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은 조선시대 청허 휴정(淸虛休靜)의 제자이자 사명파의 조사로서 임진왜란 때 의승군을 이끈 승장이다. 승과 합격 후 휴정의 법을 이었고 임진왜란 당시 강원도에서 의승군을 일으킨 후 도총섭으로서 전투, 산성 수축, 군량 조달 등을 지휘했다. 전후에 왕명으로 일본에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화친 방안을 논의했다. 선과 교에 모두 정통했으며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을 남긴 조선시대 불교의 대표적 고승이다.
7세를 전후하여 『사략』을 배우고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를 배웠다.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어 다음 해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신묵(信默)에게 출가했다. 1561년에 승과(僧科)에 합격하고 박순(朴淳), 임제(林悌) 등 유생들과 교유했으며, 재상인 노수신(盧守愼)으로부터 『노자』, 『장자』, 『열자』 등과 시를 배웠다. 그 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다. 1575년(선조 8)에 선종(禪宗) 본사였던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을 찾아가 배우고 법을 이어받았다.
1578년부터 팔공산 · 금강산 · 청량산 · 태백산 등을 다니며 수행에 전념했고,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1589년에 정여립(鄭汝立)의 역모 사건에 연류되었다는 모함을 받았으나, 무죄로 판명되어 석방되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금강산에 있었는데 유점사(楡岾寺)에 온 일본군의 횡포를 막고 절과 승려를 무사히 지켜냈다.
같은 해 7월 휴정이 평안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서 전국에 격문을 보내자 유정은 강원도에서 800여 명의 승군을 일으켰다. 5,000명이 넘게 모인 전국의 의승군은 다음 해 평양성과 행주산성 전투 등에 참전해 평양과 서울을 수복하는 데 큰 전공을 세웠다. 유정은 연로한 스승 휴정을 대신해 8도 도총섭에 임명된 후 전체 의승군을 이끌었고, 군량 보급, 각지의 산성 축조와 수호 등의 중책도 맡았다. 특히 일본군과의 강화 교섭 과정에서 울산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네 차례나 만나 적의 정세와 강화 조약 내용을 탐문하고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와 같은 대비책을 올리기도 했다. 당시 가토가 “조선에 보배가 있는가?”라고 묻자 유정은 “당신의 머리가 우리나라의 보배이다.”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유정이 승군을 통솔하여 수축한 산성만 해도 팔공산성(八公山城) · 금오산성(金烏山城) · 용기산성(龍起山城) · 악견산성(岳堅山城) · 이숭산성(李崇山城, 또는 美崇山城) 등이며, 군기 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일본군의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 제조법과 조총 사용법을 전수하게 했다.
또 1594년 경상도 의령에 있을 때는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게 했고, 산성 주위를 개간하여 군량미 4,000여 석을 모았다. 1604년에는 일본에 탐적사로 파견되어,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회담을 갖고 포로 쇄환, 국교 재개 등 전후 처리와 외교 문제를 논의했다. 이때 원래는 휴정의 부음을 듣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명으로 일본에 가서 외교 활동을 펼치게 된 것으로 다음 해 4월에 귀국하여 10월에 묘향산에 가서 스승의 영전에 절했다. 만년에는 해인사(海印寺)에 주석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했다.
선과 교에 모두 정통했던 사명 유정은 저서로 문집인 『사명당대사집』 7권을 남겼고, 후대에 그와 관련된 기문을 모은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1권이 간행되었다.
유정의 문하에서 3파가 나왔지만 적전 제자는 송월 응상(松月應祥, 1572∼1645)이었다. 응상의 법을 이은 허백 명조(虛白明照, 1593∼1661)는 조사 유정을 이어 정묘호란 때 팔도 승병 대장으로 평안도 안주에서 4천의 승군을 이끌었고 병자호란 때는 군량 보급을 담당했다. 이처럼 당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유정의 위상으로 인해 사명파는 17세기까지 청허계의 주류 문파로서 권위를 이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