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교룡산성 ( )

건축
유적
문화재
통일신라 시기에, 축조된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산곡동 교룡산에 위치한 석성.
이칭
이칭
유인궤성(劉仁軌城), 설인귀성(薛仁貴城), 남원산성(南原山城)
유적
건립 시기
통일 신라
높이
7m
둘레
3,289m
면적
501,569㎡
소재지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전북특별자치도
종목
시도기념물(1973년 06월 23일 지정)
소재지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내용 요약

교룡산성은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산곡동 교룡산에 위치하고 있는 통일신라 시기의 석성이다. 산성은 해발 518m의 밀덕봉과 해발 484m의 복덕봉을 에워싸면서 포곡식(包谷式)으로 축조되었다. 전체 성벽의 둘레는 3,289m에 이른다. 성벽은 가늘고 긴 직사각형 모양으로 가공한 성돌을 이용하여 바른층쌓기를 한 구간도 있고, 자연 할석을 이용하여 허튼층쌓기를 한 구간도 있다. 성문이 4개소 있고, 성내에는 우물, 사찰, 건물지, 장대지, 군기고터, 별장청터, 소금창고터 등이 있다.

정의
통일신라 시기에, 축조된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산곡동 교룡산에 위치한 석성.
발굴 경위 및 결과

남원시는 2013년 '남원 교룡산성 종합정비계획'을 시작으로, 2014년부터 2021년까지 교룡산성의 성벽과 북문지, 집수 시설, 건물지 등을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주4와 유물이 출토되었다.

건립 경위

교룡산성의 축성 시기에 대한 관련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 지역이 백제의 고룡군 지역이었던 사실로 미루어, 백제 때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있다. 이외에 당나라 장군 주1가 쌓았다 하여 '유인궤성'으로 불리기도 하며, '설인귀성(薛仁貴城)'이라고도 한다. 통일신라 때 남원 지역에 남원 주2이 설치되고, 남원 소경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이때 성이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발굴 조사 결과 통일신라 때까지로 소급할 수 있는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었다.

변천

성내에서 출토되는 유구와 유물로 볼 때, 적어도 통일신라 때에는 교룡산성이 축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에 주3을 통해 퇴로를 차단당한 왜구들이 남원 운봉현에까지 이르게 되어 남원산성(南原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게 되었고, 뒤이어 황산에서 이성계에게 크게 패하였다. 이때 왜구들이 공격하였던 남원산성이 교룡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승려 처영(處英)에 의해 대대적인 수리가 이루어졌지만, 교룡산성이 아닌 남원성에서 전투가 이루어지면서 조명 연합군은 크게 패하고 말았다.

형태와 특징

교룡산성은 교룡산(蛟龍山)의 정상부에서 중복(中腹)에 걸쳐 축조된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성벽의 둘레는 3,289m에 이르며, 바른층쌓기를 한 구간과 허튼층쌓기를 한 구간이 있다. 성내에는 성문과 주9, 주8, 사찰, 우물터 등의 부대시설이 남아 있다. 정문인 동문지는 주6주5으로 되어 있으며, 서문지는 어긋문 형식, 남문지는 개거식으로 되어 있다. 북문지에서는 통일신라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구와 옹성이 확인되었다. 그밖에 성내에서 군기고 터로 전해오는 건물지와 집수지 등이 발굴되었다.

의의 및 평가

교룡산성이 위치한 남원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넘어오는 관문이었기 때문에,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교룡산성은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특히 교룡산성은 고려 말에는 이성계를 비롯한 고려군이 왜구를 상대로 황산대첩을 이끌어낸 바탕이 된 곳이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절요』
『곡성읍지』
『남원읍지』
『봉성읍지』
『승정원일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단행본

『남원 교룡산성-전(傳)군기고터 건물지 1차 발굴 조사-』(전라문화유산연구원, 2019)
『한국의 성곽과 봉수』(中)(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1989)
주석
주1

중국 당나라 고종 때의 무장(601(602)~685). 자는 정칙(正則). 유인원(劉仁願)을 도와 백제 부흥군을 격퇴한 뒤, 신라군과 함께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켰다. 우리말샘

주2

통일 신라 시대에 두었던 오소경(五小京)의 하나.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에 설치했던 행정 구역으로 신문왕 5년(685)에 두었다가 경덕왕 때 남원경으로 고쳤다. 우리말샘

주3

고려 우왕 6년(1380)에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인 진포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쳐 크게 이긴 싸움. 나세(羅世), 최무선 등이 전함을 이끌어 왜선 500여 척을 격파하고 모두 불태워 버렸다. 우리말샘

주4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우리말샘

주5

쇠로 만든 독처럼 튼튼하게 둘러쌓은 산성이라는 뜻으로, 방비나 단결 따위가 견고한 사물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6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 우리말샘

주7

무기를 넣어 두는 창고. 우리말샘

주8

흐르는 물 또는 빗물을 저장하는 지역. 우리말샘

주9

어떤 건물이 있던 터. 우리말샘

집필자
서정석(공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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