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공산성 ( )

건축
유적
국가유산
충남 공주시 산성동에 자리하고 있는 백제 웅진기의 왕성.
이칭
이칭
웅진성(熊津城), 고마성(固麻城), 공주산성(公州山城), 쌍수산성(雙樹山城), 공산산성(公山山城)
유적
건립 시기
백제
관련 국가
백제
관련 인물
성왕
높이
3~4m
둘레
2,500m
면적
218,717㎡
소재지
충남 공주시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공주 공산성(公州 公山城)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충남 공주시 산성동 2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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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공주 공산성은 충남 공주시 산성동에 있는 백제 웅진기의 왕성(王城)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웅진성(熊津城)이라 불렀다. 성벽은 현재 동벽 일부가 토성이고 나머지는 석성으로 되어 있는데, 그에 따라 백제 때에는 토성으로 축조하였다가 조선시대 때 석성으로 개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웅진기에는 왕성이고, 사비기에는 북방성(北方城)이었으며, 통일신라 때는 웅천주(熊川州)의 치소성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 충청 감영(監營)이 충주에서 공주로 옮겨질 때 감영이 성내에 있었고, 인조 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정의
충남 공주시 산성동에 자리하고 있는 백제 웅진기의 왕성.
발굴 경위 및 결과

공산성은 웅진기 백제의 왕성(王城)이자 세계유산에 등재된 유적이다. 1970년대 말부터 진행된 백제문화권개발사업이 계기로 공산성에 대해 관심을 받게 되었다. 당시 정밀 조사를 통해 성벽의 둘레와 성내 시설물의 현황이 확인되었고, 특히 백제 때에는 토성이었던 것을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개축하여 현재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1985년과 1986년에는 추정 왕궁지에 대한 시 ·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고, 뒤이어 백제 때 축조된 토성벽과 통일신라 때 조성된 28칸 건물지, 그리고 광복루 주변에 대한 조사가 이어졌다. 1990년대 들어서서도 12각 건물지를 조사하는 등 대체로 공산성 내 동쪽 산봉(山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2000년대 들어서서는 2005년에 성안마을에 대한 시굴 조사를 시작으로 성안마을에 대한 조사가 본격화되었다. 그 결과 성안마을에 중군영지(中軍營址)를 포함한 조선시대 유적이 자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11년부터는 조선시대층을 제거하고 그 아래쪽에 자리하는 백제 유적을 본격적으로 조사하였다. 그 결과 2016년까지 다양한 백제 유적과 통일신라 유적이 확인되었다. 그중 2011년에는 작은 연못 안에서 옻칠 갑옷과 철 찰갑이 각각 1령씩 출토되었으며, 마갑(馬甲)과 각종의 마구도 다양하게 출토되어 공산성의 역사적 의미를 더하게 되었다.

건립 경위

공산성은 백제 웅진기의 왕성인 만큼 웅진 천도 이후에 축조되었다. 웅진기 왕궁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문헌 기록과 발굴 조사 결과를 종합해 볼 때 공산성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변천

공산성이 웅진기 백제 왕성이지만, 축조 시기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성왕 4년(526)에 공산성을 수리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축조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사비기에는 5방성 중 북방성(北方城)이었으며, 그 때문에 660년에 나당연합군이 사비도성을 공격할 때 의자왕이 공산성으로 피난 오기도 하였다. 통일신라 때에는 웅천주(熊川州)의 치소성(治所城)이었는데, 그 때문에 822년(헌덕왕 14)에 김헌창이 공산성을 기반으로 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충주에 있던 충청 감영(監營)이 공주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공산성이 대대적으로 개축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감영이 공주로 옮겨질 때 처음에는 공산성 안에 감영이 자리하였지만, 출입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공산성 밖으로 옮겨지기도 하였다. 이괄의 난 때에는 인조가 공산성으로 피난 오기도 하였다.

형태와 특징

공산성은 금강 남안(南岸)의 공산(公山)에 자리하고 있다. 성곽이 자리한 공산은 해발 110m의 동쪽 산봉과 해발 85m의 서쪽 산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두 산봉을 에워싸면서 축조되었다. 성벽은 동쪽 일부만이 토성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석성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백제 때에는 토성으로 축조하였던 것을 조선시대 때 현재와 같이 석성으로 개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발굴 조사 결과 조선시대 이전에 석성으로 축조한 흔적이 발견되었고, 『세종실록지리지』에 이미 석성으로 소개되어 있는 만큼 충청 감영이 오기 이전에 석성으로 개축된 것은 틀림없다.

성내에는 많은 건물지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쌍수정 앞 광장은 왕궁지로 추정되고 있고, 북문지 안쪽의 평탄면에도 많은 백제시대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성내에는 많은 기와편과 와당, 그리고 토기편이 발견되고 있다.

의의 및 평가

백제 웅진기의 왕성인 만큼 웅진기 백제 도읍지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아울러 한성기와 사비기의 도읍지 구조 및 백제 도성의 변천 과정을 이해할 때에도 큰 도움을 준다. 통일신라 때와 조선시대에는 공산성을 중심으로 지방 통치가 이루어졌던 만큼 치소성의 구조와 특징을 파악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
『삼국유사』
『세종실록지리지』

단행본

안승주, 『공산성』(공주사범대학 백제문화연구소, 1982)
안승주·이남석, 『공산성 추정왕궁지』(공주사범대학 박물관, 1987)
안승주·이남석, 『공산성 건물지』(공주대학교 박물관, 1992)
서정석, 『백제의 성곽』(학연문화사, 2002)

논문

서정석, 「백제 웅진도성의 구조에 대한 일고찰」(『백제문화』 29, 공주대 백제문화연구소, 2000)
성주탁, 「웅진성과 사비성 연구」(『백제연구』 11, 충남대 백제연구소, 1980)
안승주, 「공주 공산성에 대하여」(『문화재』 17, 문화재관리국, 1984)
이남석, 「백제 웅진성인 공산성에 대하여」(『마한백제문화』 14,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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