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禪師)·승병장(僧兵將). 성은 이씨, 이름은 희국(希國), 호는 허백당(虛白堂). 충청도 홍주 출신. 아버지는 통정대부 춘문(春文), 어머니는 한씨이다.
13세에 묘향산으로 출가하여 사명 유정(四溟惟政)의 제자가 되었으며, 유정이 왕명을 받아 일본으로 떠나자 유정의 제자인 인영(印暎)을 따르면서 선(禪)을 닦고 불경을 공부하였다. 그 뒤 원준(圓俊)에게서 화엄대교(華嚴大敎)를 배웠고 송월 응상(松月應祥)에게서 선법을 전해 받았으며, 지리산에 들어가서 수행하다가 다시 묘향산으로 옮겼다.
1626년(인조 4) 후금(後金)이 국경을 위협하자 조정에서는 팔도의승병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관서지방에서 의승병 4,000명을 모집하여 평양에 주둔하면서 군대를 훈련시킨 뒤 안주(安州)에 진을 치고 있다가 이듬해에 적이 국경을 넘어 침입하자 이에 맞서 싸웠다.
그 뒤 묘향산에 머무르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관서지방 안찰사 민성휘(閔聖徽)의 부탁으로 의승병 대장이 되어 관서지방 관민을 동원하고 곡식을 수집하여 군량미를 충당하였다.
1637년 정월에 인조가 항복하여 청나라 군사가 물러간 뒤 조정에서는 그 공을 높이 사서 ‘가선대부 국일도대선사 부종수교 복국우세 비지쌍운 의승도대장 등계(嘉善大夫 國一都大禪師 扶宗樹敎 福國祐世 悲智雙運 義僧都大將 登階)’의 직호와 직첩을 제수하였으나, 국왕이 청나라에 항복한 것이 통분하여 직첩을 받지 않았다.
그 뒤 금강산·지리산 등을 순례하면서 여러 선원에서 한 철씩 참선을 하거나 불경을 강설하여 후학들을 지도했는데, 이르는 곳마다 수백 명의 참학자들이 모였다. 그 뒤 구월산 패엽사(貝葉寺)에 머물며 불경을 강의했으며, 만년에는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선방의 조실로 있으면서 참선 공부하는 학인들을 지도하였다.
1658년 불영대(佛影臺)에 토굴을 짓고 3년 동안 머무르다가, 하루는 묘향산 여러 암자를 둘러본 뒤 우물물을 마신 후 “나는 이제 가네.”라고 말한 다음 보현사에 와서 임종게를 남기고 나이 68세, 법랍 56세로 열반하였다.
제자들이 화장하여 사리 수십 매를 얻어서 보현사 서쪽에 부도를 세웠으며, 나머지 사리는 금강산·보개산·구월산과 해남 대둔사(大芚寺) 등 그와 인연이 깊었던 사찰에 부도를 세우고 안치하였다. 그는 선종과 교종에 두루 통한 고승이었으며, 특히 장자(莊子)의 사상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
법맥은 청허 휴정(淸虛休靜)-사명 유정-송월 응상-허백 명조로 이어지며, 그의 법맥을 이은 제자로는 의흠(義欽)·각흠(覺欽)·숭헌(崇憲)·쌍민(雙敏) 등 수십 명이 있다. 1662년(현종 3) 제자 삼인(三印)·설해(雪海) 등이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의 글을 받아 보현사에 있는 부도 옆에 비를 세웠다.
저서로는 1669년 제자 남인(南印)이 간행한 시문집 ≪허백당시집 虛白堂詩集≫ 3권과 ≪승가예의문 僧伽禮儀文≫ 1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