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령 정가와자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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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중국 요령성 심양시(瀋陽市) 정가와자에 있는 청동기시대 청동단검 · 쌍뉴경 등이 출토된 널무덤. 토광묘.
내용 요약

요령 정가와자 유적은 중국 요령성 심양시 정가와자에 있는 청동기시대 청동단검·쌍뉴경 등이 출토된 널무덤이다. 이 유적은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오래전부터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정가와자 마을에 위치한다. 무덤 규모나 출토 유물로 보아 무덤의 주인공은 선양 일대 요양 평원 지역을 관할하던 고조선의 최고지배자 또는 예맥계 정치집단 지배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과 관련하여 중요한 유물은 비파형 동검이다. 고인돌 분포지역과의 일치 및 서북한 세형동검 문화와의 연계성으로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정의
중국 요령성 심양시(瀋陽市) 정가와자에 있는 청동기시대 청동단검 · 쌍뉴경 등이 출토된 널무덤. 토광묘.
개설

요령 정가와자유적은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오래 전부터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정가와자 마을에 위치한다. 이 유적에는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 폐쇄된 상태로 외부인의 출입이 차단되어 있다. 주1 남서쪽 혼하(渾河) 북쪽 3㎞에 있으며, 이곳은 지세가 낮고 소택이 많은 곳이다.

1958년에 27점의 청동기가 발견되고, 1963년에 또 1점의 단검이 발견되었다. 또한, 1965년에는 제2지점 남서쪽 500m에서 같은 유형의 분묘 14기가 발굴되었다. 보고된 것은 소형 토광묘로 이루어진 북구의 제659호와 대형 목곽묘로 된 남구의 제6512호이다. 그 밖에 정가와자에서는 1965년 조공가 유적(肇工街遺蹟)으로부터 남쪽 1,500m 지점에서 주2 2기와 주3 1기가 발굴되었다.

내용

제6512호묘는 주4의 크기가 5m×3m이며, 황토를 파고 만든 것으로 불규칙한 장방형의 구조이다. 지면에서 1.4m 밑에 있는 묘바닥에는 목곽(3.2m×1.6m)과 목관(2m×0.7m)이 놓이고, 곽과 묘벽의 사이는 흙으로 채웠다. 관과 곽 사이 그리고 관 내에는 총 42종 797점의 부장품이 있었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청동기이다. 무기류는 청동단검(3점) · 화살촉 및 화살과 그 주머니 등이 있고, 장식품에는 경형식(鏡形飾), 칼과 그 주머니, 동포(銅泡) · 쌍뉴경(雙鈕鏡) 등이 있다. 마구로는 표(鑣) · 함(銜) · 나팔형장식 등이 있다.

무덤 규모나 출토 유물로 보아 무덤의 주인공은 선양 일대 요양 평원 지역을 관할하던 고조선의 최고지배자 또는 예맥계 정치집단 지배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문헌에서는 당시 요동지역에서 성장한 세력에 대해 ‘조선후국(朝鮮侯國)’이라 표현하고, 이들이 성장하여 ‘왕(王)을 칭’하는 등 ‘교만하고 사납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659호묘도 묘광(1.75m×0.5m)이 불규칙한 장방형 토광묘이다. 노년의 남자인골, 도호(陶壺), 뼈로 된 칼, 고리 등이 발견되었다. 요령 십이대영자 유적의 청동동검 · 다뉴경 · 나팔형식옥 · 반월형식옥 · 주5 등은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 예산 동서리 등지의 주6에서도 출토되어 주목된다.

한편 정가와자유적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비파형 동검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비파형 동검문화는 크게 남동구 유형과 정가와자 유형으로 나누는데, 남동구 유형은 객좌중심으로 북방계 유물군이 다량으로 공반하며, 정가와자 유형은 심양중심으로 토착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남동구 유형은 ‘동호(東胡)’가 남긴 것으로 보고 있다.

정가와자 유형은 요동지방에서 타 문화에 대해 상위교섭관계를 가지는 주도적인 문화로 발전하게 되며, 비파형 동검뿐 아니라 고인돌 분포지역과 겹치고 있고, 서북한 지역의 세형동검문화와 강한 연계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다만, 요하 하구-대릉하하구에 이르는 지역은 ‘동호’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지 않아 동호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자족(箕子族)이 대릉하 하구쪽에 모여 살았을 가능성 까지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국가’라고 인정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닐 것이다. 또한 은 · 주(殷周) 계열의 유물이 고조선의 영역 내 출토물이 없고, 또 기록을 통해 기자는 동진한 것이 아니라, 산동반도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기자와 중국계 유민이 조선으로 들어와 지배계급이 되었다는 ‘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은 남북한 학계에서 모두 부인되며, 이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배격하는 주요 논거로 사용된다.

의의와 평가

정가와자 유적에 속한 사회는 농경을 주로 하고, 어로와 수렵이 보조가 되는 생활을 하였고, 그 주인공은 동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기록에 보이는 동호족의 거주지역과 요령식 동검의 생성배경 등을 고려한다면, 동호족과 같은 유목민족보다는 한 지역에 오래 머무르면서 여러 문화요소를 융합할 수 있는 농경민족(예맥 · 숙신 등)의 것으로 이해함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정가와자형호(鄭家窪子型壺)의 형식변천(型式變遷)과 지역적 분포양상(地域的 分布樣相)」(오강원, 『과기고고연구』제8호, 2002)
「중국동북지방(中國東北地方)의 고분(古墳)」(강인구, 『한국상고사(韓國上古史)의 제문제(諸問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심양정가와자 청동기시대 묘(瀋陽鄭家窪子靑銅器時代墓)와 부장품(副葬品)-예맥(濊貊)퉁구스의 청동전기문화(靑銅前期文化)-」(김원룡, 『동양학』6, 1976)
『崗上·樓上』(朝中合同考古學發掘隊, 東北アジア考古學硏究所 譯, 六興出版, 1986)
「瀋陽鄭家窪子的兩座靑銅時代墓葬」(瀋陽古宮博物館, 『考古學報』1975年 1期)
주석
주1

중국 만주 랴오닝성(遼寧省)에 있는 도시. 교통의 요지이며 중공업이 발달하였다. 성내에는 궁전이 있고, 교외에 동릉(東陵)ㆍ북릉(北陵) 따위의 청나라 명소가 있다. 1932년 일본에 의하여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펑톈(奉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50년 이후 다시 선양으로 바뀌었다. 랴오닝성의 성도(省都)이다. ⇒규범 표기는 ‘선양’이다. 우리말샘

주2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직접 넣거나 목관이나 목곽에 시체를 넣고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린 무덤. 우리말샘

주3

시체를 큰 독이나 항아리 따위의 토기에 넣어 묻는 무덤. 전 세계적으로 널리 쓰인 무덤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 시대부터 나타난다. 우리말샘

주4

무덤 칸이나 곽 또는 관을 넣기 위하여 판 구덩이를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5

그릇의 뚜껑처럼 둥글고 한쪽이 오목한 청동기 시대의 그릇. 제례 의식 때 썼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말샘

주6

지면을 깊게 파고 자갈 따위의 석재(石材)로 덧널을 만든 무덤. 삼국 시대에 사용했으며 널길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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