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읍성은 충청남도 보령시 주포면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시대 읍성이다. 보령 지역은 서해안에 면해 있어 고려 말 이래로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였다. 그래서 1400년(조선 정종 2)에 보령시 주포면에 봉당산성(鳳堂山城)을 축조하여 왜구 방비의 본거지로 삼았다. 그런데 이 봉당산성은 성내의 면적이 너무 좁고 잡석과 흙을 섞어 쌓아 견고하지 않은 데다가 성내에 우물과 샘이 없어 장기적인 농성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1430년(세종 12)에 봉당산성의 동쪽 1리 지점에 새로 읍성을 축조한 것이 현재의 보령읍성이다.
다른 해안가 고을과 마찬가지로 고려 말에는 보령 지역도 왜구의 침입을 받게 되는데, 그 시기는 1350년(충정왕 2)부터이다. 1380년(우왕 6)에는 남포(藍浦) 일대에 왜구가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주변 일대가 황폐화되었다. 그로 인해 1390년(공양왕 2)에는 남포에 진(鎭)을 설치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방비를 담당하게 함으로써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1400년(정종 2)에 봉당산성을 축조하여 왜구의 침입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그럼에도 봉당산성이 입지나 구조적으로 읍성으로는 적당하지 않아 1430년(세종 12)에 새로 옮긴 것이 현재의 보령읍성이다. 1432년(세종 14)에 비로소 성내의 공해(公廨)를 완성함으로써 보령현의 치소가 되었다. 그래서 그 이후 1914년에 행정 개편으로 군청을 대천(大川)으로 옮겨갈 때까지 보령현의 치소 역할을 하였다.
진당산(鎭唐山)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의 끝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해발 60m 정도의 나지막한 구릉과 그 주변의 평지를 에워싸면서 축조되었다. 구릉이 있는 북쪽이 높고, 평지를 지나는 남쪽이 낮아 북고남저(北高南低)의 지형을 하고 있다. 성벽은 대부분이 붕괴되어 중단 이하만 남아 있으며, 특히 동쪽 벽의 남쪽과 서쪽 벽은 성내에 학교를 지으면서 완전히 유실되었다. 성벽은 다른 읍성과 마찬가지로 자연 할석을 특별히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그 때문에 성돌과 성돌 사이에는 틈을 메우기 위한 쐐기돌을 끼워 넣었다. 아울러 성벽의 하단부에는 큰 성돌을 사용한 반면에 위로 올라가면서 점점 작은 성돌을 사용하여 역학적인 안정감을 꾀하고 있다.
『문종실록』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2,109척, 높이 12척, 여장 높이 2척, 적대(敵臺) 8개소, 성문 3개소이다. 성문 중 한 곳은 옹성이 없었다고 한다. 아울러 여장의 수는 412개소이고, 해자의 둘레는 2,190척이며, 성내에는 우물이 3개소 있었다고 자세히 밝혀 놓았다. 지형적으로 볼 때 동쪽, 북쪽, 서쪽이 험한 지세에 의지하고 있어 읍성의 전형적인 형태라 볼 수 있다.
보령 지역은 해안가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해안과 내륙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에 해당되기도 한다. 보령읍성이 주포면의 보령리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읍성에 대한 정밀 조사는 진행하지 않고, 성벽 복원이 먼저 이루어져 뒤늦게 정밀 지표 조사가 이루어졌다.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처음에는 봉당산성이 축조되었다가 뒤이어 평지에 해당되는 현재의 읍성으로 옮겨진 사실이 기록에 남아 있어 조선시대 읍성의 입지와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특히 성벽의 둘레와 부대 시설이 『문종실록』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대체로 축성이 이루어진 세종 때의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만큼 세종조 읍성 축조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