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령 십이대영자 유적 ( )

선사문화
유적
중국 요령성 조양시 조양현(朝陽顯) 십이대영자(十二臺榮子)에 있는 청동기시대 앞트기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이칭
이칭
조양십이대영자유적(朝陽十二臺榮子遺蹟)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요령 십이대영자 유적은 중국 요령성 조양시 조양현 십이대영자에 있는 청동기시대 앞트기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이다. 3기의 무덤이 발견되었으나, 2기는 이미 파손되었고 1기만 발굴하였다. 부부합장을 하였고 부장품은 청동단검과 잔무늬거울이 나왔다. 비파형동검과 잔무늬거울이 같이 출토된다는 점에서 한국의 청동기문화·고조선과 연결하여 이 유적의 축조 주체에 따라 고조선의 중심지 추정이 가능하다. 1980년대부터 서기전 8세기 경에 고조선이 남긴 유적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또한 최근 연구자들은 이 유적이 요동의 청동기 문화와 관련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정의
중국 요령성 조양시 조양현(朝陽顯) 십이대영자(十二臺榮子)에 있는 청동기시대 앞트기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개설

이 유적은 십이대영자 남쪽 약 600m의 백산(柏山) 북쪽 밑의 고지상에 있다. 1958년 관개작업 중에 3기의 무덤이 발견되었으나, 2기는 이미 파손되었고 1기(제1호묘)만 발굴하였다. 부장유물로 청동단검 및 잔무늬거울[多鈕細紋鏡]을 출토하였다.

내용

1호묘의 무덩방은 자연괴석과 자갈돌로 네 벽을 6층으로 쌓고, 묘바닥에는 자갈돌을 깔았으며, 무덤문이 서쪽으로 난 앞트기식돌덧널무덤[橫口式石槨墓]이다. 무덩방은 길이 180㎝, 너비 100㎝, 높이 120㎝이고, 지표 밑 2m에 천장이 있다. 무덩방 내에서는 부부합장으로 보이는 인골 2구가 머리를 서쪽으로 향하고, 돗자리가 깔린 목판 위에 있었다.

이곳에서 출토한 부장품은 대부분 청동기이다. 2점이 발굴된 청동단검은 같은 형식으로 전체 길이 35.6㎝, 날부분 길이 30.7㎝이다. 날은 비교적 얇으나 예리하고, 자루부분에 마사(麻絲) 흔적과 목질이 있어 자루로 나무가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잔무늬거울도 2개가 확인되었다. 그 조형 · 무늬 · 크기가 똑같고 지름 20.4㎝, 두께 5㎜∼6㎜이다. 뒷면의 가장자리 가까이에 3개의 꼭지가 3각형으로 배열되어 있다. 그 밖에 Y자 동구(銅具) · 도끼 · 끌 · 패(牌)와 같은 청동기가 있었다.

2호묘는 1호묘의 남쪽으로 약 5m에 있다. 묘실은 길이 230㎝, 너비 100㎝, 높이 70㎝이고, 구조 및 부장품은 1호묘와 비슷하다. 특히, 잔무늬거울은 뒷면에 4개의 꼭지가 방형으로 배치된 점이 특이하다.

3호묘는 2호묘의 서쪽으로 약 10m에 있다. 이곳에서 출토한 잔무늬거울은 뒷면 전체에 기하학무늬가 있고, 3개의 꼭지가 ‘川’자형으로 배열되어 있다.

여기에서 출토한 청동검과 잔무늬거울은 요령지역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연해주 남부 일대에도 분포한다. 이곳의 돌덧널무덤남산근유적(南山根遺蹟)과 같은 구조로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 부여 연화리 등지의 돌덧널무덤과 일치한다.

특징

이 유적의 특징에 대해서는 서로 반대의견이 주장되었다. 한 쪽에서는, 십이대영자 유적을 중심으로 대 · 소릉하(大 · 小凌河) 유역의 청동기문화는 요서지방 전체로 보았을 때 유물상의 차이점만 보일 뿐, 문화적 특징에서는 차별성을 밝히기 어렵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십이대영자문화를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의 한 지방유형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이 지역의 문화는 하가점상층문화와는 다른 독립적인 문화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유적은 이지역 주변에서 발견되는 특징적인 비파형동검과 잔무늬거울을 공반한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그것이 바로 한국의 청동기문화 · 고조선과 연결될 수 있는 중요한 점이다. 비파형동검과 잔무늬거울 등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고루 출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이대영자 유적은 축조 주체가 누군가에 따라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가 평양인지, 요서지방인지 바뀔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또 한편 이 무덤이 춘추시대 말기 혹은 전국시대에 해당하며, 동호족(東胡族)이 주인공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무덤이 처음 보고된 1960년대만 해도 서기전 6∼5세기에 동호라는 북방민족의 유적이라는 견해가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는 서기전 8세기 경에 고조선이 남긴 유적이라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의의와 평가

최근 연구자들은 십이대영자문화를 요하 이동, 곧 요동의 청동기문화와 관련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들은 요동지방 청동기문화의 담당자를 예맥(濊貊)으로 본다. 십이대영자문화는 요동비파형동검문화와 더불어 예맥청동기문화로서의 성격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십이대영자문화는 기원전 9세기 요서 서북부에서 처음으로 유물 복합이 형성된 이후 기원전 8세기 요서 대부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서기전 7세기에는 의무려산(醫巫閭山)과 유하(柳河)유역이 비파형동검문화권에 새로이 포섭되었으며, 서기전 6∼5세기에는 요하 이동으로 직접 확산되는 동시에 객좌(喀左) · 심양(沈陽)으로 분화하였다.

그리고 서기전 5∼4세기에는 요하 양안에 걸쳐 있던 정가와자유형의 매개 역할로 요령 전 지역에 통합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즉 요령 전역이 완전한 하나의 문화 단위를 이루게 되었다. 요령 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는 길림과 한반도의 청동기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서북한의 세형동검문화가 결국 요령 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후계문화라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참고문헌

『요서지역의 청동기시대 문화연구』(복기대, 백산, 2002)
「비파형동검문화 십이대영자 단계 유물 복합의 기원과 형성」(오강원, 『단군학연구』제16호, 2007)
「요서비파형동검문화(遼西琵琶形銅劍文化)의 재인식(再認識)」(박경철, 『선사와 고대』12, 1999)
「십이대영자(十二臺營子)의 청동단검묘(靑銅短劍墓)·한국청동기문화(韓國靑銅器文化)의 기원문제(起源問題)·」(김원룡, 『역사학보』16, 1961)
「遼寧朝陽十二臺營子靑銅短劍墓」(朱貴, 『考古學報』1960年 1期)
집필자
강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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