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합하(老哈河)의 지류인 곤도하(坤都河) 상류의 남쪽산 아래에 있는 다섯 갈래의 구릉상에 있다. 1958년 이곳에 있는 2기의 무덤으로부터 사람뼈[人骨] 1구와 청동기 71점을 수습하였다. 1961년에 본격적인 발굴을 실시하였고, 1963년에도 청동기를 다수 포함한 돌덧널무덤[石槨墓] 1기를 발굴하였다.
돌덧널무덤인 101호분은 타원형의 토광을 파고, 자갈돌로 벽을 쌓았다. 바닥은 작은 판석을 잇대어 깔았고 뚜껑돌[蓋石]에도 일부는 판석을 사용하였다. 바닥에 부식된 목질(木質)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나무널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장법(葬法)은 단인장(單人葬)이다.
101호분에서는 모두 500여 점에 이르는 청동유물을 출토하였다. 중원(中原)지역에서 사용한 예기(禮器)와 유사한 각종 청동그릇 11점과 함께 손칼·도끼·끌·화살촉·꺾창·투겁창·칼집·방패·투구 등의 공구와 무기들이 있었다. 차마구로는 재갈·말방울·장식·고리·단추 등이 있었고, 그밖에 거울 및 각종 장신구 등이 있었다. 이와 함께 중원지역의 예기와는 양식이 전혀 다른 일상용 토기의 형태와 유사한 청동그릇도 다수 출토하였다.
102호분은 101호분보다 소형이고, 앙신직지장(仰身直肢葬)이며, 머리가 동남쪽을 향하고 있다. 부장유물로는 청동손칼·끌·송곳·화살촉·말재갈·마구·거울 및 각종 장신구와 함께 돌도끼·뼈화살촉·구슬 등을 출토하였다.
남산근유적의 주요한 출토품인 고식(古式)의 비파형동검은 이곳을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의 표준유적으로 만들어 놓은 중요한 유물이다. 이 유적의 연대는 유사한 모양의 다른 유적의 연대로 미루어보아 서주 만기(西周晩期)∼춘추 초기(春秋初期), 즉 서기전 9세기 중반∼8세기 후반으로 추정한다.
남산근 유적은 한반도의 청동기문화와 관련이 깊다. 한국의 청동기시대 설정이나 문화를 언급할 때 비파형동검은 어느 유물보다 중요한 유물이다. 이 유물의 분포는 내몽고로부터 중국 동북지방, 그리고 우리나라의 남단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에 퍼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여 송국리 등지에서 출토한 비파형동검의 조형(祖型)이 남산근에서 발견되었다. 또 남산근의 돌덧널무덤과 유사한 형식이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 부여 연화리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나아가서 요령지방의 돌무지무덤[積石塚]과 돌널무덤[石棺墓]도 한반도와 유사한 형태를 가진다. 남산근유적을 통해 요령지방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이 당시에 문화적 동질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요서지방 청동기문화의 담당주민과 그 성격을 중국학계에서는 동호(東胡) 또는 산융(山戎)이라 보고, 북한 학계와 일부 남한학계는 예맥(濊貊)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요서지방의 청동기문화를 하가점상층문화라 통칭하면서, 그 문화의 성격과 주민을 일괄적으로 해명하고자 함은 타당성이 희박하다. 즉 요서의 청동기문화는 노로아호산 이북의 남산근문화와 그 이남 대릉하유역의 십이대영자문화(十二臺營子文化)로 나누어진다. 그리하여 최근에는 남산근문화(南山根文化)는 북방계, 십이대영자문화는 요동의 비파형동검문화(琵琶形銅劍文化)와 연계된 문화로 보는 경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