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성은 지방의 관부와 민거를 둘러서 쌓은 성이다. 고려 말기까지는 토축의 읍성들이었는데 조선 시대에는 차츰 석축으로 고쳐졌다. 세종 때부터는 경상·전라·충청의 바다 가까운 지역에 읍성이 많이 신축·개축되었다. 내륙에는 큰 고을에만, 해안 근처 고을에는 거의 모두 읍성을 두었다.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성벽을 높이고 옹성과 치성· 해자를 시설하였다. 『동국문헌비고』에는 104개소의 읍성이 기록되어 있다. 1910년 일본의 철거령으로 대부분의 읍성이 헐렸다. 현존하는 읍성으로는 정조 때 축조된 화성 및 해미읍성·낙안읍성 등이 있다.
읍(邑)이라는 말 자체가 처음부터 성으로 둘러싸인 취락을 의미하였으나, 그 가운데 종묘와 왕궁이 있는 도성(都城)과 구별하였다. 중국에서는 읍성이 이미 청동기시대에 축조되어서 국가의 기원이 읍제국가(邑制國家)에서 출발하였으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언제쯤 읍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지 아직 분명하지 않다.
고조선의 경우 도성인 왕검성(王儉城) 이외에 각처에 읍성이 있었는가에 대한 기록은 없다. 한(漢)나라의 군현(郡縣)이 설치되었던 지역인 평안도 · 황해도 지역에는 낙랑의 치소(治所)였던 토성이 남아 있고, 대방군(帶方郡)의 치소였던 토성도 사리원 동쪽에 남아 있다. 또, 이 시기의 현(縣)에도 작은 읍성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이들은 관청건물과 지배층이 사는 일부지역을 토루(土壘)로 돌려쌓고 있으며, 넓은 평야를 낀 평지나 낮은 구릉에 위치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산성과 읍성이 따로 축조되었다고 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으나, 지방의 주요한 도시를 둘러싼 읍성이 산성과 같이 산을 의지한 위치에 있었던 흔적이 차츰 밝혀지고 있다. 통일신라 때에는 9주(州)와 5소경(小京)이 지방의 큰 도회지였고, 여기에는 신문왕 때 읍성이 축조되었던 기록이 있다.
이 때의 읍성들이 어떠한 형태와 지형조건에 의하여 축조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의 평야에 네모꼴로 축조한 다음 일정한 구획을 나누었던 읍성들이 후대까지 계속 수개축(修改築)을 하여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읍성들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주변의 산성들로 보아서는 유사시에는 인근의 산성에 입보(入保)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이러한 유형과는 달리, 백제 말기에는 산성의 형태가 차츰 계곡의 아랫부분까지 포함하면서 넓어지고 있어서, 읍성의 기능을 포용하는 단계에 이른 것으로 판단되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주요 지방도시에 읍성이 축조되었고, 고려 말기까지는 규모가 작은 토축(土築)의 읍성들이 상당수 존재하였다. 이들 고려시대의 읍성들은 조선왕조에 이어졌으며, 차츰 석축(石築)으로 고쳐지거나 호구(戶口)의 증가에 의해서 넓게 고쳐 쌓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특히, 세종 때부터는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의 바다가 가까운 지역의 읍성들이 새로 축조되거나 개축되었다. 이때에는 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성벽의 높이를 높이면서 옹성(甕城 : 문의 양쪽에 쌓아 문을 공격하는 적을 방비하는 것)과 치성(雉城 : 성벽의 바깥에 네모꼴로 튀어나오게 벽을 쌓아 성벽에 바싹 다가선 적병을 비스듬한 각도에서 공격하게 하는 시설) · 해자(垓字)를 시설하도록 중앙정부에서 감독하였다.
또, 지방의 수령들에게는 근무기간 중에 지켜야 할 근무지침으로 성을 보수하는 항목이 들어 있었다. 또한, 읍성을 쌓고 나서 5년 이내에 무너지면 죄를 삼고, 견고히 쌓으면 상을 준다는 규정도 마련되어 있었다.
읍성들은 조선왕조의 마지막까지 존속되었으나, 1910년 일본에 의하여 읍성철거령이 내려져 대부분의 읍성들이 헐렸다. 현존하는 읍성으로는 정조 때 축조된 화성(華城)이 대표적인 것이며, 이밖에 동래읍성 · 해미읍성 · 비인읍성 · 남포읍성 · 홍주성 · 보령읍성 · 남원읍성 · 고창읍성(일명 모양성) · 흥덕읍성 · 낙안읍성 · 진도읍성 · 경주읍성 · 진주읍성(일명 촉석성) · 언양읍성 · 거제읍성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읍성은 내륙지방에는 비교적 큰 고을에만 있었고, 해안 근처의 고을에는 거의 모두가 있었다. 읍성은 부(府) · 목(牧) · 군(郡) · 현의 행정구역단위의 등급에 따라 그 크기도 차이가 있었다. 일정하지는 않으나 이런 차이는 주민의 수효와 관계되었으며, 큰 것은 3,000척(尺) 이상, 중간규모는 1,500∼3,000척, 작은 것은 1,000척에 못 미치는 경우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현 남부지역에 69개소, 『동국여지승람』에는 95개소, 『동국문헌비고』에는 104개소의 읍성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