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산성 ()

건축
유적
문화재
고려 후기 이후,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산 33번지와 김천시 남면 오봉리, 칠곡군 북삼면 지경리에 걸쳐 축조한 산성. 시도기념물.
유적
건립 시기
고려시대
관련 국가
고려, 조선
관련 인물
정방준(鄭邦俊)
둘레
9,880.87m
소재지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산 33번지, 김천시 남면 오봉리, 칠곡군 북삼면 지경리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경상북도
종목
시도기념물(1986년 12월 11일 지정)
소재지
내용 요약

금오산성(金娛山城)은 대부분 경상북도 구미시에 속해 있고, 남쪽의 성벽은 경상북도 칠곡군, 서쪽의 성벽은 경상북도 김천시에 속해 있다. 내성은 해발 976.5m 현월봉의 금오산 정상부를 감싸면서 퇴뫼식으로 축조하였고, 외성은 정상부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계곡을 낀 능선에 포곡식으로 축조하였다. 성벽의 둘레는 내성 5,510.75m, 외성 4,370.12m로 총 9,880.87m이다.

목차
정의
고려 후기 이후,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산 33번지와 김천시 남면 오봉리, 칠곡군 북삼면 지경리에 걸쳐 축조한 산성. 시도기념물.
연혁

금오산성의 초축 연대는 문헌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 말에는 인동, 개령, 성주의 백성들이 왜구의 침입을 피하여 성 안에 들어와 사는 자가 매우 많았으며 병사를 징발하여 성을 지키게 하였고, 조선 초에는 여기에 주4도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는 이미 성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인 1410년(태종 10)과 1413년(태종 13)에 성을 주5한 기록이 있다. 금오산성은 임진왜란 때 인동의 천생산성과 더불어 영남 지역의 요충지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산성이 왜적의 손에 들어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

1606년(선조 39)에 금오산성의 내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였다. 금오산성 수성장이자 산성 수축 당시 감동관(監董官)이었던 정방준(鄭邦俊)이 쓴 「축성금오시일기(築城金烏時日記)」[^6]가 있어 당시 금오산성의 수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1606년(선조 39) 4월 1일 승군(僧軍)을 주축으로 벌목을 시작하여 금산 · 선산 · 지례 · 상주 · 고령 · 용궁 · 예천 · 합천 · 거창 등 9개 고을의 주7들이 금오산성을 쌓는 일에 동원되었으며, 1606년 10월 23일 성이 완성되었다. 성을 쌓기 위해 먼저 벌목과 주8 작업을 한 뒤, 산성의 제일 중요한 요소인 물을 확보하기 위해 주9, 우물을 만들었다. 이어 창고나 군기고 등을 마련하였고, 그 위에 성곽의 몸체를 본격적으로 쌓았으며, 주10, 주11 등을 정비했다. 이렇게 금오산성을 수축하는 데 대략 7개월 정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수축 당시 주12의 모양과 같이 산성의 외면은 높고 가파르게 만들고 내면은 평탄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전에 놓였던 주14을 제거하고 대석을 놓았는데, 이는 여장(女牆, 주13 안에 말이 달리거나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1639년(인조 17) 경상감사 이병진의 건의로 금오산성의 외성이 축조되었다. 선산군수 이각(李恪)이 외성의 축조를 담당하였다. 당시 축조한 외성은 둘레 4,135척, 높이 14척으로 개령, 금산, 지례 지역의 군량과 병기를 비축하였다. 1735년(영조 11) 선산부는 우병사영 관하의 주18으로 승격되었고, 선산도호부사가 금오산성 별장을 겸임하였다. 이때 금오산성진의 병력은 3,500명에 이르렀다.

발굴 경위 및 결과

금오산성 지표 조사 결과 북문, 남문, 서문, 중문 등 성문 4개소가 확인되었으며, 일부는 주15으로 쌓았고 경사면은 편축식으로 축조하였다. 북문은 홍예식(虹霓式, 주16 주17으로 복원해 ‘대혜문(大惠門)’이란 현판을 걸었다. 내성의 성안마을 입구에는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이후 유비무환의 자세로 국방을 지키기 위해 산성을 고쳐 쌓은 기록이 담긴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원전

『태종실록』
『세종실록』
『선조실록』
『인조실록』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경상도속찬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일선지(一善志)』

단행본

김호종 외, 『금오산성: 정밀지표조사 및 종합정비계획』(동국문화재연구원, 2016)
구미문화원, 『금오산성 축성일지』(1996)
구미시·안동대학교, 『금오산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1994)
윤용진, 『금오산성 기초조사보고서』(경북대학교 고고인류학과·경상북도 구미시, 1985)

논문

엄민형, 「임진왜란시기 수성전과 축성기술변천연구」(강원대학교석사논문, 2019)
장필기, 「임진왜란 직후 축성역 동원체계의 한 형태–금오산성 수성장 정방준의 축성일기를 중심으로-」(『고문서연구』 25호, 2004)
주석
주1

현월봉

주2

마치 띠를 두르듯 산 정상부를 빙 둘러 가며 쌓아 올린 산성. 우리말샘

주3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주변 계곡 일대를 돌아가며 벽을 쌓는 방식. 우리말샘

주4

군대의 창고. 우리말샘

주5

집이나 다리, 방죽 따위의 헐어진 곳을 고쳐 짓거나 보수함. 우리말샘

주6

『삼송유고(三松遺稿』 권2

주7

군급(郡級) 기관에서 일하는 일꾼. 우리말샘

주8

땅을 반반하고 고르게 만듦. 또는 그런 일. 우리말샘

주9

발전(發電), 수리(水利) 따위의 목적으로 강이나 바닷물을 막아 두기 위하여 쌓은 둑. 우리말샘

주10

성가퀴를 앞으로 튀어나오게 쌓고 지붕을 덮은 부분. 우리말샘

주11

궁문,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 우리말샘

주12

일본식 성 또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 축조한 성. 평탄한 산 정상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가장 높은 곳에 천수대라 불리는 누각을 설치하였다. 천수대를 중심으로 이중 삼중의 구획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우리나라 남해안 해안가를 따라서 서생포 왜성, 부산 왜성, 사천 선진리 왜성, 순천 왜성 따위가 남아 있다. 우리말샘

주13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주14

토목, 건축 따위에 막 쓰는 허드레 돌덩이. 우리말샘

주15

성을 쌓을 때, 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을 쌓는 일. 우리말샘

주16

공중에 떠 있는 물방울이 햇빛을 받아 나타나는, 반원 모양의 일곱 빛깔의 줄. 흔히 비가 그친 뒤 태양의 반대쪽에서 나타난다. 보통 바깥쪽에서부터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 보라의 차례이다. 우리말샘

주17

다락으로 오르내리는 문. 우리말샘

주18

조선 시대에, 각 고을에 독립하여 있던 진영(鎭營). 우리말샘

집필자
최인선(순천대학교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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