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수인산성 ( )

건축
유적
문화재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 유치면과 강진군 병영면에 위치한 고대의 포곡식 산성.
유적
건립 시기
내성 - 통일신라시대, 외성 - 고려시대
관련 국가
통일신라, 고려
관련 인물
이항복
둘레
3,957m
면적
94,993㎡
소재지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유치면과 강진군 병영면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전라남도
종목
전라남도 시도기념물(1982년 10월 15일 지정)
소재지
전남 장흥군 유치면
내용 요약

장흥 수인산성은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유치면과 강진군 병영면에 위치한 고대의 포곡식 산성이다. 이 산성은 내성과 외성을 갖추고 있다. 내성은 산의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 테뫼식이며, 초축은 출토 유물과 축성 기법으로 보아 호족 시기였던 9∼10세기경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외성은 동문지 계곡부를 포함하고 있는 포곡식이며 고려시대에 축성되었다.

정의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 유치면과 강진군 병영면에 위치한 고대의 포곡식 산성.
연혁

수인산성은 해발 561m의 수인산 정상부를 비롯한 여러 봉우리와 능선, 그 사이의 주1를 가로막아 쌓은 주2 산성이다. 이처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백사 이항복과 다산 정약용은 삼면(남 · 서 · 북)이 절벽이어서 그 형세가 마치 주3과 같다고 평하였다.

수인산성은 장성 입암산성, 담양 금성산성, 나주 금성산성, 남원 교룡산성, 무주 적상산성 등과 함께 전라도 지역을 대표하는 6대 산성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14세기 중반의 고려 말 왜구 침입기에는 도강, 탐진(도강과 탐진은 오늘날 강진군), 보성, 장흥, 영암 등 수인산성 주변의 5개 고을 백성들이 이 산성에 주6여 난을 피함으로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수인산성은 15세기 초인 1410년( 태종 10)에 대대적으로 수축을 하였고, 1417년(태종 17) 전라 병영성이 인근의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 일대로 옮겨 오게 되면서 배후 산성으로 기능하였다. 그 후 1428년(세종 11) 무렵에 다른 산성과 함께 폐기되었던 수인산성은 임진왜란을 맞아 1594년(선조 27)에 다시 수축됨으로서 전라 병영성의 배후 산성으로 청야입보하였던 산성 본래의 기능을 계속 이어 나갔다. 이러한 역사는 19세기 말 1870년(고종 7)에도 약 7개월에 걸쳐 대대적인 수축 작업을 통해 별장이 주재하는 수인산성진으로 개편되는 등의 변화 과정을 거쳤다. 현재 수인산성 성벽의 몸체 대부분은 1870년에 개축될 때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형태와 특징

수인산성은 산의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 내성과 동문지 계곡부를 포함하고 있는 외성으로 축조된 복합식 산성이다. 이항복은 1594년 수인산성을 직접 답사하면서 내성을 옛 성[舊城], 외성을 자성(子城)이라 구분하면서 그 축성 시기를 달리 보았다. 따라서 내성이 먼저 축성되었고, 외성은 후대에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발굴 경위 및 결과

수인산성 내성의 초축은 문헌 자료에 나와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이 산성의 초축을 알려 주는 자료가 최근에 이루어진 정밀 지표 조사와 남문지 등의 발굴 조사를 통해 나타났다. 수인산성의 서문과 서벽 구간, 남문지와 남벽 구간 등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주름무늬병과 돌대문 주7편 등의 토기, 주5의 절단면 가운데 내외에서 분할한 기와 등이 있다. 이러한 유물들은 9세기∼10세기경에 건물지와 성곽 유구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다.

남문지 부근에서는 기단석을 장대석으로 놓고 들여쌓기를 하며 성돌이 세장(細長)한 축성법을 보인 구간이 조사되었다. 이러한 축성 기법은 7세기 최후기에 축성된 남원 교룡산성, 722년에 축성된 경주 관문성(關門城), 845년에 축성된 순천 봉화산성 등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에서 볼 수 있는 기법이다. 이처럼 장대석을 이용한 지대석 사용과 성벽 몸체의 들여쌓기 방법은 백제와 신라에서 축성된 성곽들에서는 볼 수 없는 고대 산성의 새로운 축조 기법이다. 신기법으로 축성된 산성들이 최근 들어 호남 지역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는데 대부분 9세기 중엽에서 10세기 중엽까지 호족 시기에 중점적으로 축성된 것이다. 따라서 수인산성의 내성 초축은 출토 유물과 축성 기법으로 보아 호족 시기였던 9∼10세기경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수인산성의 외성은 고고학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초축 시기를 알 수 없다. 다만 외성 내부에서 장판 타날의 어골문 기와와 어골 복합문 기와류가 발견되고 있어서 늦어도 13세기경에는 축성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며, 13세기 몽고 침입기나 14세기 후반의 왜구 침입기에 입보 산성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수인산성의 규모는 전체 둘레 약 3,957m이며, 전체 면적은 94,993㎡이다. 그런데 산성 내부를 통과하고 있는 내성과 외성의 공유 성벽이 약 820m이기 때문에 총 석축의 길이는 4,777m이다. 수인산성의 부대 시설은 내동문, 외동문, 서 · 남 · 북문, 남문지 남쪽의 암문, 외성 동문지 수구, 내성 동문지 수구, 장대, 건물지 등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원전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단행본

『長興 修仁山城 綜合學術調査』(대한문화유산연구센터, 2009)
『장흥 수인산성 – 국가사적 지정 추진 학술세미나』(장흥군·나라문화연구원, 2019)
『장흥 수인산성』(나라문화연구원, 2021)

논문

김호준, 『高麗 對蒙抗爭期의 築城과 入保』(충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최인선, 「통일신라시대 상주와 견훤산성」(한국성곽학회 학술포럼 자료집, 2019)
최인선, 「후백제지역의 호족세력 관련 축조 산성」(한국성곽학회, 2019)
주석
주1

계곡의 둘레 가 부분. 우리말샘

주2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주변 계곡 일대를 돌아가며 벽을 쌓는 방식. 우리말샘

주3

쇠로 만든 독처럼 튼튼하게 둘러쌓은 산성이라는 뜻으로, 방비나 단결 따위가 견고한 사물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5

두 암키와 사이를 엎어 잇는 기와. 속이 빈 원기둥을 세로로 반을 쪼갠 모양이다. 우리말샘

주6

보(堡) 안에 들어와 보호를 받다. 우리말샘

주7

높이가 50cm 이상 되는 항아리. 백제의 것에는 입술과 목 부분을 제외한 전면에 꼬임 무늬가 덮여 있다.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최인선(순천대학교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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