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읍성 ()

건축
유적
문화재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에 있는 조선시대 읍성. 사적.
이칭
이칭
장사읍성(長沙邑城)
유적
건립 시기
1417년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박습(朴習), 김저래(金著來)
높이
3.2m
둘레
1,231m
소재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149-1번지 일대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91년 2월 26일 지정)
소재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내용 요약

무장읍성(茂長邑城)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에 있는 조선시대 읍성이다. 무장현(茂長縣)은 1417년(태종 17)에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을 합쳐 만든 새로운 행정 구역으로 두 현의 중간 지점에 치소를 정하고 같은 해에 읍성을 축조하였다. 무장읍성은 조선시대 읍성 연구와 관련해 학술적 · 역사적으로 가치가 큰 유적으로 2005년부터 2019년까지 8차례의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다. 특히 2018년 조사에서 조선시대의 화약 무기인 비격진천뢰 11점이 성의 동남쪽 군기고로 추정되는 건물지에서 출토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에 있는 조선시대 읍성. 사적.
연혁

『태종실록』에는 1415년(태종 15) 전라도 관찰사 박습(朴習)이 장사현(長沙縣)의 주2를 무송현(茂松縣)에 옮겼다고 나온다. 박습은 1417년 2월 1일 장사읍성(長沙邑城)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4월 28일 축성을 완료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런데 1856년에 간행된 『무장읍지』에는 “무장읍성은 고을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기록하기를 1417년 병마사 김저래(金著來) 때 전라도 각 관의 주3 2만 수천 명을 무장에 데려와 성을 쌓고 주4주5를 세웠는데 2월에 시작하여 5월에 끝마쳤다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무장현 조에는 “태종(太宗) 7년 주1에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을 합하여 무장현(茂長縣)이라 하고, 이어 진(鎭)을 두어서 병마사(兵馬使)로서 현사(縣事)를 겸하게 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태종실록』에는 무장읍성이란 이름이 나오지 않고 다만 1417년 장사현의 치소를 무송현으로 옮겼던 곳에 장사읍성을 축조하였다고 하였다. 아마도 장사현이 주현이고 무송현이 속현이었기 때문에 성의 이름을 장사읍성이라 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두 현을 합친 무장현이란 새로운 현의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옛 주현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은 당시의 흔한 표기법이었다. 따라서 『태종실록』에 나타난 장사읍성은 곧 무장읍성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415년 새롭게 탄생한 무장현은 병마사가 현의 업무를 관장한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현이었다. 1417년(태종 17)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서 전라 병영을 내륙의 광산현에서 연해 지역인 지금의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방어 지역이 중첩되자 전라남도 나주시 영산포에 있었던 목포진(木浦鎭)을 무장진(茂長鎭)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무장읍성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149-1번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이 읍성은 한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고창 지역 가운데에서도 북쪽과 서쪽으로 서해를 낀 무장현(茂長縣)을 다스리기 위한 치소(治所) 기능, 군사적 거점인 무장진(茂長鎭)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1417년 2월부터 4월까지 3개월에 걸쳐 둘레 658보(步)로 축조되었다.

무장읍성은 임진왜란과 동학농민운동을 겪으면서도 특별한 피해를 입지 않아 읍성의 원형이 계속 보존될 수 있었다. 현재 동헌[^6], 객사([^7], 주8 등이 복원되어 있으며, 문헌과 고지도를 볼 때 성 안에 약 35개소의 주요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발굴경위 및 결과

현재까지 무장읍성에 대해 총 8차례에 걸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주9, 성벽, 문지, 해자 등을 확인하였다. 체성(体城)의 둘레는 1,231m이며 높이는 3.2m이다. 성벽에는 2개의 문이 설치되었으며 모두 주10을 갖추고 있지만 적대(敵臺)는 확인되지 않았다. 주11을 만든 구간은 393m이고, 여장의 높이는 0.8m이다. 해자는 1,779m로 성벽의 규모보다 1.4배 정도 큰 것으로 보아 해자가 모든 성벽을 둘러싸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벽은 나지막한 자연 구릉을 최대한 활용하여 만들었다. 남쪽 성벽은 바닥면을 고른 후 그 위에 지대석을 놓고 성돌 일부를 들여쌓는 방식으로 올렸다. 내벽은 외벽보다 작은 돌을 이용하여 수직으로 쌓고 흙을 비스듬하게 덧대 성벽을 강화했다. 동 · 서 · 북쪽의 성벽은 구릉을 'L'자형으로 깎아낸 후 석축부를 쌓고 성벽의 내부를 다졌다. 건물지에서는 기둥의 하중을 보강하기 위해 초석과 주12 이외에 주13을 사용한 경우가 확인되었다. 또한 2018년 조사에서는 조선시대의 병기인 비격진천뢰 11점이 출토되어 무장읍성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했던 곳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의의 및 평가

무장읍성에 대한 8차례의 발굴 조사 결과를 토대로 무장읍성 내부의 고지형을 복원할 수 있었다. 무장읍성은 남 · 동벽의 위치를 확인하여 남문을 이전하고 성벽을 복원하였다. 또한 읍취루와 동헌의 담장 · 삼문, 연지 · 정자, 해자 등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 · 정비하였다. 그 결과 무장읍성은 조선시대 읍성에 대한 조사와 연구 및 성공적인 복원의 모범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참고문헌

원전

『대동지지』
『무장읍지』
『무장현지도』
『문종실록』
『세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태종실록』

단행본

호남문화재연구원, 『高敞 茂長邑城』 Ⅰ(2006)
호남문화재연구원, 『高敞 茂長邑城』 Ⅱ(2008)
호남문화재연구원, 『高敞 茂長邑城』 Ⅲ(2010)
호남문화재연구원, 『高敞 茂長邑城』 Ⅳ(2011)
호남문화재연구원, 『高敞 茂長邑城』 Ⅴ(2014)
호남문화재연구원, 『高敞 茂長縣 官衙와 邑城 城壁』(2015)
호남문화재연구원,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학술대회』(고창군, 2015)
호남문화재연구원, 『高敞 茂長縣 官衙와 邑城』 Ⅵ(2017)
호남문화재연구원, 『高敞 茂長縣 官衙와 邑城』 Ⅶ(2018)
호남문화재연구원,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비격진천뢰 발굴과 연구』(고창군, 2019)
호남문화재연구원, 『高敞 茂長縣 官衙와 邑城』 Ⅷ(2021)

논문

고용규, 「고창 무장읍성의 역사와 성격」(『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학술대회』, 2015)
노미선,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출토 조형토제품의 검토」(『호남문화재연구』 27, 2019)
임영달, 「고창 무장읍성 출토 완구 고찰」(『호남문화재연구』 27, 2019)
임영달, 「고창 무장읍성에서 출토된 비격진천뢰 도입시점에 관한 고찰」(『한국중세고고학』 5, 2019)
주석
주1

태종 7년은 1407년의 정해년이고, 정유년은 1417년(태종 17)이다. 따라서 7년은 17년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주2

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 우리말샘

주3

승려와 승려가 아닌 속인(俗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4

예전에, 벼슬아치들이 모여 나랏일을 처리하던 곳. 우리말샘

주5

예전에, 벼슬아치들이 모여 나랏일을 처리하던 곳. 우리말샘

주6

취백당(翠白堂)

주7

송사관(松沙官)

주8

진무루(鎭茂樓)

주9

어떤 건물이 있던 터. 우리말샘

주10

쇠로 만든 독처럼 튼튼하게 둘러쌓은 산성이라는 뜻으로, 방비나 단결 따위가 견고한 사물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1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주12

공자와 맹자로 대표되는 유교의 인성론(人性論)을 이르는 말. 유교에서는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천부적인 본성으로 인(仁), 의(義), 예(禮), 지(智)라는 사종(四種)의 품성을 들며, 이를 바탕으로 심성을 잘 연마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우리말샘

주13

가늘게 다듬어 깎아서 무슨 표가 되도록 박는 나무 말뚝.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최인선(순천대학교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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