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낙안읍성 ( )

건축
유적
문화재
조선 전기, 전라남도 순천시에 있는 조선시대 석축 읍성. 사적.
유적
건립 시기
조선 전기 15세기 중엽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김윤길, 임경업
높이
3∼5m
둘레
1,468m
소재지
전라남도 순천식 낙안면 동내리, 서대리, 남내리 일대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83년 6월 14일 지정)
소재지
내용 요약

순천 낙안읍성(順天 樂安邑城)은 낙안의 진산인 금전산(金錢山, 해발 668m), 오봉산, 개운산, 제석산, 백이산이 외곽을 두른 평지인 낙안들에 있는 연해읍성이다. 이 읍성은 1424년(세종 6) 9월 낙안군의 토성이 낮고 작아서 왜변이 있을 경우 지키기 어려우니 돌을 섞어서 토성 옛터를 좀 넓혀 성을 쌓았다고 한다. 성벽은 전 구간에 걸쳐 내외벽을 구축한 협축식(夾築式)으로 축성하였고, 외벽의 길이는 1,468m에 이른다.

정의
조선 전기, 전라남도 순천시에 있는 조선시대 석축 읍성. 사적.
연혁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4년(세종 6) 9월 전라도 낙안군의 토성이 낮고 작아서 주2이 있으면 지키기 어려우니, 돌을 섞어서 토성 옛터를 좀 넓혀 성을 쌓았다고 한다. 낙안 출신의 절제사 김윤길(金贇吉, ?∼1405)이 1394년(태조 3)에 주3가 되었고 1397년(태조 6)에 전라도수군도절제사(정3품)로 승진하였으므로 이 무렵 낙안토성이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세종은 우의정 최윤덕(崔潤德) 등을 독려하여 1435년부터 1444년경까지 연해읍성을 거의 석성으로 쌓았고, 1454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낙안읍성이 석성으로 표기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현재와 같은 석축성 형태의 낙악읍성은 15세기 중엽에 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규모와 축조 방식

순천 낙안읍성은 조선 초기에 쌓은 석성임에도 불구하고 성문 주변뿐만 아니라 전 구간에 걸쳐 내외벽을 주4으로 쌓았다. 읍성 외벽의 길이는 1,468m, 내벽의 길이는 1,351m이며, 하부 너비는 4.2∼5.9m, 상부 너비는 3.5∼5.1m, 높이는 3∼5m 정도이다.

발굴 조사 및 정비 과정

1983년 낙안읍성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될 당시, 동문 주변을 비롯해서 비교적 몇 곳만 성의 형태가 제대로 남아 있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절반 정도만 남은 상태였다. 특히 6 · 25전쟁 후에 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고 한다.

1984년부터 정비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동문과 서문이 복원되었고 성벽도 정비되었다. 2019년부터 2021년까지 동벽 ‧ 남벽 ‧ 북벽의 일부 구간이 무너지고 주5 현상이 나타나 정비 보수를 진행하였다. 체성(体城)의 성벽이 붕괴된 이유는 심석(攳石)을 쓰지 않고 면석쌓기를 하고 내외벽 사이에 흙과 돌을 채워 넣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구간의 성벽은 최하단까지 해체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주6이 모두 드러났다. 생토면을 고른 위에 지대석을 정연하게 놓고 심석도 일부 놓아 튼튼하게 만든 기초부의 지대석은 해체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체성(体城)의 하단석을 15cm 정도 들여서 쌓은 조선 전기 축성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문의 주변 즉 육축(陸築)한 부분과 주9은 큰 성돌을 이용하여 다른 성벽보다 더 튼튼하게 축조하였다. 동문과 치(雉) 사이의 성돌은 아랫돌로 260cm x 90cm와 180cm x 80cm 정도 되는 큰 돌을 이용하였고, 중간은 55x26cm와 50x40cm 정도의 작은 돌을 사용하였다. 성돌로 할석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돌 사이 빈 공간에 쐐기돌을 끼워 넣었다.

성문은 동 ‧ 서 ‧ 남문이 각 변의 중앙에 개설되어 있는데 동문과 남문은 문루까지 복원되어 낙풍루(樂豐樓)와 쌍청루(雙淸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구전에 의하면 원래 북문도 만들었는데 주7이 잦아 금둔산과 가까운 북문을 가장 먼저 폐쇄하였다고 한다. 동문과 남문은 주8으로 팔작지붕으로 된 2층루이며, 사각형의 옹성이 문을 보호하고 있다.

여장(女牆)주10은 전 구간이 아니라 동문과 남문의 주변 그리고 옹성에만 복원하였다. 여장에는 주11주12가 있다. 여장의 형식은 주13에 속한다.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치성(雉城)은 사각형 모양으로 4개가 돌출되어 있고, 북벽 모서리 부분에 있는 치는 길이 10.4m, 너비 6.9m, 높이 4.7m로 가장 크다.

16세기 전반 이후 만들어진 해자(垓子)는 동북 모서리 부분에서 시작되어 남문을 지나 밖으로 빠져 나가고 있다. 해자의 너비는 4.2∼4.7m 정도이다.

읍성 내에는 동서대로의 우측에 동헌, 주14, 객사, 주15 등의 관아 건물이 복원되어 있고, 좌측에는 생활하고 있는 민가들이 있다. 읍성 중앙에 선정을 베풀었던 군수 임경업(1594∼1646)주16가 있다. 지금도 그의 영혼이 이 마을을 수호한다는 전설이 있어 매년 정월 보름에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순천 낙안읍성의 동문 해자 밖에 석구(石狗)를 배치하여 수호신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이는 풍수지리상의 주17와 관련이 있다.

의의

순천 낙안읍성은 가장 완전한 형태로 보존된 조선시대 읍성 가운데 한 곳이다. 성 안의 마을도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참고문헌

원전

『세종실록』
『문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대동지지』
『낙안읍지』

단행본

에이치비건설주식회사, 『2020년 낙안읍성 서문성곽 긴급 보수사업 수리보고서』(순천시, 2020)
신정종합건설, 『2019년 낙안읍성 서문성곽 긴급 보수사업 수리보고서』(순천시, 2019)
솔종합건설, 『낙안읍성 수리보고서–성곽복구 및 응급보수-』(순천, 2017)
최인선 외, 『순천시의 성곽과 봉수』(순천대학교 문화유산연구소, 2007)
순천대학교박물관, 『낙안과 낙안읍성』(순천대학교박물관‧순천시, 2001)
송갑득, 『낙안읍성』(순천시, 1999)
심정보, 『한국 읍성의 연구』(학연문화사, 1995)

논문

김상태, 「전통지리사상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읍성연구」(영남대학교 박사논문, 2017)
이기봉, 「낙안읍성의 입지와 구조 그리고 경관」(『한국역사지리학회지』 14-1, 2008)
주석
주1

해발 668m

주2

왜인들이 일으킨 변. 우리말샘

주3

종3품

주4

성을 쌓을 때, 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을 쌓는 방식. 우리말샘

주5

기둥의 중간이 배가 부르고 아래위로 가면서 점점 가늘어지게 만드는 방법. 구조의 안정과 착시 현상을 바로잡기 위한 수법으로, 그리스를 비롯한 한국ㆍ중국ㆍ일본 등의 고대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말샘

주6

건축물을 세우기 위하여 잡은 터에 쌓은 돌. 우리말샘

주7

호랑이에게 당하는 화(禍). 우리말샘

주8

다락으로 오르내리는 문. 우리말샘

주9

쇠로 만든 독처럼 튼튼하게 둘러쌓은 산성이라는 뜻으로, 방비나 단결 따위가 견고한 사물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0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주11

몸을 숨긴 채로 총을 쏘기 위하여 성벽, 보루(堡壘) 따위에 뚫어 놓은 구멍. 우리말샘

주12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주13

성 위에 낮게 쌓은, 위가 편평한 담. 우리말샘

주14

조선 시대에, 지방 관아에 있던 안채. 우리말샘

주15

죄인을 가두어 두는 건물. 우리말샘

주16

예전에, 백성을 어질게 다스린 벼슬아치를 표창하고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우리말샘

주17

도와서 모자라는 것을 채움. 우리말샘

집필자
최인선(순천대학교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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