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읍성 ()

건축
유적
문화재
충남 보령시 주포면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시대 읍성.
이칭
이칭
보령 성곽(保寧城郭)
유적
건립 시기
1430년(세종 12)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최윤덕
높이
3.3m
둘레
880m
면적
77,558㎡
소재지
충남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충청남도
종목
시도기념물(1984년 05월 17일 지정)
소재지
충남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
내용 요약

보령읍성은 충청남도 보령시 주포면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시대 읍성이다. 보령 지역은 서해안에 면해 있어 고려 말 이래로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였다. 그래서 1400년(조선 정종 2)에 보령시 주포면에 봉당산성(鳳堂山城)을 축조하여 왜구 방비의 본거지로 삼았다. 그런데 이 봉당산성은 성내의 면적이 너무 좁고 잡석과 흙을 섞어 쌓아 견고하지 않은 데다가 성내에 우물과 샘이 없어 장기적인 농성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1430년(세종 12)에 봉당산성의 동쪽 1리 지점에 새로 읍성을 축조한 것이 현재의 보령읍성이다.

정의
충남 보령시 주포면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시대 읍성.
건립 경위

보령읍성은 고려 말~조선 초에 축조된 읍성이 그러하듯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서 쌓은 읍성이다. 실제로 보령 지역은 1350년(고려 충정왕 2)부터 왜구의 침입을 입었는데, 그에 따라 1400년(조선 정종 2)에 보령시 주포면의 봉당리와 우강리 사이에 있는 성재산 정상부에 봉당산성(鳳堂山城)을 축조하여 왜구 방비의 본거지로 삼았다. 그런데 이 봉당산성이 구릉에 자리하고 있어 면적이 협소한 데다가 성내에 우물이나 이 없고, 성벽도 잡석과 흙을 섞어 쌓아 견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종 때 새로 옮긴 것이 현재의 보령읍성이다.

변천

다른 해안가 고을과 마찬가지로 고려 말에는 보령 지역도 왜구의 침입을 받게 되는데, 그 시기는 1350년(충정왕 2)부터이다. 1380년(우왕 6)에는 남포(藍浦) 일대에 왜구가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주변 일대가 황폐화되었다. 그로 인해 1390년(공양왕 2)에는 남포에 진(鎭)을 설치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방비를 담당하게 함으로써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1400년(정종 2)에 봉당산성을 축조하여 왜구의 침입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그럼에도 봉당산성이 입지나 구조적으로 읍성으로는 적당하지 않아 1430년(세종 12)에 새로 옮긴 것이 현재의 보령읍성이다. 1432년(세종 14)에 비로소 성내의 주8를 완성함으로써 보령현의 주1가 되었다. 그래서 그 이후 1914년에 행정 개편으로 군청을 대천(大川)으로 옮겨갈 때까지 보령현의 치소 역할을 하였다.

형태와 특징

진당산(鎭唐山)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의 끝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해발 60m 정도의 나지막한 구릉과 그 주변의 평지를 에워싸면서 축조되었다. 구릉이 있는 북쪽이 높고, 평지를 지나는 남쪽이 낮아 북고남저(北高南低)의 지형을 하고 있다. 성벽은 대부분이 붕괴되어 중단 이하만 남아 있으며, 특히 동쪽 벽의 남쪽과 서쪽 벽은 성내에 학교를 지으면서 완전히 유실되었다. 성벽은 다른 읍성과 마찬가지로 자연 주4을 특별히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그 때문에 주5과 성돌 사이에는 틈을 메우기 위한 주2을 끼워 넣었다. 아울러 성벽의 하단부에는 큰 성돌을 사용한 반면에 위로 올라가면서 점점 작은 성돌을 사용하여 역학적인 안정감을 꾀하고 있다.

『문종실록』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2,109척, 높이 12척, 주6 높이 2척, 주7 8개소, 성문 3개소이다. 성문 중 한 곳은 옹성이 없었다고 한다. 아울러 여장의 수는 412개소이고, 해자의 둘레는 2,190척이며, 성내에는 우물이 3개소 있었다고 자세히 밝혀 놓았다. 지형적으로 볼 때 동쪽, 북쪽, 서쪽이 험한 지세에 의지하고 있어 읍성의 전형적인 형태라 볼 수 있다.

발굴 경위 및 결과

보령 지역은 해안가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해안과 내륙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에 해당되기도 한다. 보령읍성이 주포면의 보령리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읍성에 대한 정밀 조사는 진행하지 않고, 성벽 복원이 먼저 이루어져 뒤늦게 정밀 지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의의 및 평가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처음에는 봉당산성이 축조되었다가 뒤이어 평지에 해당되는 현재의 읍성으로 옮겨진 사실이 기록에 남아 있어 조선시대 읍성의 입지와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특히 성벽의 둘레와 부대 시설이 『문종실록』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대체로 축성이 이루어진 세종 때의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만큼 세종조 읍성 축조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세종실록』
『문종실록』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단행본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보령성곽 정밀지표조사』(보령시, 2007)
심정보, 『한국 읍성의 연구』(학연문화사, 1995)
주석
주1

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 우리말샘

주2

돌을 쌓아 올릴 때, 돌과 돌의 틈에 박아 돌리는 돌. 우리말샘

주3

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 우리말샘

주4

구조물의 기초에 쓰이는 깬돌. 1개의 중량이 10~100kg로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말샘

주5

성을 쌓는 데 쓰는 돌. 우리말샘

주6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주7

성문 양옆에 외부로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네모꼴의 대(臺). 우리말샘

주8

관가(官家)의 건물.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서정석(공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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