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시대 ()

선사문화
개념
서기전 1000년 대 전반을 중심으로 무문토기와 함께 청동기를 제작 사용하고 큰 돌 지석묘와 다량의 청동기 부장묘가 조성된 시대.
이칭
이칭
무문토기시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청동기시대는 서기전 1000년 대 전반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에 걸쳐 무문토기와 함께 청동기, 마제석기를 제작 사용한 시대이다. 마을은 장방형 혹은 원형의 수혈 주거지로 구성되고, 무덤은 지석묘, 적석묘, 석곽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벼를 비롯한 곡물 농사가 시작되었고, 무덤에 부장된 것으로는 청동기로 비파형동검 등의 무기와 다뉴기하학문경[다뉴세문경] 등의 의기가 있다. 이들 청동기의 중심지는 요서 지역에서부터 요동 지역을 거쳐 길림, 한반도 지역으로 이행된다.

정의
서기전 1000년 대 전반을 중심으로 무문토기와 함께 청동기를 제작 사용하고 큰 돌 지석묘와 다량의 청동기 부장묘가 조성된 시대.
1. 시대 개념과 시기 구분

청동기시대는 덴마크의 톰센(C.J. Thomsen)이 제안한 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로 구성된 3시대 체계(three age system) 중의 한 시대로 신대륙에서는 사용되지 않지만 구대륙에서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시대 개념이다.

청동은 광석에서 구리를 추출한 후 주석, 아연, 납 등 몇 가지 다른 금속과 배합하여 주조하는데, 그 기술은 고도의 숙련과 전문적 지식을 갖춘 장인을 필요로 한다. 영국의 고든 차일드(Gordon Childe)가 주장하였듯이 청동기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직업의 전문화는 단순히 석기만을 사용하던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계층사회의 발전을 가져오는 혁신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예 · 맥 · 한 종족으로 구성되는 한민족 혹은 고조선부여, 진국(辰國) 등의 정치체(政治體)가 있었던 공간적 범위는 대체로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에 걸쳐 있다. 이 영역에 서기전 1000년 전반을 중심으로 비파형동검을 지표로 하는 한국 청동기 갖춤새가 분포한다.

이들 지리적 영역의 청동기시대에 대체로 중원 지역의 삼족기(三足器), 내몽골 시베리아 지역의 기하학무늬토기와 구분되는 무문평저(無文平底)토기가 널리 제작 사용된다. 그에 따라서 그 공간적 분포와 시간적 범위에는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무문토기시대’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그 시기 구분에 대해서 청동기와 무문토기의 형식과 갖춤새를 기준으로 하여 조기,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한다.

조기는 비파형동검이 제작되기 이전으로 서기전 15~12세기경에 해당한다. 요서의 고태산(高台山) 문화, 요동 북부의 마성자(馬城子) 2기, 요동반도에서는 쌍타자(雙砣子) 3기, 길림 동부 및 동북한 지역은 흥성(興城) 3기 혹은 호곡 1기, 서북한 북부의 신암리(新岩里) 2기와 공귀리(公貴里) 1기, 서북한 남부의 신흥동(新興洞) 1기, 남한 지역의 미사리(美沙里) 유형이 이에 해당된다.

전기는 비파형동검이 보급되기 시작하는 단계로서 서기전 12~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요동 서부의 위영자(魏營子) 시기, 요동 북부의 마성자 3기, 요동 남부의 상마석(上馬石) 상층, 길림 동부와 동북한의 흥성 4기나 호곡 2기, 서북한 북부의 공귀리 2기, 서북한 남부의 신흥동 2기, 남한 중서부에서는 가락동 · 흔암리 · 역삼동 유형 단계가 이에 해당한다.

중기는 전형적인 비파형동검이 보급되는 단계로, 서기전 8~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요서에서는 십이대영자(十二臺營子) 유형 [요령 십이대영자 유적], 요동 북부에서는 신성자(新城子) 유형, 요동 남부에서는 쌍방(雙方) 유형, 길림 지역에서는 서단산(西團山) 유형, 길림 동부에서는 흥성 4기 유형, 서북한 남부에서는 신흥동 3기 유형이 대세를 이룬다. 남한 지역에서는 중부에 늦은 흔암리(欣岩里) 유형, 서남부에 송국리 유형, 동남부에서는 검단리(檢丹里) 유형이 성행한다.

후기는 서기전 5~4세기경 변형 비파형동검과 초기 세형동검이 유행하는 단계로 점토대토기가 요서 지역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전 지역에 걸쳐 분포한다. 각 지역별 토기 속성과 갖춤새의 차이가 있어 중국 요서(遼西) 지역의 원대자(遠臺子) 유형, 요북(遼北)의 양천(凉泉) 혹은 정가와자(鄭家窪子) 유형 [요령 정가와자 유적], 요남(遼南)의 ‘윤가촌(尹家村) 상층’, 남한의 ‘수석동(水石洞)’ 유형으로 규정된다. 이와 함께 남한 지역과 제주도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토기와 함께 이전의 송국리 유형의 토기 전통이 지속되기도 한다.

2. 생업 활동과 도구의 제작

생업 활동으로 신석기시대의 어로 방식은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이 각종 어망추를 통해서 널리 입증된 바 있다. 조기의 요동 지역 마성자 혹은 쌍타자, 남한의 정선 아우라지는 물론 전기의 포항 대련리 등 남한 지역 생활 유적에서 석제와 토제 그물추가 다량 출토하고, 전기의 태안 고남리와 제주 상모리처럼 해안가 패총 유적의 형성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조기와 전기에 여전히 어로가 비중 높은 생계 양식이 지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렵 활동 또한 보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음이 청동기시대 거의 전 기간 전 지역에 걸쳐 발견되는 다양한 형식의 마제 석촉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전-중기에 속하는 남한의 춘천 천전리, 세종 대평리, 울산 입암리, 진주 평거동 등지에서 마을 공간의 외부 경계에 조성된 함정 시설을 통해서 수렵활동의 방식이 보다 적극적으로 계발되었음이 확인된다.

조, 피, 수수 등의 잡곡은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재배되었으나,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이다. 조기의 쌀농사 증거로 중국 요동 남부의 대련 대취자(大連 大嘴子) 3기의 주거지에서 수습된 탄화미(炭化米)가 있다.

한반도 남부의 밀양 금천리(琴川里)에 이 시기에 속할 가능성이 있는 논 유구가 발굴 조사를 통해서 제시되었으나 확실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전기에 해당하는 여러 유적에서 탄화미가 발견되었는데, 대동강 유역의 평양 남경, 남한강 유역의 여주 흔암리, 동해안의 고성 송현동 등 유적의 사례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사례가 밭벼인지 논벼인지는 분명치 않다.

벼를 재배하는 경작지의 사례가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은 청동기시대 중기에 들어와서이다. 단위 논의 규모는 작지만, 경계 둑이 조성된 논이나 집수시설과 수로 등 수도작(水稻作)에 관련된 시설이 취락 인근의 소규모 곡간 충적지에서 발견된다. 논산 마전리, 진주 평거동, 울산 무거동(無去洞) 등의 사례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이랑과 고랑이 조성된 밭이 진주 대평리와 평거동 유적에서 대규모로 확인된 바 있다. 밭 유구(遺構)는 대체로 이들 생활 가옥 외곽에 조성되어 있는데 개별 경작지의 면적이 수백 ㎡에 이른 것이 보통이고, 전체를 합하면 수천 ㎡에 이른다.

농경 토지의 개간과 벌목 작업, 그리고 목제 농구의 제작이 활발해지면서 신석기시대에 이미 상당수 보급된 마제수법의 돌도끼가 더욱 다종 다양한 형식으로 발전한다. 중기 이후에는 특히 유구(有溝) 혹은 유단(有段) 석부(石斧), 대팻날 석기가 널리 제작 사용된다.

곡물 농사가 발전하면서, 수확구로 돌낫석도(石刀)가 유행하는데, 후자의 경우 전기에는 서북한과 남한 전역에 물고기 모양 혹은 배 모양, 동북한에서는 장방형이 보급된다. 중기가 되면 남한 서부 지역의 송국리 문화 권역에서 삼각형 석도가 유행하는 지역성을 보여준다.

살상용 혹은 위세품으로 정교한 편평 만입(灣入) 삼각촉, 꼭지가 달린 유경식(有莖式)촉 등의 마제 석촉과 함께 구하기 어려운 청동 단검을 대신하여 마제석검이 전기부터 중기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를 중심으로 널리 제작되었다.

서북한에서는 검몸에 피홈이 있고, 자루 대신 슴베가 달린 유경식(有莖式), 검몸에 피홈이 드물고, 자루가 달린 유병식(有柄式), 그리고 후자 중에는 자루에 마디가 있는 유절병식(有節柄式), 단이 형성된 유단병식(有段柄式)이 있다.

중기에는 무덤에 부장되는 위세품(威勢品)으로서 자루가 과장된 유단병식의 대형 석검이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유행하였다.

청동기는 조기에 남부 시베리아 계통의 무기와 공구, 장신구 등이 중국 요령 지역을 중심으로 보급되지만, 한반도 지역에서 발견된 사례도 드물게나마 확인된다. 요동 법고 만유가(灣柳家)에서 동물머리 장식 도자를 비롯하여 여러 점의 도자와 공내과(銎內戈), 도끼 그리고 무순 망화(望花) 유적에서는 환두도자의 출토 사례가 있다.

쌍타자 유형의 여순 타두(砣頭) 적석묘에서 낚시 활촉, 대취자(大嘴子) 주거지에서 청동촉과 과신, 신흥동 유형의 평양 금탄리 주거지에서 청동끌, 미사리 유형의 정선 아우라지 주거지에서 청동 장식, 진주 대평리 주거지에서 곡옥형 청동기가 발견되었다.

각 지역 현지에서 발견된 무기, 공구는 석제 거푸집으로 주조되었지만, 일부 공구는 순동에 가까워 두들겨 만든 청동기도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기에 이르면 대표적인 무기로서 자루를 별도로 조립하고, 검몸이 비파형으로 양측에 돌기가 있고 원형 단면의 슴베가 달린 단검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논란이 있지만 요동 지역의 검신 봉부가 짧은 이도하자(二道河子)식, 요서 지역의 검신이 긴 화상구(和尙溝)식, 서북한의 검신 폭이 좁은 선암리(仙岩里)식 등이 있어 이른 형식으로 주장된다. 거의 전부 목제 자루를 별도로 장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기와 공구는 물론 각종 장신구와 의기가 다량 제작 보급되는 것은 중기로서 그 중심은 요령(遼寧) 지역, 그중에서도 조양 십이대영자(朝陽 十二臺營子), 객좌 포수영자(喀座 包手營子) 등의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요서 지역이 중심을 이룬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비파형동검이 요서에서 길림과 한반도에 걸쳐 널리 보급된다. 청동제 자루를 장착한 사례가 요서 지역에서 처음 보급되고, 요동으로도 확산되지만, 한반도에서는 기본적으로 목제 자루를 끼운 동검이 성행한다. 비파형동검과 함께 번개무늬 장식의 청동거울이 요서 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반도에서는 비파형동검과 동모 등의 무기와 도끼 등의 공구(工具)가 제작 보급되었지만, 그 종류와 수량은 많지 않다.

후기가 되면 여전히 요서 지역에서 여전히 제작 전통이 이어지는데, 나팔형동기, 동탁(銅鐸), 말재갈 등이 동반 출토한 흥성 주가촌(興城 朱家村)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한편으로 능원 삼관전자(凌原 三官甸子), 객좌 남동구(喀座 南洞溝), 건창 동대장자(建昌 東大丈子)에서 보듯이 변형 비파형동검과 함께 일부 전국계 무기와 제기가 보급된다. 그 청동기 보급의 중심지가 요동 지역으로 확대되는데, 다량의 청동기가 출토한 심양 정가와자(瀋陽 鄭家窪子) 무덤의 사례가 이를 입증한다.

이 유적에서는 청동제 검병이 달린 변형 비파형동검과 다량의 화살촉, 말재갈 이외에 번개무늬 거울, 원개형(圓蓋形)동기, 방패형동기, 나팔형동기 등의 각종 이형(異形)동기와 장신구가 다량 출토하였다.

한반도에서는 정가와자와 비슷한 동검, 동경, 이형동기 등은 청동기시대 후기인 평양 신성동 유적과 다음 초기 철기시대의 대전 괴정동, 예산 동서리, 아산 남성리, 군산 선제리 무덤 유적의 부장 유물로 확인된다. 앞서 열거한 대부분의 무기와 공구는 석제 거푸집으로 주조되지만, 정교한 무늬와 복잡한 형태의 청동기는 모형을 먼저 만들고 이를 점토로 찍어 만든 거푸집을 활용해서 주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3. 주거지와 마을

무덤 유적도 그렇지만 마을 유적은 2000년대 이후 중국 동북 지역과 북한보다 남한 지역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사례가 발굴 조사되어 동 지역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다. 조기에 남한 여러 곳에서는 소형의 (장)방형 주거지와 함께 정선 아우라지에서 보듯이 장축이 15m, 면적이 150㎡가 넘는 대형 주거지가 유행한다.

대형 주거지의 경우 20명이 넘는 구성원을 수용할 수 있어 여러 가구 혹은 몇 세대가 공동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많은데, 한두 기의 화덕을 공동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취락은 상당수가 강변의 충적대지에서 발견되고, 구릉 사면이나 고지대에서는 그 사례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단위 취락을 구성하는 주거지 숫자가 많지 않아 취락의 규모가 차별화되는 현상은 보이지 않는다.

전기의 이른 단계에는 화덕 1-2기를 갖춘 장방형 평면의 주거지, 늦은 단계에 다수의 화덕을 갖춘 (세)장방형 평면의 주거지가 유행한다. 그중에서 2열의 주춧돌, 돌을 둘린 화덕 1-2기를 갖춘 장방형 주거지는 금강 중류와 남한강 상류의 호서 지역을 중심으로 조성된다.

장단축비가 4:1 정도인 (세)장방형 평면에 화덕이 4∼8기 설치된 주거지는 경기 남부와 호서 서부, 북한강 상류의 영서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는데, 단일 가옥에 여러 핵가족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기와 달리 세대마다 화덕과 주거 공간을 구분하는 현상이 나타나는바, 이는 같은 가옥 내이지만 세대마다 독립적인 주거생활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취락의 입지는 앞 시기와 달리 지역마다 구릉 정상부, 강변 충적대지, 완경사면 등 다양하다.

청원 대율리처럼 중심 주거지를 둘러싼 소규모 환호시설이 있어 거주 공간의 차별화 현상도 일부 확인된다. 규모는 정확하게 추산하기 어려우나 대규모 취락과 그 주변으로 소규모 취락이 분포하면서 중핵 취락과의 연결망(network)을 이루는 현상이 확인되기 시작한다.

중기에 주거지는 소형화된 방형과 원형 평면의 것이 압도적이어서, 소규모 가구 혹은 핵가족 중심의 거주 방식이 성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남한의 부여 송국리식 및 서산 휴암리식, 동남한의 울산 검단리식, 그리고 중부 지역의 춘천 천전리식 주거지가 그 사례이다.

송국리식 주거지는 원형 평면에 두 개의 기둥 구멍을 갖추고 있는 형식인데, 방형인 것은 휴암리식이라고도 한다. 검단리식 주거지는 장방형 4개 기둥, 혹은 6~8개 기둥이 있고 화덕 1기가 갖추어진 주거지이다. 대형의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대부분 소형이다. 천전리식 주거지는 한쪽에 이색 점토구역을 갖춘 것으로 역시 작은 방형 주거지이다.

한 시기에 혹은 여러 시기에 걸쳐 한 지점에 지속적으로 조성되어 1∼2백 채의 주거지를 갖춘 대규모 취락 형태를 띤다. 단위 취락 내에 주거지 배치에서도 일정한 패턴이 확인되어 취락 공동체의 조직과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사례가 늘게 된다.

그 주변으로 10∼20여 기의 주거지로 구성된 소규모 취락이 분포하면서 중핵 취락과의 연결망(network)이 더욱 많은 지역에 발전하는 사실이 확인된다. 취락 연결망은 대체로 하천 유역의 결절지점, 선상지상 대지 혹은 분지형 평지에 입지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몇몇 취락에서는 평면 방형 혹은 원형의 환호(環濠) 시설이 확인되는데, 춘천 중도, 울산 검단리, 진주 대평리 등이 대표적이다. 환호는 방어나 의례 혹은 사회적 구분을 목적으로 조성되는데, 그 유무에 따라 취락 간 기능의 차별화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후기에는 같은 점토대토기를 내는 요동 지역의 심양 공주둔(公主屯) 후산(后山) 유적 등의 사례와 유사한 벽부식(壁付式) 노지를 갖춘 말각방형의 소규모 수혈 주거지가 남한 여러 지점에서 확인된다. 남양주 수석동이나 보령 교성리(校城里) 등 유적이 대표적인데, 대체로 10여 채 내외의 주거로 이루어진 소규모 취락들이다.

벽부식 노지가 없는 주거지로서 50기 이상의 주거지로 이루어진 일정 규모 이상 취락의 사례로 고지에 입지한 안성 반제리(盤諸里), 고성 송현리(松峴里) 등의 유적도 있다.

앞의 유적들이 남한에서는 청동기시대 중기의 원주(原住) 집단에 채 융합되지 못하고 떨어진 높은 구릉에 정착한 반면, 보령 관창리(寬倉里) 유적 등 낮은 구릉이나 평지에 조성된 전형적인 송국리형 취락에서도 점토대토기를 내는 주거지가 소수이지만 확인되어 원주집단에 이주집단이 흡수 혹은 수용되었던 상황을 보여준다.

송국리형 원형 주거지는 호남 지역에서 제주도로 전이(轉移)되어 이 지역에서 청동기시대 이후 더욱 늦은 시기에 오랫동안 널리 조성된다.

4. 무덤과 제사 유적

청동기시대 조기에 속하는 무덤 유적으로 요서 지역에서는 신민(新民) 고태산 유적에서 군집을 이룬 토광묘가 확인되었지만, 요동 지역에서는 본계(本溪) 일대의 동굴(복합)묘와 대련시 일대의 적석(복합)묘가 있다.

마성자유형이 성행한 태자하(太子河) 유역에서는 동굴 안에 공동묘지가 조성되었는데, 간단히 땅을 파고 1인의 시신을 안치한 다음 다수의 토기와 생활공구를 부장하고 있다. 모양을 갖춘 석관시설은 늦은 단계에야 조성되기 시작한다.

요동반도 남단에서는 다수의 인골을 매장한 단위 분묘를 적석 연접하여 공동묘역을 조성하였는데. 흔히 대표 유적 지명을 따 대련(大連) 장군산(將軍山)식 적석묘 [고인돌]로 불린다. 이에 속하는 여순(旅順) 우가촌(于家村) 타두(砣頭) 적석묘의 경우, 한 묘역에 58기의 묘광(墓壙)이 조성되어 있고, 각 묘광에는 10인 내외의 주검이 매장되어 있다.

부장품은 대부분이 토기이고, 석검과 동검 등 무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서북한 지역에서 황주 침촌리형 소형 지석묘나 석관묘가 조성되기 시작하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전형적인 지석묘나 개석식 지석묘[大石蓋墓]가 본격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장군산식의 적석묘에서는 한 묘광에 다수의 주검을 안치함으로써 혈연집단의 긴밀한 유대가 반영되는데, 비슷한 정황은 한 동굴에 다수의 1인 무덤이 조성된 마성자식 동굴묘도 마찬가지이다. 부장되는 유물과 분묘의 규모로 볼 때 피장자 간 차이가 확인되지 않아, 공동체 내에 구성원 혹은 가구 간에 위계적인 모습을 볼 수 없다. 아울러 무기가 부장되지 않아 군사적 귄위를 가진 엘리트의 모습도 확인되지 않는다.

전기에 요동과 서북한 지역에 탁자식 지석묘와 대석개묘, 석관묘가 등장한다. 요동 지역의 개주 화가와보(伙家窩堡) 지석묘가 이른 사례로서, 판석 모양의 지석과 상석을 갖춘 것으로 상석 길이가 2m 남짓한 소형이다.

수암 쌍방(双房)의 개석묘는 지하에 석관시설을 갖추고 지상에 큰 상석을 덮은 것이다. 요동에서는 무순(撫順), 청원(淸原) 일대, 길림 동부의 연길(延吉) 등에서는 석관묘가 조성된 사례가 확인된 바 있다. 남한에서는 소형 석관묘나 도랑이 둘린 주구묘(週溝墓)가 조성되었지만 제대로 모양을 갖춘 지석묘는 아직 조성되지 않았다.

비파형동검이 부장된 사례로 요동 수암 쌍방(雙方)의 대석개묘와 서남한 서천 오석리의 주구(週溝) 석곽묘를 들 수 있는데, 이전 단계에 무기가 전혀 부장되지 않은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로 보아 세습적이지는 않더라도 일정한 위세가 있는 개인이 등장한 사실이 확인된다.

청동기시대 중기에 각지에서 다양한 묘제가 성행하게 된다. 청동기를 다량 부장하는 분묘와 함께 앞선 시기의 돌무덤은 더욱 발전하여 각 지역에서 각기 다른 형식으로 발전한다.

다량의 청동기를 부장한 석곽 무덤으로서 대릉하 유역의 조양 십이대영자 무덤이 대표적이다. 내부에 목관이 있는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인골과 함께 비파형동검, 청동 화살촉, 청동 도끼와 함께 다뉴(多鈕) 기하학문경과 원개형동기 등이 부장되어 있었다.

비파형동검 등의 여러 청동기가 부장된 사례로 요서 지역의 객좌 포수영자(砲手營子), 요동 지역의 경우 부장되는 청동기의 수량이 축소되어 동검과 동경이 본계 양가(梁家)의 무덤에서 확인된다. 인력 동원으로 권위를 강조하며 공동체를 선도하는 지도자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지석묘 혹은 대석개묘와 달리 이러한 청동기 부장묘는 무기와 의기로 보아 군사적, 종교적 위세를 갖춘 실력자의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동과 서북한에서는 대형의 탁자식 지석묘로서 요동 개주 석붕산(蓋州 石棚山), 서북한 은율 관산리(冠山里) 등지에서 판석으로 만든 지석이 높이가 2m가 넘고, 상석 길이가 8m에 이르는 사례가 발견된다. 또한 지하에 시신 매장 공간을 마련한 다음 지상에 상석을 덮는 대석개묘 혹은 개석식 지석묘가 축조된다. 요동 본계 신성자(新城子)와 봉성 동산(鳳城東山) 유적, 서북한 개천 묵방리(墨房里) 유적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요동 남부에서는 이전의 적석묘가 계속 조영(造營)되지만 앞선 단계와 달리 단일 적석묘역 내 분묘 간에 구조와 배치상에 일정한 차이가 확인된다. 대련 강상(崗上) [요령 강상 유적]이 바로 그것으로 중앙의 7호묘를 중심으로 주위에 20여 기의 석관 혹은 석곽묘가 배치되어 있다. 전 단계와 마찬가지로 한 분묘에 10∼20명의 주검이 매장되어 있으며, 비파형동검 등의 청동기가 부장되어 있다.

남한에서는 큰 규모의 개인 묘역을 갖춘 지석묘가 등장하는데, 묘역 시설은 크게 두 가지 형식이 있다. 하나는 장방형의 경계 구획을 줄구덩이로 시설한 형식, 다른 하나는 적석 기단으로 장방형 혹은 원형의 경계 구획을 시설한 형식이다. 전자는 북한강 상류의 춘천 천전리(泉田里) 지석묘가 대표적으로, 길이가 수십 m에 이르는 대형의 주구가 확인되었다. 후자는 경산 대학리, 산청 매촌리(梅村里), 진주 초장동(草長洞), 창원 덕천리(德川里), 마산 진동리(鎭東里) 등 영남 지역 전역에서 다수가 확인되는데, 묘역의 길이 또한 수십 미터에 이른 것이 적지 않다.

한편 지하 매장 시설을 조성하는데, 토광을 깊게 파고, 바닥에 석관을 안치한 다음 그 위로 3~7겹의 개석 시설을 갖춘 다중 개석묘(多重 蓋石墓)가 있다. 한반도 남부 해안에 근접한 지역에서 확인되었는데, 보성 동촌리(東村里), 김해 율하리(栗下里) 등 유적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후기에는 심양 정가와자(鄭家窪子) 6512호 목곽묘의 부장 양상에서 보듯이, 요동 지역에서의 우두머리의 모습에서도 변화를 보인다. 이 분묘에서는 청동 단검과 함께 다뉴경, 마구, 의기, 동경 그리고 수백 점의 청동 화살촉이 부장되어 있다.

정가와자와 같은 다량의 청동기를 부장한 수장급 피장자의 분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서북한의 경우 평양 신성동(新城洞) 석곽묘를 통해서 초기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남한 중서부에서 정가와자 사례 유사한 동경과 동검을 비롯한 다량의 청동기를 부장한 적석 목관묘는 초기 철기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아산 남성리, 대전 괴정동, 예산 동서리 등지에서 보인다.

청동기를 다량 부장하는 분묘가 널리 확산되는 데에도 불구하고 전단계의 큰 돌 무덤의 전통은 각 지역에서 지속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요동에서는 환인, 본계, 영길 등지에서 대석개묘, 앞서 소개한 남한 남부의 묘역식, 다중개석식, 위석식(圍石式) 등의 지석묘 일부가 이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집단 구성원을 아우르는 신앙 · 의례 행위는 이미 청동기시대 조기는 물론 신석기시대부터 유행했을 수도 있지만 실제적 증거는 중기의 유적과 유물에서 다수 확인된다.

청동기 중기부터 등장하는 다뉴 기하학무늬 동경(銅鏡)은 근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거울이 중요한 무구(巫具)이었듯이 제사를 주관했던 실력자의 권위를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제사의 공간으로서는 구릉 정상의 환호 시설이 확인되거나 제사용 건물로 사용되었을 고상 가옥의 터가 확인되기도 된다. 전자는 창원 남산 서상동의 사례가 있고, 후자로는 경상남도 사천 이금동(梨琴洞)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금동의 경우 15m가 넘고 총 20여 개의 기둥 구멍이 쌍을 이루며 확인되었는데, 생활구역과 분묘군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후기에 안성 반제리, 합천 영창리(盈倉里), 화성 동학산(東鶴山), 경주 화천리 등 유적에서는 구릉 정상부를 둘러싼 환호가 발견되는데, 주거 구역과는 분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내부에 다른 기능의 시설이 없고 청동기를 매납한 사례도 있어 중기보다 의례적 성격이 더 강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밖에 장방형으로 구획된 적석 시설을 갖추고 한가운데에 입석(立石) 혹은 선돌을 설치하여 제사시설로 인정되는 사례가 대구 진천동(辰泉洞), 밀양 신당동(新堂洞) 등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산청 매촌리(梅村里)의 경우 방형 적석묘역을 갖춘 지석묘와 쌍을 이룬 원형 적석 제단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김해 율하리 낮은 구릉 위 거대한 적석 묘역 시설 근처에서 발견된 기둥 구멍이 대전 출토 농경문 청동기의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은 솟대와 같은 제의 시설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별도로 동물문과 기하학문의 암각화가 시문된 바위와 암벽 유적 또한 제사 공간으로 활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각종 고래와 함께 호랑이, 노루 등 육지 짐승이 묘사된 울산 반구대 암각화 제사 유적은 그 상한이 신석기시대로 올라간다고 주장되지만, 표현 내용으로 볼 때 청동기시대에까지 지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기에 속하는 것으로 여수 오림동, 경주 안심리 지석묘 상석에 마제석검의 그림이 있어 이를 숭배하는 의례 활동이 이 유적 공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제단 석축과 입석에서 동심원문 등의 암각화가 장식된 사례가 앞서 진천동과 신당동의 유적에서 확인된다.

각종 기하학 무늬가 새겨진 영남과 그 주변에서 확인된 암각화 유적은 고령 장기리, 경주 금장리 사례를 비롯하여 대체로 초기 철기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의례 활동은 청동기시대 후기에서 시작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5. 주민 사회와 고조선

청동기시대인 서기전 1000년에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에 걸쳐 있는 인구집단과 관련하여 중국 문헌 기록에 예 · 맥 · 한이라는 종족 명칭의 이름이 전하지만, 그 실체와 시공간적 위치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집단 스스로 내세우는 정체성은 타자가 인식하는 것과 같지 않아, "종족(ethnicity)은 일정한 물질 문화를 공유하는 인구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는 고전적인 인식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

그렇지만 동일한 토기 갖춤새와 청동기를 공유하는 경우 집단의 구성원 간에 최소한의 동류 의식을 갖춘 집단의 전제 조건으로 검토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 그러한 점에서 평저 무문토기와 비파형동검을 공유하는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의 주민 집단에 대해서 예 · 맥 · 한과 그에 속하는 복합사회 혹은 정치체의 관점에서 검토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들 종족 내의 기록에 전하는 정치체로 고조선부여, 진국 등이 있으며, 그중 고조선이 앞선 시기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다.

고조선은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전하고 춘추시대 제(齊) 나라와 교역을 하는 서기전 86세기의 전기 고조선, 우두머리가 왕이라 이름을 칭하고 전국 연과 각축을 벌이는 서기전 54세기의 중기 고조선, 전국 연(燕)의 소왕(昭王) 때 장수 진개(秦蓋)의 동진으로 고조선의 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서기전 3세기의 후기 고조선, 그리고 위만(衛滿)이 고조선 준왕(準王)을 내몰고 세운 서기전 2세기의 위만조선으로 구분하여 살필 수 있다.

그중 전기와 중기 고조선이 청동기시대에 속하는데, 일정 수준의 복합사회로서 국가 이전 단계의 수장사회(chiefdoms society)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한 고조선을 요동과 서북한 지역의 지석묘 집단을 통하여 설명하는 관점이 있다. 지석묘는 묻힌 사람이 아니면 그 집안의 정치적 권위와 경제적 부를 토대로 하여 다수의 인력을 동원해서 축조한 무덤이다. 개별 취락 혹은 여러 취락의 구성원이 일상 혹은 유사시에 공유한 이념과 사회조직을 동원하여 협력해서 지석묘를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무덤에 부장되는 위세품은 마제석검과 석촉이 대부분으로 청동기로는 동검이 간혹 부장되어 묻힌 주인공이 보여주는 군사적 권위도 높지 않다. 따라서 지석묘 축조 집단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초기 복합사회 혹은 족장사회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어서 중국 측 기록에 전하는 종족 집단 혹은 정치체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기반이 되는 하위 혹은 원주 집단이라 할 수 있다.

훨씬 발전된 복합사회 혹은 수장사회는 무기, 공구, 의기(儀器), 장신구 등의 다종 다양한 기종의 청동기를 부장한 무덤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다. 이들 무덤의 주인공은 부장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군사 · 종교적 권위를 앞세운 엘리트로서, 지석묘에서 보는 공동체적(group-oriented) 성향보다는 개인적인(individualizing) 권력을 지향하면서 사회를 통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동북 지역에서는 서기전 97세기경에 요서 대릉하 유역의 조양 십이대영자, 서기전 65세기에는 요동 혼하 유역의 심양 정가와자, 길림 지역의 서황산둔(西荒山屯)에서 사례가 발견되며, 서기전 4~3세기 한반도의 서북한에서 수장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성천과 맹산 등의 다뉴경 거푸집, 서남한의 아산 남성리 등의 사례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지역마다 다소 형식의 차이가 있지만, 토기는 점토대 심발형토기를 표지로 하고, 청동기는 비파형과 세형의 청동 단검, 다뉴 기하학문경을 표지로 한다. 이러한 새로운 청동기 부장묘 주인공이 이끄는 정치체가 각 지역별로 시기를 달리하여 등장하였으며, 그중에서 고조선 정치체를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요약해서 말하면 문헌 기록에 고조선의 공간 추정 범위인 요령 지역에서 서북한에 걸쳐 확인되는 서기전 1000년 전반의 비파형동검과 다뉴 기하학문경을 표지로 한 청동기 부장묘로서 고조선 정치체의 모습을 단편적이나마 고고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리고 서기전 1000년 후반에는 길림 지역, 그리고 한반도 서남부에 유사한 청동기 부장묘가 있어, 이를 통해서 고조선의 뒤를 이어 각각 부여와 진국으로 이해할 수 잇는 정치체가 등장하였음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오대양, 『북한지역 청동기시대 묘제와 고조선 연구』(단국대출판부, 2020)
『한국의 청동기문화』(국립청주박물관, 2020)
이종철, 『청동기시대 송국리형문화의 전개와 취락체계』(진인진, 2016)
『청동기시대의 고고학(1-5)』(한국고고환경연구소 학술총서, 서경문화사, 2014-2016)
『청동기시대 검단리 유형의 연구』(이수홍, 2015)
박영구, 『동해안지역 청동기시대 취락과 사회』(서경문화사, 2015)
이청규, 『다뉴경과 고조선』(단국대학교출판부, 2015)
『한국청동기문화개론』(중앙문화재연구원 편, 진인진, 2015)
히라고리 다츠야, 『무덤자료로 본 청동기시대 사회』(서경문화사, 2013)
미야자토 오사무, 『한반도 청동기의 기원과 전개』(사회평론, 2010)
이형원, 『청동기시대 취락구조와 사회조직』(서경문화사, 2009)
『한국청동기시대 편년』(한국청동기학회 편, 서경문화사, 2009)
『한국고고학강의』(한국고고학회, 사회평론, 2009)
쇼다 신야, 『청동기시대의 생산활동과 사회』(학연문화사, 2009)
『무문토기문화의 성립과 계층사회』(한서경문화사, 2007)
손준호, 『청동기시대 마제석기 연구』(서경문화사, 2006)
오강원, 『비파형동검문화와 요령지역의 청동기문화』(청계, 2006)
조진선, 『세형동검문화의 연구』(학연문화사, 2005)
『청동기시대 영남지역의 농경사회』(학연문화사, 2005)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시대』(국립문화재연구소, 2004)
유태용, 『한국 지석묘 연구』(주류성, 2003)
이영문, 『한국 지석묘 사회 연구』(학연문화사, 2002)
석광준, 『조선의 고인돌무덤 연구』(중심, 2002)
이건무, 『청동기문화』(대원사, 2000)
하문식, 『고조선 지역의 고인돌 연구』(백산자료원, 1999)
『한국사』 3-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국사편찬위원회, 1997)
『한국사』1 (한길사, 1994)
『한국의 청동기문화』(국립중앙박물관, 1993)
『조선고고학전서-고대편-』(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8)
윤무병, 『한국청동기문화연구』(예경산업사, 1987)
김원룡, 『한국고고학개설』(일지사, 1986)
황기덕, 『조선의 청동기시대』(사회과학출판사, 1984)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