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5년(명종 15) 건립. 높이 195㎝, 너비 93㎝, 두께10㎝. 고려 중기 이후로 나타나는 위쪽의 두 모서리를 귀접이한 규수형 비신의 형식으로 비신의 가장자리에 당초문대(唐草文帶)를 선각하고 있는데 아랫부분은 당초문 아래로 연꽃을 선각하고 있어 비 자체에 연화좌를 형상화 하고 있다. 상단부의 가운데 제액(題額)이 있는데 ‘重修龍門寺記(중수용문사기)’가 3행 행2자씩 해서로 음각되어 있다. 이 제액 양 옆으로 보상화문은 새겨 당초문과 함께 비를 장엄하고 있다.
비문은 당대의 명신 이지명(李知命)이 지었고, 글씨는 보제사(普濟寺) 주지 연의(淵懿)가 썼으며, 곡석(斛錫)이 새겼다. 비문의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의 행서에 기본을 둔 활달한 필치로, 당시 유행하던 탄연풍(坦然風)을 따랐다.
비문에 의하면, 용문사는 신라의 두운선사(杜雲禪師)가 범일국사(梵日國師)와 함께 당나라에 다녀온 뒤 개창한 절이다.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합하려 할 때 두운선사의 명망을 듣고 선사를 찾아 이곳에 들어오려 함에 입구의 바위 위에 용이 나타나 그를 맞이하였으므로 절의 이름을 용문사라 하였다 한다.
태조는 30칸의 건물을 짓고 해마다 150석을 주어 공양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 뒤 1165년(의종 19) 조응선사(祖膺禪師)가 불당 3칸과 승방·주고(廚庫) 93곳을 지었으며, 1171년(명종 1)에는 황태자의 태(胎)를 묻는 곳을 절문 밖 왼편 봉우리에 정하게 되면서 이후 창기사(昌期寺)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1179년에는 중창공사를 마치고 9산의 학승 500명을 모아 50일간 담선회(談禪會)를 베풀어 낙성을 삼았다 한다.
또한, 1173년에는 국난을 구하기 위하여 삼만승재(三萬僧齋:왕실에서 큰 법회를 열고 모인 중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던 일)를 베풀고 윤대장(輪大藏) 2좌와 불당 3칸을 두어 7일간의 법회를 일으켰다는 기록 등이 비문에 보인다. 한편, 비음(碑陰 : 비의 뒷면)에는 용문사 불제자들의 승직명과 법명이 해서로 새겨져 있는데, 1188년의 기년(祈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