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 면천읍성 ( )

건축
유적
문화재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에 있는 석축 읍성. 시도기념물.
이칭
이칭
면천성, 면천군읍성
유적
건립 시기
1439년(세종 21)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황희, 안순
높이
3.6m
둘레
1,564m
면적
139,597㎡
소재지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 930-1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충청남도
종목
시도기념물(1993년 12월 31일 지정)
소재지
충남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 930-1
내용 요약

당진 면천읍성(唐津 沔川邑城)은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에 있는 조선시대 석축 읍성이다. 읍성이 축조된 것은 1439년(세종 21)으로 그해 2월 축성이 결정되어 11월에 완공하였다. 당시 면천읍성에 대한 기록이 『문종실록』에 자세히 나온다. 면천읍성은 둘레 3,225척, 높이 11척, 여장 높이 3척의 크기로 지어졌으며, 적대 7개소, 성문 3개소, 옹성 1개소, 여장 56첩, 우물 3개소가 있었고, 해자는 부분적으로 굴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근에는 읍성의 성벽, 성문, 옹성 그리고 성내의 객사 등이 복원되었다.

정의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에 있는 석축 읍성. 시도기념물.
발굴경위 및 결과

당진 면천읍성(唐津 沔川邑城)은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의 면소재지 대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읍성이다. 성의 축성 과정이 실록에 잘 남아 있어 연해읍성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산성을 쌓으려고 하다가 읍성을 축조한 만큼 산성에서 읍성으로 주1가 이동한 과정이나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그러나 면천읍의 도시화 과정에서 면천읍성이 나날이 훼손되어 읍성의 보존과 정비를 위한 방안을 마련하고자 정밀 지표조사가 이루어졌다. 아울러 성내에 자리했던 객사동헌을 비롯한 여러 건물을 복원하기 위해 건물지에 대한 발굴 조사도 함께 이루어졌다.

건립경위

면천 지역은 내포평야(內浦平野)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당진, 덕산, 예산, 신창 지역으로 통하고, 아산 공진창(貢津倉)과 한양으로 가는 길이 열려 있는 교통의 요지다. 또한 아산만과 접해 있어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지키기 위해 면천산성을 만들고자 하였는데, 백성들이 산성을 만드는 것을 원하지 않아 그 대안으로 읍성을 축조한 것이 이 면천읍성이다.

변천

당진 면천읍성은 조선 세종 21년(1439) 윤2월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그해 11월에 축성을 완료하였다. 이때 완성된 면천읍성에 대해서 『문종실록』에는 둘레 3,235척, 높이 11척, 여장(女牆, 주14은 3척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적대 7개소, 성문 3개소, 여장 56개소, 우물 3개소가 있었으며, 해자는 완성된 곳도 있고 미완성인 곳도 있다고 적혀 있다. 면천읍성의 이러한 규모와 부대시설은 조선 후기까지 별다른 변화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만 『여지도서』에는 우물 2개소와 연못 3개소가 있다고 적혀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여지도서』에는 연못의 이름이 군자지(君子池)라고 적혀 있다.

형태와 특징

당진 면천읍성은 주2에서 흘러내린 지맥의 말단부에 성을 축조하여 평지성이나 다름 없다. 성벽의 둘레는 1,564m고, 성벽의 높이는 서벽에서 3.6m 정도가 가장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원래는 성벽의 높이가 11척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만큼 높이가 5.1m 정도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아래에 주3을 놓고 그 위에 성벽을 축조하였는데, 2.3m 높이까지는 대형석을 사용하고, 그 위 1.2m 정도는 중간 크기의 성돌을 사용하고, 다시 그 위는 그보다 작은 성돌을 사용하였다. 성문은 동문지, 서문지, 남문지가 남아 있고, 남문에는 주5도 있다. 아울러 주4도 7개소가 남아 있어 실록의 기록과 일치한다.

한편 1872년에 그려진 「고지도」에는 성내에 객사, 동헌, 주6, 주7, 주8, 내책방, 외책방, 급창방, 주9, 주10, 주11, 주12, 주13, 향청, 내창고, 성황사 등이 자리하고 있다. 아울러 '옥천시면(沃川始面)', '진잠시면(鎭岑始面)', '석성종면(石城終面)'과 같은 각자성석(刻字城石)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의의 및 평가

당진 면천읍성은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읍성 축조 기사 중에서 축성에 대한 논의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읍성이다. 또한 고고학적으로도 세종대의 읍성 축조 방식을 가장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당진 면천읍성은 세종대 읍성의 기본 모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세종실록』
『문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단행본

대전산업대학교, 『면천읍성』(당진군,1999)
심정보, 『한국읍성의 연구』(학연문화사, 1995)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면천읍성연구』(당진군, 2011)
주석
주1

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 우리말샘

주2

충청남도 태안군 남면에 있는 이. 남면의 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서쪽으로 바다와 맞닿아 있다. 남서쪽에 몽산포항, 서쪽에 굴혈포 해수욕장이 자리하고 있다. 77번 국도가 지난다. 문화재로 ‘몽산리 석가여래 좌상(夢山里釋迦如來坐像)’, ‘태안 문양목 생가터(泰安文讓穆生家터)’ 등이 있다. 우리말샘

주3

건축물을 세우기 위하여 잡은 터에 쌓은 돌. 우리말샘

주4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주5

쇠로 만든 독처럼 튼튼하게 둘러쌓은 산성이라는 뜻으로, 방비나 단결 따위가 견고한 사물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6

무기를 넣어 두는 창고. 우리말샘

주7

군사령관이 지휘ㆍ통솔하여 야전군의 지휘가 이루어지는 군의 중심 본부. 우리말샘

주8

조선 시대에, 지방 관아에 있던 안채. 우리말샘

주9

사령이 모여 있던 곳. 우리말샘

주10

바깥채 안쪽에 세 칸으로 세운 대문. 우리말샘

주11

바깥 담에 세 칸으로 세운 대문. 우리말샘

주12

군아(郡衙)에서 구실아치가 일을 보던 곳. 우리말샘

주13

군아(郡衙)와 감영(監營)에 속한 장교가 근무하던 곳. 우리말샘

주14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서정석(공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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