송광산 길상사(吉祥寺) 터에 새로 조계산 수선사(修禪社)를 개설하여 선풍(禪風)을 크게 천양한 뒤로부터 조계종이 창설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최근까지도 극히 소수이기는 하나 몇몇 학자에 의해 답습되어 왔다.
그러나 훨씬 이전부터 조계종의 이름이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지눌은 물론 그 후대에서도 조계산 수선사를 조계종이라고 지칭한 일은 없었다. 그 조계산은 어디까지나 수선(修禪)하는 사사(寺社)가 있는 장소의 산 이름이었지 종파의 이름[宗名]은 아니었다.
현존 사료에서 조계종이라는 분명한 종파이름을 볼 수 있는 첫 사례는 탄연(坦然)의 비문 제목인 「고려국조계종 굴산하단속사대감국사지비(高麗國曹溪宗堀山下斷俗寺大鑑國師之碑)」이다. 이 비는 1172년(명종 2) 1월에 세워졌으므로 지눌이 15세일 때가 되며, 따라서 그가 조계산 수선사를 시작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조계종 이름을 새긴 비가 서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비록 종(宗)이라는 글자는 붙어 있지 않아도, 이 비문보다 이전에 조계종이 성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사례가 있다. 1185년(명종 15)에 세운 예천 용문사중수비(龍門寺重修碑)에는 “대선사 조응(祖膺)이 을사년에 조계선에 합격하였다(乙巳年曹溪選中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의 을사년은 1125년(인종 3)이며, 조계선은 승선(僧選:僧科)을 말한다. 그리고 1125년은 지눌이 출생하기 33년 전이므로, 이를 통하여 조계종이 이미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점사 사적기(楡岾寺事蹟記)에는 “명종 19년(1189)에 조계대선사(曹溪大禪師)익장(益藏)이 금강산 유점사에 내임(來任)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의 조계 역시 종을 가리키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익장이 조계종 대선사였음을 알 수 있다. 대선사란 승려국가고시인 승과에 합격하여 대덕(大德)이 된 자가 오르게 되는 법계(法階) 중에서 선종 승려로서는 가장 높은 법계가 된다.
그러므로 19대 명종 때 이미 대선사의 법계에 올라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조계종의 연원이 상당히 오래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하여 지눌의 조계산 개설 훨씬 이전에 이미 조계종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조계산 자체가 종파이름이 아니며, 조계종은 지눌의 조계산과는 상관없이 성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계종 이름이나 그 종이 성립되었을 가능성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대각국사(大覺國師)의천(義天)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다. 앞에서 본 조계종 관계의 자료들은 모두가 의천이 천태종을 세운(숙종 2년 1097년에 國淸寺를 창건하고 天台敎學을 開講한) 뒤의 것들이다.
이로 미루어 그 때까지 구산문(九山門)으로 형성되어 있던 남종(南宗) 중심의 선법 계통이 범칭적인 선종의 형태를 유지하여 오다가, 천태종 등과 같은 선명한 종파명을 가지기 위하여 조계종이라는 종명을 택하게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고려 중기 이후 말기에 이르는 구산선문 계통 승려들의 비문이나 행적 등에는 어느 산파를 막론하고 거의가 ‘조계종하 모산모(曹溪宗下某山某)……’라고 한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 때의 조계종은 신라 말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각 산문선파(山門禪派)가 9개 산문을 이루어오다가 하나의 종으로 결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조계종의 연원은 선문구산이 된다. 이들 9개 선파가 하나의 종파로 묶여 조계종이라고 이름한 것을 통해서도 조계종이 어떠한 성격의 종파인지를 알 수 있다. 조계종의 조계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를 파악함으로써 그 종파의 성격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 말에 남종의 선법[南宗禪, 南頓禪] 전래된 뒤 고려대에 이르기까지 선사들의 비문이나 행적기에는 조계라는 낱말이 많이 있다. 그러한 경우의 조계란 모두가 중국 선종의 제6조 혜능(慧能)을 가리키고 있다. 혜능이 선법을 크게 선양했던 곳이 조계의 보림사(寶林寺)이므로 그를 가리켜 조계라고 하였던 것이다.
특히, 구산문 중의 하나인 수미산파(須彌山派)의 조사 이엄(利嚴)의 광조사진철대사비(廣照寺眞澈大師碑)와 비로사진공대사비(毗○寺眞空大師碑) 및 정토사법경대사비(淨土寺法鏡大師碑) 등은 모두 고려 태조 때 건립한 것으로 비문에는 “조계를 할아버지(法祖)로 삼고, 진리의 가르침이 길이 흐르다(曹溪爲祖 法水長流).”, “조계를 할아버지로 삼고, 대대로 이어 이에 이르다(曹溪爲祖 代代相契至于).”, 또는 “조계의 선지(曹溪之旨)”, “조계를 조로 하다(曹溪爲祖).”라는 글귀들이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사례들을 통하여 조계종의 조계는 분명히 조계 혜능을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아울러 조계종은 중국의 조계 혜능을 법조로 삼고 조계의 선지를 종으로 하는 종파임을 알 수 있다.
일연(一然)의 비인 인각사보각국사비(麟角寺普覺國師碑)에, “인도의 28조사와 중국의 5조사에 의하여 전해진 선법이 이어져와서 조계의 한 파가 동쪽 땅으로 건너왔다(唯是法輪密付單傳 竺乾列宿中夏五葉 世隔人回光光相接 曹溪一派東浸扶桑).”라고 한 것은 바로 그 증언이라고 할 것이다.
조계의 한 파란 혜능의 선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당시 고려에 있던 여러 종파가 천태종 · 자은종(慈恩宗) · 남산종(南山宗) · 현수종(賢首宗:화엄종의 별칭) 등으로 각각 그 종의 성립된 곳이나 완성시킨 인물을 지칭하여 종명을 취한 경향을 따라 조계종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고려의 종명은 거의 모두가 의천이 송나라에서 돌아와 천태종을 세우고 난 뒤에 보이고 있으므로, 조계종이라는 종명도 그 무렵에 붙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지눌이 조계산 수선사를 열고부터는 종래의 9개 산파와 더불어 10산이 된 셈이므로 조계종은 그 세력이 매우 흥성한 편이었다.
고려 후기로 내려오면서 더욱 조계종은 당시 불교계의 중심적인 종파가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왕조로 바뀌면서도 적지않은 고승선사가 배출되었으나, 태종 이후 합종(合宗)과 폐종(廢宗)의 억불정책을 만나게 되었다. 1406년(태종 6) 2월 조정의 억불책에 분연히 일어나 수백 명의 승려들을 이끌고 신문고(申聞鼓)를 쳐서 진정한 바 있는 성민(省敏)은 조계종의 승려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 해 3월 의정부의 계청(啓請)에 따라 전국에 남겨둘 절의 수와 토지 및 노비의 범위를 정하고, 그 밖의 절과 토지 등을 모두 몰수하여 버렸다. 그 때 조계종은 총지종(摠持宗)과 합쳐져 모두 70개의 절만이 남게 되었다. 1424년(세종 6) 4월 예조의 계청에 따라 모든 종파를 폐합하여 선종과 교종만을 남기게 하였는데, 그 때 조계종은 천태종 · 총남종과 함께 선종으로 합쳐졌다.
그리하여 고려 일대를 통하여 불교계를 대표하는 종파로 이어져 왔던 조계종은 선종이라는 새로운 종파 속으로 들어가 그 이름을 잃고 말았다. 세종 6년 이후 선종 속으로 들어가 그 종명을 잃어버린 조계종은 선종이라는 복합종단 안에서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중에 성종 때의 억불과 연산군 · 중종 때의 폐불을 겪는 동안에 불교계는 선종과 교종이라는 두 종파마저 잃게 되었다.
표면적 종파이름만이 아니고 교단 내부에서도 선종이니 교종이니 하는 차별이 없어졌다. 그러한 무종무파(無宗無派)의 현상 속에서도 그 법맥을 이어온 것은 조계종 계통이었다. 조선 중엽의 불교 암흑기를 산중에서나마 중흥시킨 휴정(休靜)이나 그의 제자 유정(惟政)은 ‘조계퇴은(曹溪退隱)’ 또는 ‘조계종유(曹溪宗遺)’로 자처하여, 그들의 계통이 조계종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계종의 옛 이름을 되찾게 된 것은 몇 백년 뒤의 일이었다. 산 속에 깊이 숨어 종명에 관심이 없었던 불교계가, 도성출입금지가 풀리고 남의 나라 불교종파가 서울에 들어오는 급변한 시대를 만나 나름대로의 종명을 붙이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1908년에 발족한 원종(圓宗)이었다. 이어서 1911년에는 임제종(臨濟宗)이 생겨났다.
그러나 1911년 6월 제정 반포된 「사찰령」에 이어 7월 8일 「사찰령시행규칙」이 발표, 실시됨으로써, 이 땅의 불교는 조선불교선교양종30본산(朝鮮佛敎禪敎兩宗三十本山)으로 형성되어 다시 종파이름을 잃어버렸다. 이와 같이 30본산, 곧 30개의 교구로 나누어진 일제치하의 불교계에서는 각 본사(本寺)의 유기적인 연관관계를 꾀하여 30본산회의소(三十本山會議所)를 설치하였다. 1914년에 연합제규(聯合制規)를 제정하고, 각황사(覺皇寺)에 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이 연합사무소는 이름 그대로 30본산의 연합사무만을 집행하였을 뿐 전국 사찰을 통할하고 전체승려를 통제하는 권한은 없었다. 그리하여 실질적인 중앙통제기관의 필요성에 의하여, 1921년 초 연합사무소를 종무원(宗務院)으로 고쳐 중앙통제기구의 체제를 갖추었으나 총독부에서 허가하지 않았으므로 흐지부지되었다가, 신진승려들의 적극적인 활동과 교단 내의 자각에 의하여 1922년 1월 중앙총무원(中央總務院)이 각황사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에 가담하지 않은 본사들이 합심하여 그 해 5월에 중앙교무원(中央敎務院)을 역시 각황사 안에 설치하였다. 그러다가 1925년에 양쪽이 타협하여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통일된 중앙통제의 종무기구를 이룩하였다.
1928년 1월 승려대회를 열고 종헌(宗憲)과 교무원원칙(敎務院院則) 및 교정회법(敎正會法) · 종회법(宗會法) 등을 제정하였으며, 교정(敎正) 7명을 선출하여 종단 최고의 원로기관으로 삼았다. 의결기관으로서의 종회는 본사와 말사의 평의원회(評議員會)에서 뽑은 종회의원으로 구성되었다. 사무기관으로서의 중앙교무원에는 서무부 · 재무부 · 교학부를 두었다.
이리하여 한 종단으로서의 모든 것을 거의 다 갖추었다고 할 수는 있으나, 조선불교선교양종이라는 종명은 불분명한 데가 있었다. 결국 선명한 종명과 특징 있는 종지를 갖춘 종단을 지향하는 제도적인 보완이 요청되어 근본적인 개신(改新)의 움직임이 표면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941년 봄태고사(太古寺:지금의 조계사)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고, 종단 이름을 조계종으로 결정하였다. 일본 총독부의 「사찰령」 이후 줄곧 선교양종이라는 불분명한 종명을 써오다가, 이 때 비로소 조계종이라는 종명을 확정하게 된 것이다.
1941년 4월 23일 조선불교조계종총본사 태고사사법(朝鮮佛敎曹溪宗總本寺太古寺寺法)의 인가를 얻었다. 새로운 조계종으로 발족한 종단에서는 제1세 종정을 중원(重遠)으로 추대하고, 그 해 6월 6일 총본사 종무원에서 종무를 시작하였다.
종정에 추대된 중원으로부터 종정취임의 승락을 받고, 8월 4일 총독부로부터 종정취임인가를 얻었다. 9월 18일 종무고문 6인과 종무총장의 명단을 발표하였다. 종무원에는 서무부 · 교무부 · 재무부의 부서를 두었다. 또, 종회법 · 승규법 등을 제정, 발표하였다.
이와 같이 유일한 종단으로서의 종명을 가지고 새로이 출발하였던 조선불교조계종은 광복을 맞이하여 한국불교조계종으로 재정비하기에 이르렀다. 그 해 10월에 전국승려대회를 열고, 일본총독의 「사찰령」과 그 때까지의 「조계종총본산태고사사법」 등을 폐지하는 한편 새로운 교헌(敎憲)을 제정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초대 교정(初代敎正)에 박한영(朴漢永)을 추대하고, 중앙총무원장에 김법린(金法麟)을 선출하여 재출발을 하게 되었다. 현재의 대한불교조계종은 이 맥을 이어 우리나라 최대 불교종파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