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장인묘(夫租長印墓)’로도 불린다. 낙랑토성 주변에 산재한 2,000여 기의 고분 중 100여 기를 발굴하여 이미 조사된 순서에 의해 고분번호를 붙여나갔는데, 고상현묘는 정백동 제2호분으로서, 정백동 제1호분인 부조예군묘(夫租薉君墓)에서 동쪽으로 약 100m 떨어져 있다. 이 유적은 1961년에 조사되었다.
구조는 평지의 맨땅에 한 변의 길이 3.4m×3.1m, 깊이 1.5m 안팎의 네모난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두께가 20㎝ 이상 되는 굵은 각재를 깔고, 그 변두리의 네 벽을 다시 각재로 쌓아올려서 덧널을 만들었다. 그 안에 부부의 널을 한쪽에 치우치게 두고 나머지 ㄱ자형의 공간에 껴묻거리〔副葬品〕를 넣었다.
매장이 끝난 뒤에는 부부의 널을 한쪽에 두고 널 사이에 기둥을 세워 갈라놓았다. 덧널의 크기는 남북 2.8m, 동서 2.5m, 벽 높이는 56㎝이다. 두 개의 널 중 서쪽편이 남자의 널이다.
유물은 널 서쪽의 공간에서 한국식 동검·일광경(日光鏡)·용호경(龍虎鏡)·마면(馬面)·노기(弩機)·말방울·거마구(車馬具)·옻칠일산과 도장 2점 등이 출토되었다.
옻칠일산대에는 ‘永始三年十二月呑鄭氏作(영시3년12월탄정씨작)’이라는 명문(銘文)이 있는데, 영시 3년은 서기전 14년에 해당한다. 도장 2점은 모두 은제품으로 각각 ‘夫租長印(부조장인)’·‘高常賢印(고상현인)’의 명문을 가지고 있다.
이 명문에 의해 무덤의 이름을 고상현묘 또는 부조장인묘라고 부른다. 부조는 낙랑의 영역으로서 영동(嶺東) 7현(七縣)의 하나이며, 고상현은 한(漢)으로부터 현장(縣長)으로 봉해진 토착호족의 이름으로 생각된다.
이 무덤에서 출토된 한국식 동검은 마디가 없는 최말기의 퇴화된 형식이고, 마구를 비롯한 일괄유물은 한나라의 유물로, 토착문화와 외래문화인 한문화의 유물이 섞여 있으며 묘의 형식도 한식(漢式)인 덧널무덤이다.
묘의 주인이 토착의 호족인 점이나, 부장품의 내용에 있어서 한국식 동검을 비롯한 한반도 특유의 토착유물과 한나라의 유물이 섞여 있는 현상은 한군현시대에 낙랑과 토착호족과의 관계를 말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영동지역의 호족의 무덤이 평양에 위치한 것도 흥미가 있다.
일광경과 용호경은 전한(前漢: 서기전 206년∼서기 24년) 말기인 서기전 1세기경의 유물로, 위의 영시3년이라는 명문과 함께 무덤의 연대를 결정하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