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대전의 한 상인이 고철수집인에게 구입한 것이 서울의 골동상인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장되게 되었다. 정확한 출토상황이나 출토지가 알려져 있지 않고, 대전에서 출토되었다고만 전해지고 있다.
현재는 하반부가 떨어져 없어진 상태로, 크기는 남은 길이 7.3㎝, 너비 12.8㎝, 두께 1.5㎜이다. 앞뒷면에 광택이 나고 제작수법이 정교하다. 윗부분 가장자리에 6개의 네모난 구멍이 있으나 양끝의 2개가 많이 닳아 있어 오랫동안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앞뒷면에 사람과 동물의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앞면의 고리가 달린 쪽은 주연(周緣)에서 1㎝쯤 안쪽에 7, 8조(條)의 세선문대(細線文帶)를 청동기 윤곽과 평행되게 돌렸다. 대체로 1.5㎝쯤 돌다가 3, 4조의 짧은 선이 직각으로 꺾여 있다.
중앙에는 문살무늬띠〔格子文帶〕를 수직으로 내려 문양구획을 양쪽으로 나누었다. 왼쪽에는 반원형 꼭지〔鈕〕가 붙어 있고, 거기에 굵은 실을 꼬아 만든 듯한〔絡繩形〕 고리가 달려 있다. 오른쪽은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없다.
양쪽 모두 Y자형의 선각(線刻) 끝에 몸에 반점이 찍힌 새 2마리가 각각 마주보고 앉아 있다. 오른쪽에는 새 1마리만 완전하게 남아 있고, 다른 1마리는 하반부와 Y자형 선각의 끝이 밖으로 휘어진 부분에 앉아 있다. Y자형의 선각은 나뭇가지를 나타낸 것 같다.
뒷면에는 윗부분 가장자리에 톱니무늬띠〔鋸齒文帶〕를 돌렸으나 양옆의 가장자리는 이중복조선대(二重複條線帶)로, 바깥쪽에는 윗부분의 가장자리와 같은 톱니무늬띠로 장식하고 안쪽에는 문살무늬띠를 돌렸다.
중앙에는 앞면처럼 문살무늬띠를 수직으로 내려 면을 양쪽으로 나누었다. 왼쪽 구간에는 사람이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고, 그 앞에는 사격자문(斜格子文)의 아가리가 좁은 항아리가 놓여 있다. 사람 머리 뒤에는 가늘게 상투 같은 것이 달려 있다. 손에 무엇인가 잡고 있는 듯하나 부식(腐蝕)이 심해 알 수 없다.
오른쪽 구간에는 사람이 두 손으로 농기구를 잡고 한 쪽 발을 농기구에 얹어놓고 있다. 농기구는 끝이 두 가닥으로 갈라져 있어, 모양이 지금의 따비와 같다. 머리는 뒤로 길게 늘어뜨려 끝이 두 가닥으로 갈라져 있으며, 다리 사이에는 남근(男根)이 삼각형으로 표현돼 있다.
그 아래는 10개의 평행선을 가로로 새겨 밭고랑을 표시하였다. 밭고랑 밑에는 또 한 사람이 두 손으로 괭이를 치켜들고 있는데, 상반신만 남아 있다. 얼굴은 옆모습만 표현하고 뒷머리 부분을 따로 반달형으로 표시하였다. 밭갈이하는 사람은 남자, 괭이질하는 사람은 여자를 표현한 듯하다.
이것과 형태가 비슷한 청동기로는 대전 괴정동 출토의 방패형 동기와 아산 남성리 출토의 방패형 동기가 있다. 농경문 청동기의 주연부에 있는 격자문띠는 괴정동 대쪽모양 동기에서 보이며, 앞면의 직각으로 꺾이는 선문대(線文帶)는 사슴조각이 새겨진 예산 동서리의 대쪽모양 동기에서 보인다.
따라서 농경문 청동기는 괴정동의 요소를 가지면서 남성리의 요소도 가지고 있는 중간형태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양쪽 돌기의 형태에 있어 괴정동의 둔한 모양이 농경문 청동기를 거쳐 남성리의 방울이 생기는 형식적인 발달과정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유물은 금강유역에 분포돼 있는 후기 청동기문화 영역의 일환으로 서기전 3세기에 해당하는 유물로 볼 수 있다.
나뭇가지에 새가 앉아 있는 형태는 내몽고의 오르도스 청동기(Ordos靑銅器)에 새장식간두〔鳥飾竿頭〕로 나타나고, 남러시아·한반도·일본에까지 널리 퍼져 있다.
이것은 새가 인간의 영혼을 저승으로 안내한다는 상징적인 의미 내지 시베리아지역에 퍼져 있는 샤먼신앙과 관계 깊은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다. 이로써 새에 대한 신앙의 유입과정 내지는 스키타이문화의 전파경로를 알 수 있다.
뒷면의 밭가는 형상은 이 시기에 본격적인 농경이 시작되었음을 말해주며, 당시의 농경이 따비나 괭이를 사용해 밭을 가는 고도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유물은 문양이나 형태로 보아 당시 사회의 종교의식 내지 신앙 제의(祭儀)와 관계가 깊은 의기(儀器)이다. 뒷면 오른쪽 남자의 밭갈이를 봄갈이로, 왼쪽을 여자의 가을 추수장면으로 보고, 봄·가을의 제사행사 때 쓰던 솟대 끝에 매달았던 의식도구로 보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