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

현대사
개념
한반도와 해외 여러 지역에 살면서 한인(Korean)으로서의 공통의 혈통와 문화, 정체성을 공유하거나 공유한다고 생각하는 아시아계 민족.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한민족은 한반도와 해외 여러 지역에 살면서 한인(Korean)으로서의 공통의 혈통과 문화, 정체성을 공유하거나 공유한다고 생각하는 아시아계 민족이다. 한민족은 문화적 개념으로 정치적 개념인 국민과 구별된다. 대한민국 국민에는 혈통적으로 한국인도 있지만, 외국인이 귀화해서 한국 국민이 되기도 한다.

정의
한반도와 해외 여러 지역에 살면서 한인(Korean)으로서의 공통의 혈통와 문화, 정체성을 공유하거나 공유한다고 생각하는 아시아계 민족.
내용

1. 개요

20세기 이후 세계화와 정보화의 확대는 기존의 편협한 지역성, 민족성, 종교성의 약화를 가져오고 대신 보편주의와 글로벌 스탠더드의 확대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종교 갈등, 민족 갈등, 인종 갈등은 이러한 낙관론을 무색하게 한다.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냉전 구도 해체 이후의 공백을 틈타 종교, 민족, 인종 간의 대립과 갈등이 첨예하게 일어나고 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역사 왜곡과 영토 분쟁으로 배타적 민족 감정이 되살아나고 있다.

중국은 ‘ 동북공정’을 통해 동북아시아 역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하려 하고, 일본은 왜곡된 역사지식을 자국민에게 교육하려 한다. 한국도 이에 대응하여 고구려사 연구를 진흥하고, 독도 수비를 강화하고, 동북아시아의 중심 국가로 성장하겠다는 국가 전략을 세우고 있다. 이렇듯 3국이 국가 전략 차원에서 동북아시아 문제에 접근하기 때문에 역사 분쟁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처럼 민족을 구성하는 객관적 요소와 주관적 요소가 강한 나라에서는 세계화의 대세에서도 강한 민족주의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특히 남북한이 분단된 상황에서 민족주의는 이념적 대립을 초월하여 남북한 주민들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강한 흡인력을 갖기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정신적 자산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민족주의를 단지 과거의 유산으로 성급하게 폐기할 수 없다.

그러나 세계화와 정보화의 물결로 인해 국가 간의 장벽이 낮아지고 타문화 · 타인종 간의 교류가 활발해진 현시점에서 혈통과 문화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종족적-혈통적 민족주의’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국내에 거주하는 이주 배경 인구는 2020년 222만 명에서 2040년 352만 명으로 증가해서 총인구 대비 구성비는 2020년 4.3%에서 2040년 6.9%까지 증가할 전망이다. 전체 인구의 5% 이상이 이주 배경 인구이면 그 사회를 다문화사회라고 하는데, 한국은 이제 다문화사회로 진입하는 단계에 있다. 더욱이 현재와 같은 저출산 · 고령화 추세가 지속되면 다문화사회로의 변화는 가속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일혈통과 문화를 민족 또는 국민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아 온 한국인에게 “한국인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다양한 문화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사회체계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혈통과 문화보다 보편적이고 개방적인 주민 정체성 또는 국민 정체성을 사회 성원권(social membership)과 사회 통합(social integration)의 원리로 삼을 필요가 크다.

개인의 생활세계와 정체성이 국경을 넘어 초국가적으로 이뤄지는 시점에 한민족이라는 개념도 시대 변화에 맞게 변용되고 확장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한민족은 대체로 한반도에 거주하는 한국인 혈통으로 인식되었으나, 이제는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재외한인도 한민족의 구성원으로 적극적으로 포용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재외한인의 역사와 문화가 한국 역사와 문화의 일부로 포함되어야 하고, 재외한인과 모국 간의 상생하는 글로벌 한민족 공동체를 활성화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21세기 세계화와 정보화, 다인종 · 다문화의 흐름 속에서 시대 상황에 적합한 한민족의 개념과 범위, 민족주의에 대해서 논의한다. 이를 위해 민족과 민족주의의 개념을 고찰하고, 한민족의 기원을 유전학적 · 고고학적 · 역사학적 관점에서 조사하고, 한민족 문화의 토대가 되는 언어와 사상을 검토한다.

그리고 한국 민족주의의 전개 과정을 조사하고, 21세기 시대 상황에 적합한 한국적 민족주의의 내용과 방향을 모색한다. 끝으로 재외한인을 한민족의 범위로 포용하기 위해 재외한인의 역사와 특성을 소개한다.

2. 민족과 민족주의 개념

1) 민족과 종족

민족주의와 재외한인 연구에서 혼란스러운 용어 중의 하나가 민족과 종족이다. 이런 혼란은 영어 개념인 ‘네이션(nation)’과 ‘에스니시티(ethnicity)’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네이션은 우리말로 ‘국가’, ‘국민’ 또는 ‘민족’으로 번역되지만, ‘에스니시티’는 학자에 따라 다르게 번역된다. 보통 ‘에스니시티’를 정치학자와 사회학자는 ‘민족’으로, 인류학자는 ‘종족’으로 번역한다. 예를 들어 인류학자인 박은경(1987)은 에스니시티를 ‘종족성’으로 번역하는데, 이는 국가 중심적인 ‘민족성’보다 '종족성'이 더 포괄적이고 다양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스미스(Smith)는 네이션을 역사상의 영역, 공통의 신화와 역사적 기억, 대중적 · 공적인 문화, 공통의 경제와 법적 권리 · 의무 등을 가진 문화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공동체로 정의하였다. 한편, 에스니시티는 공통의 신화, 역사적 기억, 문화의 공유, 특정의 고국[모국]과의 심리적 결합, 하나의 공동체에 속한다는 소속감과 연대감을 공유하는 문화적 공동체로 정의하였다. 따라서 네이션과 에스니시티의 구분은 정치적 경계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에스니시티는 정치적 경계 없이 존재할 수 있어도 네이션은 정치적 경계 내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서구의 근대 역사가 각 지역의 문화적인 에스닉 공동체가 문화적 또는 정치적인 네이션으로 변용되는 과정으로 해석하였다. 스미스의 정의에 더욱 충실하게 따르자면 네이션은 민족, 에스니시티는 종족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2) 민족 형성의 모델

민족의 형성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언어, 영토, 역사, 문화, 종교 등의 역사, 문화적 경험의 공유를 중요시하는 객관주의적 접근과 성원들의 주관적인 의지, 연대감, 구성원들 간의 상호 인식 등을 중요시하는 주관주의적 접근으로 크게 나뉜다.

객관주의적 접근은 민족의 공통된 경험과 사회문화적 요소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민족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견해를 밝히지만, 주관주의적 접근은 민족의 객관주의적 특징이 근대로의 이행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새롭게 구성된 것으로 본다. 홉스봄(Hobsbawm)은 민족 개념이 과거에는 종족의 성격이 강조되었으나 근대화 이후 정치적 단위로서의 성격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두 접근의 차이는 민족과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시각의 차이도 보여 준다.

민족의 원초적인 객관성을 강조하는 객관주의적 접근에서는 민족과 국가가 불가분의 관계로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민족의 단독성이 보다 강조된다. 하지만 근대주의적 시각인 주관주의적 접근에서는 민족은 국가에 의한 일종의 구성물로서 둘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맺어진다. 이에 따르면 민족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것은 없고, 민족은 다만 근대국가에 의해 구성된 개념이다.

스미스는 이러한 두 접근을 모두 인정하면서 시대적, 지역적 차이를 강조하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 이 모델은 민족의 객관적, 주관적 요건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을 지양하고 시공간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전제하에 그는 종족적-혈통적 모델(ethnic-genealogical model)과 시민적-영토적 모델(civic-territorial model)을 제시한다.

종족적-혈통적 모델은 민족의 구성에 영토보다는 혈통을 중요시한다. 공동의 조상을 갖고 있다는 믿음에 민족의 성원 모두가 하나의 가족과 같은 유대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민족에게는 공동체성에 대한 강조가 매우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민족이라는 공동체에 의한 동의와 정당성의 확보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대중적 동원화가 강조되는 것이다. 이 모델에서는 혈통과 더불어 언어와 관습이 중요하다. 이것은 고유의 문화에 대한 강조로 이해할 수 있는데, 신화 · 역사 · 언어적 전통과 같은 문화적 요소를 통해 더 강한 동질감을 공유하는 것이다.

반면 시민적-영토적 모델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민족의 구성에서 영토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이는 단순히 토지 · 거주지로서의 의미가 아닌, 역사적 경험의 공유를 바탕으로 한 조국의 역할이 강조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영토는 단순히 토지가 아니라 민족적 기억의 창고이며 역사적 산물로 이해된다.

둘째, 단일한 정치적 목적에 의한 공동의 법률과 제도들이 중요시된다. 이 모델에서 단일한 정치적 의지와 공동의 법률은 민족 구성의 핵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셋째, 성원 간의 법적 · 정치적 평등이 강조된다. 이것은 나아가 시민권의 의미로 발전하게 되는데, 시민으로서의 정치 · 사회 권리를 공유하고 누릴 수 있다는 믿음과 합의가 필요한 것이다.

넷째, 공동의 문화와 시민적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민족이 가지고 있는 가치와 연대감을 다시 사회화할 수 있는 기제로 작동되며 이를 통해 민족 성원은 하나로 결속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시민적-영토적 모델은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통해 기원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민족=국가=인민'이라는 인식을 성립시켰고, 이것은 시민적-영토적 모델의 핵심적인 가치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민족은 자연적 공동체가 아닌 역사적 · 정치적 공동체라고 보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민족 개념은 문화적 공동체에서 점점 더 정치적 공동체의 성격을 강조하는 견해로 변해 왔다. 이런 이유로 스미스의 민족 모델은 한국에서 민족과 민족주의 담론에서 종족적 · 혈통적 측면과 시민적 · 영토적 측면이 어떻게 상이하게 변화해왔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3) 민족주의 이론

서구에서 발달한 민족주의 이론에는 민족을 원초적인 실체로 보는 원초주의론(primordialism), 민족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영속주의론(perennialism), 민족이란 근대의 산물이라고 보는 근대주의론(modernism), 원초주의론과 근대주의론의 결합을 추구하는 종족-상징주의론(ethno-symbolism) 등이 있다.

원초주의론의 시각에서 민족은 생득적으로 갖게 되는, 따라서 불변하는 특성[예를 들어 혈통, 혈연, 전통문화]으로 정의되고 민족집단은 이러한 공통적인 특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기어츠(Geertz)는 원초적인 연줄(primordial ties)을 강조하면서 민족성을 “다른 어떠한 집단에 속하지 않으려는 갈망”으로 정의하였다. 오비딘스키(Obidinski)는 민족성을 “공유하는 유산의 상징, 유사한 역사적 경험의식, 내집단 애착과 ‘우리감정’으로 표시되는 상호적이고 공통의 동일시”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이러한 동일의식이 사회에서의 공유된 지위, 공통의 조상, 외부 집단에 의한 구분과 지명, 유사한 가치관과 이해관계,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특정한 국적과의 동일시와 관련된다고 지적하였다.

위와 같은 정의는 공통적으로 민족성을 특성에 의해서 정의하고 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영속주의론은 ‘민족’을 초역사적 보편적 실체로 파악하는 점에서 근대주의론과 대립한다. 이 이론의 대표적인 학자인 하스팅스(Hastings)는 홉스봄과 같은 근대론자들이 민족과 민족주의가 근대적 산물이라는 주장을 논박한다. 그는 민족의 기원이 근대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프랑스 혁명이 아니라 영국의 경우에는 중세까지 올라간다고 주장한다.

근대주의론은 민족과 민족주의라는 개념은 전근대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18세기 후반에 나타난 역사적 실체라고 주장한다. 근대주의론자의 대표적 학자인 겔너(Gellner)는 민족주의는 자본주의의 발전, 산업화, 도시화, 정치적 동원, 세속화, 대중교육 및 과학의 발전 등의 근대화에 따라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앤더슨(Anderson)은 “민족은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된 정치공동체(imagined political community)”라고 주장하였다. 즉, 민족은 가장 작은 민족의 성원들도 대부분의 자기 동료들을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며, 심지어 그들에 관한 이야기도 듣지 못하지만, 구성원 각자의 마음에 서로 친교(communion)의 이미지가 살아있기 때문에 상상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민족의식의 기원은 경제 변동, 사회적 ‧ 과학적 발견 및 커뮤니케이션의 발달과 함께 자본주의의 발달, 특히 인쇄자본주의(print-capitalism)의 발달에 따른 결과라고 주장한다. 즉, 인쇄술의 발달에 따라 지방어로 쓰인 서적이 대량 출판됨으로써 민족주의 의식의 전파와 확산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홉스봄은 민족이 역사적으로 최근 특정 시기에만 나타난다고 하면서 그것은 특정한 종류의 근대적 영토국가, 즉 민족국가에 관련될 때 한해서만 사회적 실체이기 때문에 민족을 민족국가와 관련시키지 않고 논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하였다. 홉스봄은 민족과 그것에 연관된 현상들, 즉 민족주의, 민족국가, 국가적 상징 등은 비교적 최근의 역사적 혁신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 이른바 ‘발명된 전통’이라고 역설한다.

종족-상징주의론은 스미스가 근대주의론을 비판하면서 민족 형성에 있어서 문화와 종족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제기되었다. 스미스는 종족 공동체라 불릴 수 있는 ‘에스니(ethnie)' 개념을 제안한다. 이는 동일한 조상, 신화, 공통의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며,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고유한 명칭을 갖고, 특정 영토와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 간의 연대감을 느낀다. 이 종족 공동체는 민족과 같은 근대적 실체로 발전할 수 있는 문화적 요소를 제공한다.

스미스의 에스니 개념은 한국과 같이 근대 이전부터 민족이 형성된 경우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신용하는 한국에서 근대 이전에도 공통의 언어, 혈통, 문화에 기반한 공동체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민족을 ‘선민족’, ‘전근대민족’, ‘근대민족’, ‘신민족’의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한국에서 한민족의 형성이 삼국통일 시기로 올라가고, 이런 전근대적 문화 공동체가 19세기 말 외세의 침략과 함께 대외저항적 민족주의를 형성하였고, 민족주의의 형성과 함께 한민족이 ‘근대적 민족’으로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시각이다. 따라서 스미스의 에스니 개념과 종족-상징주의론은 여타 민족주의 이론보다 한국의 민족 형성과 민족주의 발달과정을 설명하는 데 적합한 것으로 판단된다.

3. 한민족의 기원

한민족은 한반도와 해외 여러 지역에 살면서 한인(Korean)으로서의 공통의 혈통과 문화, 정체성을 공유하거나 공유한다고 생각하는 아시아계 민족이다. 한민족은 혈통적이고 문화적인 개념으로 정치적 개념인 국민과 구별된다. 대한민국 국민에는 혈통적으로 한국인도 있지만, 외국인이 귀화해서 한국 국민이 된 사람도 있다.

한민족의 개념에는 그 기원,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정체성 등 다양한 주제가 포함된다. 각각의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설명이 필요한데, 여기서는 한민족의 기원, 언어와 사상,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1) 유전학적 기원

1970년대 이후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이 가능해진 이후부터 인간의 유전학적 기원에 관한 연구는 눈부신 발전을 이뤄냈다. 유전학적 연구는 Y염색체 DNA와 미토콘드리아 DNA 그리고 상염색체의 AIMs 마커(marker) 등이 법과학 연구를 포함한 다양한 민족 집단의 계통 연구 등에 사용되고 있다. 그중에서 Y-염색체 DNA는 말단 부위를 제외하고는 재조합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축적된 돌연변이의 정보를 활용하여 과거 인류의 진화과정과 이주 경로, 부계 혈족 확인, 유전자 감식 등에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자연과학 분야에서 한민족의 유전학적 기원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2017년 울산과학기술원 박종화 연구팀의 악마문 동굴[Devil's Gate cave] 연구가 있다. 악마문 동굴 연구는 과거 고구려와 동부여 위치의 동굴에서 발견된 여성의 뼈를 통해 그 DNA를 추출하고, 게놈(genome)을 분석하여 유전 정보를 분석한 연구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성의 뼈에서는 갈색 눈, 산 모양 앞니, 고혈압에 약함, 그리고 마른 귓밥의 유전자 특성이 있는 한국인의 유전 특성과 일치한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이런 연구 결과에 근거하여 연구팀의 전성원은 "한국인의 유전적 뿌리는 북방계와 남방계 아시아인의 융합이며, 이는 수천 년간 유전적으로 섞이면서 형성되었다."고 결론을 지었다. 또한, 악마문 동굴과 현대 남중국의 조합이 한국인을 잘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악마문 동굴의 후속 연구는 2020년 동일 연구팀에 의해 수행되었다. 후속 연구에서 박종화는 4만 년 전 동아시아인은 남방에서 북부로 확산한 선남방계가 각지에 정착한 후 4000~5000년 전후 남방계가 북부로 확산하고 다시 혼합되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부계의 다양한 유전인자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형질이 나타났고, 이는 북중국, 한국 그리고 일본에서 공통된 유사 성질로서 나타난다고 한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선남방계인 북부 시베리아계의 유전자와 후남방계인 중국계가 2:8 정도의 비율로 혼합되었을 때 동북아시아인의 형질이 가장 잘 나타난다. 즉, 2017년의 연구에서 발전하여 악마문 동굴 고대인과 고대 동남아인의 조합이 한국인에 잘 적용된다고 말한다.

게놈 정보는 개체의 외형을 비롯한 약물 반응성, 질병 감수 가능성 등의 개체의 형질을 결정한다. 또한, 대륙별 민족의 혼합도 게놈에 기록되어 있으며, 연구팀은 교잡(mixing)은 인간 존재의 본질이며, 순수한 인간의 집단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시한다.

이 유전자에는 모계 전달 유전자, 부계 전달 유전자 그리고 개개인의 거의 모든 유전 정보의 통합이 존재한다. 이 중 개개인의 거의 모든 유전 정보의 통합은 인간 개인은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의 합으로써 이루어진 존재이며, 끝없는 혼혈의 결과라고 한다. 따라서 인간은 5만 년 동안 지속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분화와 혼혈을 거듭한 민족들의 융합체이며, 한민족은 이미 4000년 전에 고대 다른 인종과 섞여서 형성된 유전 형질을 가지게 되었다고 결론을 지었다.

라이크(Reich)는 20세기 중후반에 이루어진 고고학의 눈부신 발전을 기반으로 고(古)DNA를 통해 분자인류학적 분야에서 인간 게놈 연구 성과로 드러난 인류의 이동 경로와 그 유형을 살펴보았다. 밝혀진 인류의 이동 경로와 그 유형을 탐색하며, 동아시아에 존재하였던 최초의 동아시아인 유형을 살핌으로써 이동과 교잡 과정에서 변모된 동아시아 인류의 지형을 분석하였다.

그에 따르면 동아시아에는 3개의 집단 북방인[중국 북동부 러시아 국경 헤이룽강 지역], 히말라야 산맥 북쪽의 광대한 티베트고원[청장 고원 지역 등, 현재 중국의 서북쪽], 남방계[동남아시아, 중국 본토 연안의 하이난 섬과 타이완 섬]가 존재하고, 현재 동아시아 본토인 대다수가 지닌 현생 인류 DNA는 오래전에 분기한 두 계통이 서로 각자의 비율로 섞여서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두 개의 계통의 구성인들은 각자 퍼져 이동하던 도중에 만난 다른 집단들과 교잡함으로써 동아시아 인류 지형도를 변모시켰고, 형성된 최초의 동아시아인을 중국 평원상의 양대 고농업문명인이라 한다. 이후 신석기 시대 이후 동아시아인들은 여러 지역을 이동하여 토착 세력과 섞임으로써 현재 동아시아인의 구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라이크는 동아시아인의 형성은 두 개의 분리 혹은 격리된 두 갈래의 혼혈로 형성된 것이고, 현생 동아시아인들은 동일한 유전적 요소를 갖고 있고, 이들에게서 다양한 인종적 · 유전적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이 두 계통의 유전적 융합의 비율 차이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의학 분야에서는 현재환이 의학 유전학 자료로 인류의 기원을 해석하는 연구를 진행하였다. 기존의 한국 의학계에서 의학 유전학은 임상 검사에 관한 관심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학교실 최규완을 비롯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한양대학교 의과대학의 내과 · 외과 · 임상병리과 등의 의학 연구들이 한국인 집단의 HLA(Human Leukocyte Antigen) 다형성 자료를 생산하였고, 이를 동아시아인 집단 간의 인류학적 연관성과 기원 및 이주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백용균은 자연과학과는 차별화되는 의학 연구의 임상학적 함의를 내포하기 위해 독일 유전학자들과의 공동연구를 추진하였다. 그는 한국인 ‘집단’의 ‘약물유전학(pharmacogenetics)'적 특성을 탐구하였고, 독일 연구자들의 연구 문법을 따라 한국인의 기원에 대한 인류학적 설명을 도입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한양대 김목현 연구팀은 “유전적 거리의 ‘친족 관계’에 대한 정의를 HLA 항원 및 이들 조합의 출현 빈도는 가족 간의 차가 있을 것이며, 따라서 각 가족 간의 친족 관계가 멀수록 이들의 차가 커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출현 빈도를 이용하여 각 민족 간의 유전적 거리를 측정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각 민족 간의 유대 관계뿐만 아니라 민족 이동의 자취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가정하였다. 연구팀은 한국인과 중국인, 일본인에 대한 유전적 거리에 관한 연구를 이 세 집단이 유전적으로 사촌임을 보여 주는 연구라고 주장하였다.

김목현 연구팀과 함께 인슐린 의존형 당뇨병과 HLA 다형성과의 상관관계를 보고하였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학교실의 이홍규는 해당 워크숍에서 HLA 다형성을 활용한 종족 집단의 이주 연구를 통해 당시 HLA 다형성 연구와 백용균의 약물유전학 연구를 진행하였다. 한국의 집단 유전학자들의 연구 성과와 국내외 인류의 기원과 일본인의 기원에 관한 연구를 참고하여 한국인의 기원을 분자유전학(molecular genetics)적으로 추론한 결과, 한국인은 몽골리안의 형성과 그들의 남하, 남아시아인과 섞임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한국인의 높은 대사율의 mtDNA(mitochondrial DNA)형은 추운 지역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가진 유전체로 추위에 노출되었던 각인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조사 결과를 통해 이홍규는 한국인의 유전형은 동남아시아를 통하여 들어온 사람들과 시베리아를 통하여 이동한 사람들의 혼합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유전형은 알타이-바이칼호와 아무르강 유역에 걸쳐 거주하며, 북방 지역에서 마지막 빙하기를 통해 추위에 적응하며 살아남은 몽골리안들이 남쪽으로 이동하며 기존 한반도에 거주하던 집단과 섞이며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생명체들이 어떤 지역에 고립되는 과정을 통해 유전적 특성이 고착되고 종의 특징으로서 유지되는데, 고립되어 빙하기를 겪은 몽골리안들의 낮은 코, 두꺼운 눈꺼풀, 둥근 머리 모양, 가는 실눈 등 추위에 적응된 특성이 형성된다. 또한, 빙하기의 마지막 바이칼 호수의 서부와 사얀(sayan)산맥의 동부 예니세이강 하류 지역은 비교적 따뜻하여 사람들이 생존 가능한 지역이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한민족의 기원은 남동 시베리아 지역의 바이칼호라고 결론지었다.

일본의 인류학자인 시노다 켄이치 연구팀은 중국의 동북부 집단과 한반도, 일본 본토의 사람들의 미토콘드리아 DNA 하플로그룹(haplogroup) 구성이 거의 일치한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유전자 계통 분석을 통해 하플로그룹C는 한반도에서 중국 북부와 중앙아시아 집단의 큰 그룹 안에 변이가 존재하며, 이를 바탕으로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 인종의 분포 기원이 있다고 말한다.

김욱은 동아시아 집단 간의 미토콘드리아 DNA 변이 분석 결과, 한국인 집단은 주로 북방계통과 남방계통의 유전자풀[gene pool]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다기원(多起源) 집단이라는 사실이 최근 Y염색체 DNA 연구 결과로 나타났다고 밝힌다. 또한, 한국인은 중국의 조선족과 만주족, 그리고 일본인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활동했던 과거 고구려인의 유전적 특성은 중국 한족 집단보다 더 한국인과 더 가깝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2) 고고학적 기원

고고학적 연구는 역사학적 연구와 비슷한 맥락을 갖지만, 주로 토기 · 석기 등의 물질을 대상으로 과거를 연구한다. 또한, 주로 선사시대에서 청동기시대를 연구 주제로 다루는데, 이 시기에 문자 기록이 남아 있지 않거나 거의 적기 때문에 고고학적 연구의 필요성이 크다.

한영희는 한반도와 주변 지역에 거주하였던 구석기시대의 주민들이 채집 활동을 삶의 기반에 둔 이동 생활을 하였으며, 출토된 유물의 수가 적은 것을 토대로 당시의 인구 밀도가 낮았을 것이라 추론한다. 그리고 신석기시대가 돼서야 사냥, 어로와 채집과 동시에 농경이 이루어진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고, 인구 증가와 문화 변화 등의 급격한 변화가 발생했다는 점과 기존의 인종들을 동화 및 흡수하였다는 점을 바탕으로 한민족의 직접적인 조상은 신석기인들이라 주장한다.

한영희는 현재의 국가관 및 민족관을 토대로 한민족의 뿌리로서의 신석기인들이 살던 지역을 한반도로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신석기시대 한민족의 문화와 동질성을 보인 지역은 중국 동북 지방, 발해 연안, 만주 일대, 연해주, 연해주 남부 지방 등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유를 근거로 한민족의 기원이 한반도에서 발생하였다는 한반도 발생설을 부정하며, 오히려 한반도에는 서로 다른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계통이 다른 인종들이 한반도에 유입되어 오랜 시간을 거쳐 문화적 동질성을 띠게 된 것이라 설명한다.

박선주는 한반도 주변 지역에서 출토된 머리뼈들을 비교하였다. 구석기 시대의 머리뼈들은 다 각기 다른 형태를 보인다. 하지만 신석기시대 한반도 출토 머리뼈들은 산둥 지역의 머리뼈와 7개의 머리뼈 지수[머리뼈의 최대 길이에 대한 최대 너비의 비율] 중 6개가 일치하였다. 또한, 남중국과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출토된 머리뼈들도 한반도 출토 머리뼈와 다른 지역보다 가까운 5개 지수가 일치하는 결과를 보여 주었다. 청동기시대의 중국 허베이성, 길림성, 요령성에서 출토된 머리뼈들은 다른 지역의 머리뼈보다 한반도 출토 머리뼈들과 더 가까운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추가로 박선주는 통계적인 방법으로 한반도 출토 머리뼈와 주변 지역의 머리뼈를 비교하였다. 구체적으로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서 시간, 공간 혹은 문화적 관계성을 가진 선사시대 출토 머리뼈들을 현대 한국 남성들과 비교하였다. 한반도 출토 머리뼈의 거리 계수를 계산한 결과, 초기 철기시대의 머리뼈가 현대 중국과 일본 사람의 머리뼈와 비슷하다는 결과를 보여 준다.

또한,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의 머리뼈 크기에서 본 거리 계수에는 차가 크게 나타났지만,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는 차이가 작았다. 또한, 신석기시대에서 4~5세기 사이 시기로 추정되는 한반도의 머리뼈는 현대 중국인과 일본인의 머리뼈와 더 비슷하다는 점을 밝혔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박선주는 한민족의 기원은 추운 시기에 동북아시아에 퍼져 있는 후기 구석기 사람의 한 갈래로, 빙하기가 끝나면서 한반도에서 고립된 갈래에 새로운 유전인자가 유입되어 청동기시대에 이르러서는 이웃하는 다른 집단들과 오랫동안 분리되어 하나의 유전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성기는 한민족의 기원과 형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인의 형성에 대해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한민족의 정체성은 현재 중국 대륙에서 동아시아인을 형성하는 시기부터 한민족의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이동과 융합을 통해 동아시아인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시기에 한민족의 기원이 있다고 한다.

김성기는 최초의 동아시아인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황하 유역 유령 집단[ghost population]의 주체에 주목한다. 그는 라이크가 주장한 황하 유역 유령 집단은 동이(東夷) 문화이며, 장강 유역 유령 집단의 주체는 묘만(苗蠻) 문화라 논증한다. 황하 유역 유령 집단의 경우 서기전 8500년부터 허우리[后李] 문화, 베이신[北辛] 문화, 다원커우[大汶口] 문화, 룽산(龍山) 문화 그리고 위에스(岳石) 문화 등의 연속성을 가진 문화의 계통이 지속되었다.

각 문화를 상징하는 출토물들은 북으로는 요동반도, 남으로는 안휘성 양쯔강 이북 지역, 서로는 낙양 일대 지역이다. 이로 알 수 있는 점은 동이(東夷) 문화가 오랫동안 전체적 발전 맥락과 정합성을 유지해 왔고, 이는 주변 지구에서 최초로 발단된 신석기시대 문화 창조의 주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선복은 화석 인골 연구와 한민족의 기원 연구에서 사람의 유해는 과거 사람들의 모습을 직접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물증이자 확실한 증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주체사관에 따른 북한 연구진의 ‘조선민족 단혈성 기원론’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민족 단혈성 기원론은 한반도, 특히 평양 지역이 100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아온 인류의 발상지 중 하나라는 주장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한반도의 구석기인들은 오랜 세월 자체적인 진화를 거쳐왔고, 청동기시대 무렵 형성된 종족이 현대의 한민족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이론이 미리 완성된 역사 서술 체계에 따라 지정된 위치에 인류 화석과 구석기 자료를 놓고 서술하고 있으며, 주체사상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고안된 역사라고 비판한다.

김석동은 한민족의 기원이 시베리아 및 만주 지역과 연관되며, 고고학 및 역사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북방의 기마 민족과 한민족이 동일한 민족적 기원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제시된 민족들은 흉노, 선비, 돌궐, 몽골, 여진이다. 우선 흉노와 선비의 경우, 무덤 양식이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나타나는 것과 동일하며, 무덤에서 출품되는 유물도 서로 매우 흡사하다.

흉노와 몽골은 색동옷, 씨름 등에서 한민족과 비슷한 문화적 특성이 있다. 그뿐 아니라 몽골은 시조인 칭기즈칸이 고주몽의 후예라고 세계적인 몽골인 학자 한촐라는 언급한다. 이는 칭기즈칸의 어머니이자 민족신으로 추대되는 알랑과 고아의 아버지가 고주몽이라는 것에 근거한다.

돌궐은 흉노의 자손으로 이후 나라를 성립한 오구즈족의 시조가 고주몽이며, 여진도 금나라의 역사서인 『금사』에서는 건국자 아골타의 조상이자 금국의 시조인 함보가 고려 혹은 고구려나 발해 사람이라 언급하고 있다. 청나라 건륭제의 명으로 쓰인 『만주원류고』에 의하면 청 태조 누르하치 가문이 금나라의 부락이며 발해왕의 후손이라 밝히고 있다.

손동완은 한민족의 시베리아 기원설을 주장한다. 그는 이런 이론이 현재 유전학 분야에서도 우세하며, 고고학적으로는 한반도의 신석기시대에 시베리아계 유적인 즐문토기가 발견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그는 발해 연안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이는 한국의 신석기인이 발해 연안에서 즐문토기를 가지고 한반도로 도래한 집단이라는 추론이다. 그는 즐문토기보다는 발해 연안의 초기 농경문화에 더 중요성을 두고 있다. 그 이유는 발해 연안이 서기전 3000년 전에 이미 초기 농경문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에 반해 한반도는 아직 어로, 수집 및 채집의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신용하는 한민족의 기원과 관련해서 벼의 전파를 통한 민족의 이동에 주목한다. 이는 단립벼[japonica type] 재배가 전파된 경로와 고조선 사람들과 이주민들의 거주 및 활동 지역과 대체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한반도와 만주 일대는 모두 단립벼 재배인데, 양쯔강 유역과 그 이남은 장립벼[indica type] 재배 지역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고학적 연구에서는 뚜렷하게 구석기 유물을 근거로 민족의 형성을 논하기에 한계가 있어서 구석기 문화를 대상으로 한 심도 있는 연구를 찾기 어렵다. 이선복 연구팀은 구석기시대부터 한반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점은 확실하지만 객관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언급한다. 하지만 전곡리 구석기 유적에서 발견되는 석기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면모를 보여서 한반도 구석기시대의 주민 구성과 문화는 동북아시아라는 지역적 맥락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때 그가 중점을 둔 것은 세석인(細石刃) 기술혁명이다.

세석인은 서기전 1만 년 대 중반 한반도에 나타난 기술혁명으로 몽골로이드계 집단이 이 무렵 한반도에 정착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를 근거로 한민족의 형성 문제는 적어도 세석인 기술의 의미가 보여 주는 서기전 1만 년 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배기동은 동아시아의 인류 확산 과정을 통해 상당 기간 중국에 자리 잡고 있던 호모에렉투스, 호모사피엔스와 관련한 유적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이 어떠한 경위를 거쳐 한반도에 왔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5만 년 전에 해당하는 구석기 유적들이 한반도에서 나타날 수 있다고 언급한다.

그는 세석인 기술이 한랭성 동물의 확산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세석인이 어디에서 기원하여 어떠한 과정을 거쳐 한반도에 유입되었는지를 핵심 논점으로 꼽았다. 이때 세석인의 분포 경향이 대체로 북쪽의 초원지대에서 나타나는데 반해 중국의 남부 지역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점을 지적하였다.

또한, 그는 세석인 이전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던 인류들도 몽골로이드로 진화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며, 세석인 문화의 집단에 의해 대치되었을 것이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후기 구석기 문화인과 세석인 문화인이 혈연적으로 관계가 있다는 것을 한민족의 기원을 추적할 때 주목해야 한다고 밝힌다.

3) 역사학적 기원

역사학적 기원에 관한 연구는 고고학과 비슷한 맥락을 갖고 있으나, 역사서와 같은 사료를 위주로 한 연구를 진행한다는 점 때문에 기록물이 존재하는, 즉 문자와 기록 문화가 존재하는 시점부터 연구할 수 있다.

이태수는 한국과 한민족의 역사에서 한민족이란 북방 몽골로이드에 속한 민족으로 중국의 화북인과 동북아시아로 진입한 북방계 민족으로 보고 있다. 또한, 한민족인 황제(黃帝) 부족의 대집단이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로 이동하여 주력 집단은 중국과 화북 지방에 정착하였지만, 일부 이탈하거나 뒤처진 소집단은 몽골고원에서 남하하지 않기도 하였고, 중국 이외의 동북아시아 전역으로 이동 및 분산하여 분포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이동과정에서 사람들은 말을 이용한 수렵 생활을 하였고, 이는 후에 기마 민족으로 이행되는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태수는 몽골고원에 잔류한 민족들은 알타이산맥 주위와 다싱안링[大興安嶺]산맥에 이르는 광활한 초원지대에 분포되어 수렵 생활을 하며 살았고, 이들을 한민족 분포의 시초라고 설명한다. 그는 시베리아 지역이 단군 설화와 관련되어 있고, 우랄산맥 동남부나 서(西)시베리아 초원지대부터 바이칼호에 이르는 지역, 그리고 중앙 시베리아 고원지대까지를 한민족의 발상 및 진화와 관련이 높다고 말한다. 황제 부족은 이 지역에서 남하하였고, 이때 이탈하여 더 남하한 부족은 웅녀족[곰 부족]으로 후에 환웅의 부족과 결합하게 된다고 한다.

단군 설화에 관한 이야기는 신용하의 연구에서도 다뤄진다. 한민족의 기원과 형성 연구에서 그는 한(韓) · 맥(貊) · 예(濊) 3부족 결합설에 주목한다. 1980년대 이후부터 2010년대까지의 학계 연구 성과가 결합하여 새로운 한민족 형성의 패러다임으로서 한 · 맥 · 예 3부족의 결합설이 대두되었다.

한족은 지구 온난화 이후에도 고(古)한반도의 북위 40도 이남의 강변과 해안에 그대로 남아 정착해서 고대를 맞은 신석기인이다. 맥족은 고(古)한반도 초기 신석기인으로 일부가 북위 약 40도 이북의 과거 동토였던 지역이 인간이 거주 가능한 지역이 된 이후 약 9000년에서 6000년 사이에 서북방으로의 이동을 감행하여 요서 · 내몽골자치구 동부 지역 일대에 정착한 신석기인이다. 예족은 고(古)한반도 청진강과 압록강을 건너고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북위 40도선 이북의 미개척지를 향해 동북방 이동을 감행한 신석기인이다.

신용하는 환웅에 의해 한족과 맥족의 혼인 동맹에 의한 부족 간 결합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이후 단군고조선 건국으로 한족과 맥족의 한민족으로서의 통합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는 중국의 고문헌 『일주서(逸周書)』에 기록되어 있으며, 국가라는 형태가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시키는 강력한 사회력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후 결합한 예족은 고조선 국가에의 결합 양식으로 일정의 자치권을 가진 후국(侯國) 제도에 따른다.

고조선 고대 국가의 한민족은 이러한 ‘장기 지속’의 지배 속에서 부족 간의 활발한 교류와 언어 통합이 이루어졌고, 족외혼(族外婚)과 사회 · 경제 생활과 문화의 공통화로 하나의 민족 공동체로 결합하였다. 민족 공동체는 이후 고조선 민족으로 진화하였는데, 즉 고조선 민족은 최초의 한민족 형성이며 한국의 원민족이라 할 수 있다.

고대의 기록인 『상서(尙書)』, 『주서(周書)』에서는 옛날 한반도에서 이주해온 한족 가운데 일부는 중국에 동화한 한족을 표기하고 있다. 또한, 시경의 한혁(韓奕) 편에서는 중국에 일부 귀화한 한씨의 옛 조상 고조선의 한족이 예족과 맥족의 북쪽을 다스렸다고 언급되어 있다.

김석동은 신채호가 『조선상고사』를 통해 주장한 한민족의 동래(東來)를 언급하며, 한민족은 최초에 서방 파미르고원 혹은 몽골 등지에서 백두산을 향해 왔다고 주장한다. 또한, 김정배는 요령 지역 부근에서만 집중되어 고찰되어 왔던 것에 비해 길림(吉林), 장충(長春)과 같은 지역에서도 청동 유적이 발견되며 고대 사회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최초의 명칭은 예맥이며, 동북아시아 민족 이동의 관점에서 신석기 문화의 고(古)아시아족과 청동기 문화의 알타이어족의 흡수와 통합 과정을 한민족의 형성 과정이라 설명한다.

김정배는 한민족의 기원에 대해 언급하면서 한민족이 단일 민족이라기보다는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거치면서 민족 간 융합이 있던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아프리카 기원설을 지지하며, 한반도 등지에는 동남아 해안 루트를 통해 이동한 사람들과 중앙아시아를 시작으로 몽골고원, 바이칼 호수를 거쳐 만주, 발해만을 지나 한반도로 이동하며 이 과정을 통해 융합, 형성된 것이 한민족이라 주장한다.

이것은 유전자 분석, 언어, 고고학적 유물 등을 통해 볼 때도 이들이 북방 및 유라시아 대초원에서 오랫동안 활약했던 북방의 기마 민족과 혈연 및 문화적으로 가까우며 활발한 이동과 교류가 있었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주장은 이병도의 연구에서도 한민족은 절대로 단일하고 순수한 인종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며 다양한 요소가 섞여 있다고 밝힌 것과 동일한 맥락을 가진다.

윤내현은 한민족은 고조선시대에 출연했고, 한반도와 만주의 거주민들이 오랜 기간 걸친 연합 과정의 결과로 형성된 것이라 주장한다. 이들은 신석기가 시작되면서 씨족 단위의 사회를 이루고 농업과 목축을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씨족 간의 연맹을 맺어 고을나라를 형성하였고, 종족적 특징을 갖게 되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따르면 신라 왕족 김씨 가문은 석가모니 부처의 동족인 샤카[釋迦]족과 신라 이전 진한(辰韓)의 주도 세력이었던 공공족(共工族)[환웅족(桓雄族)]을 기원으로 한다. 즉, 신라 왕족은 샤카족과 몽골리안의 혼혈일 가능성이 크며, 그 근거로는 요동 지역의 번한(番韓)을 변한(弁韓)의 옛 수도라고 언급한 점, 고깔모자를 쓰는 풍습을 지닌 샤카족의 후예가 살았다는 점이 기록되어 있다. 즉, 요서 지역으로 들어가서 혼혈한 샤카족이 평양을 거쳐 경주까지 가서 신라의 김씨 왕족이 되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한민족의 기원에 관한 유전학적, 고고학적, 역사학적 연구를 종합하면 한민족은 여러 뿌리에서 유래한 인구 집단들이 결합해서 형성된 다기원(多起原) 민족이라는 점이 일관되게 드러난다. 비록 현대의 한민족이 대한민국이라는 지역적 공간 안에서 한민족만의 하나의 공동체적 특색을 가지게 된 것이 사실일지라도, 한민족의 뿌리는 결코 하나의 순수한 것이 아니고 고대부터 계속해서 여러 민족이 유입하고 혼합되어 형성된 것이다.

4. 한민족의 언어

언어는 구성원들끼리 자유롭게 의사소통하며 민족을 구획 짓는 데 가장 유력한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어의 기원에 관한 연구는 한민족의 기원을 연구하는 것이 된다. 핀란드의 외교관이자 언어학자 구스타프 욘 람스테트(Gustaf John Ramstedt)는 알타이어족에 관한 비교 연구로 유명한데, 그는 최초로 한국어를 알타이어로 분류하였다.

이홍규는 언어학자들이 만든 세계인류 언어 기본지도를 통한 분류에서 한국어는 노스트라틱 언어에 속하며, 하위 분류로는 네로 노스트라틱(Narrow Nostratic), 알타이(Alatic)에 속하고 일본어와 같은 맥락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유라시안의 공통 조어가 1만 3000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한민족 언어의 기원이 이곳에 있다고 설명하였다.

한국어의 알타이어설에 따르면, 알타이어족은 튀르크 어파, 몽골 어파, 만주 · 퉁구스 어파를 포함하는 어족이다. 특징으로는 모음조화가 있고, 어두의 자음 조직이 제한을 받고, 접속사가 없고, 자음 교체와 모음 교체가 없는 것 등이다.

알타이어설을 주장하는 언어학자들은 한국어와 일본어를 알타이어족에 포함한다. 그러나 일부 언어학자는 한국어와 알타이어족의 공통 어휘가 적다는 점을 들어서 한국어를 알타이어족에 포함하는 것을 반대하고 한국어를 고립어(language isolate)로 분류한다.

대표적으로 영국 맨체스터대학교의 알렉스 버라타 교수,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스테판 게오르크, 유타대학교의 마우리시오 믹스코 교수가 한국어의 고립어설을 주장한다. 즉, 한국어는 친척 언어가 없어 다른 어족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대표적인 고립어로는 한국어, 아이누어 그리고 이베리아어가 있다.

국립국어원은 한국어 기원설에 관한 여러 가지 논란과 관련해서 한국어를 고립어가 아니라 교착어로 정의한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고립어는 언어의 형태론적 특징으로 볼 때 어형 변화나 접사 따위가 없고, 그 실현 위치에 의하여 단어가 문장 속에서 가지는 여러 가지 관계가 결정되는 언어이다. 이에 해당하는 언어로는 중국어, 타이어, 베트남어가 있다.

한편, 교착어는 실질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 또는 어간에 문법적인 기능을 가진 요소가 차례로 결합함으로써 문장 속에서의 문법적인 역할이나 관계의 차이를 나타내는 언어를 가리킨다. 여기에는 한국어, 터키어, 일본어, 핀란드어가 속한다.

한민족은 언어는 있었어도 그것을 표기할 수 있는 독자적인 문자 체계를 갖지 못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읽어 기록으로 하였다. 고려는 통일신라 시기부터 이어져 온 한자의 의미와 뜻을 빌어서 우리말을 표기한 차자(借字) 표기법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는 국가 관리, 불교 경전을 관리하는 승려들을 중심으로 사용되었고, 일반 백성들은 글을 읽지 못하였다. 이러한 일반 백성들의 문맹 양상은 조선 초기까지 이어진다. 글자를 몰라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이를 인식하게 된 세종은 모든 백성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려고 그들의 말을 모아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한글 창제는 왕이 직접 백성을 위해 글을 만든 것이며, 정확하게 글의 기원이 적혀 있는 유일한 언어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김중섭은 한글은 표음문자로, 단 24개의 문자로 어떠한 소리라도 조합할 수 있는 훌륭하고도 단순한 글자라고 주장한다. 기본 자는 자음 5자[ㄱ, ㄴ, ㅁ, ㅅ, ㅇ]와 모음 3자[・, ㅡ, ㅣ]를 활용하여 만든다. 자음은 목구멍에서 숨이 나올 때, 숨이 발음기관에 닿으면서 만들어지는 소리이며, 모음은 목구멍에서 숨이 나올 때 발음기관에 닿지 않고 나는 소리이다. 한글은 이러한 규칙적인 조합으로 간결하며 간단하게 소리를 문자로 표현할 수 있다.

김슬옹은 한글과 같이 모든 사람이 누구나 평등하고 쉽게 배우며 쓸 수 있는 문자는 없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특징은 한민족의 문맹률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실제로 통계청에서 공식적으로 문맹률에 대한 통계를 잡은 것은 1966년이 마지막이었는데, 이는 한국인의 문맹률이 1% 이내였기 때문이다.

한민족이 한글과 같이 쉽고 우수한 문자체계를 가진 것은 인구의 교육 수준과 같은 인적 자본을 끌어올려 1960년대 한국이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급속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을 이룰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는 1965년에 한국의 인적 자본 개발 수준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서 GNP의 세 배로 이미 높은 수준이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5. 한민족의 사상

한민족의 사상은 곰 토템 신앙의 단군신화에서 유불도(儒佛道)의 삼교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한민족의 조상이라고 여기는 단군은 곰이 사람이 되어 환웅과 결혼해서 출생한 아들로 여겨진다. 일연의 『 삼국유사』에서는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면서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였다.

환웅이 쑥과 마늘을 주고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하였는데, 곰만이 참고 견뎌서 사람이 되었고,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고 하였다. 곰 신화는 동북아시아, 시베리아, 러시아 북부, 핀란드 북부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고, 이곳에서 곰은 최초의 어머니, 최초의 조상으로 여기며 숭배된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한국사 4』에서는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곰으로 대표되는 토착 세력과 환웅으로 대표되는 청동기 문명을 가진 외래 세력이 결합해서 건국된 것으로 이해된다. 앞서 소개한 대로 김정배는 신석기 문화의 고(古)아시아족과 청동기 문화의 알타이어족이 혼인 동맹을 맺어 고조선이 탄생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불교는 A.D. 4세기 후반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 순서대로 중국을 통해 전파되었다. 불교가 처음 한반도에 전래하였을 때, 한반도에는 하늘 신앙을 비롯한 다양한 토착 신앙이 존재하였다. 토속 신앙은 당시 지배 세력의 정치 지배 이념을 포함한 국가 통치의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하였다. 불교는 이 토착 신앙과 갈등을 겪었지만, 불교가 지닌 윤리의식, 제례적 요소와 주술적 소재를 통해 빠르게 융화되어 수용되었다.

한국인은 불교와 비슷한 시기, 고유한 사상적 특징을 바탕으로 외래 사상인 유교를 수용하였다. 한국 고대 사회에서 유교는 보편성을 지닌 진리로 새로운 지식 세계를 모색하던 한국인의 지적 요구와 열망에 부응하였다. 불교와는 달리 유교는 실질적인 사람이 사는 세계의 지식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후 유교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서 한민족의 정체성에 뿌리 박히게 되었고, 이는 임진왜란 이후로 가장 큰 영향력을 보였다.

한국인이 교육을 숭상하고, 효와 예 · 가족 관계를 중시하고, 신분 상승을 위해 노력하고, 체면 세우기를 좋아하고, 허례허식하는 모습은 유교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다. 세계 가치 조사(World Value Survey) 연구를 통해 세계문화지도를 만든 로날드 잉글하트는 세계의 문화권을 구분했는데, 한국은 일본, 중국, 대만, 홍콩과 함께 유교문화권에 속한다.

유교문화권은 세속적 · 합리적 가치와 생존 가치가 높은데, 이로 인해 현세에서의 물질적 성취[교육, 직업, 소득 등]를 중요시하고 이로 인해 물질주의가 높고 탈물질주의가 약한 특징을 보인다. 한국인의 강한 성취욕은 급속한 경제 발전과 생활 수준의 향상을 가져왔으나 극심한 경쟁과 불평등, 소외감, 불안감을 낳아서 낮은 행복도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은 광복 이후 미군정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급격한 정치, 경제, 교육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건국 이후 미국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급속한 근대화를 이룩했으나 서구의 가치관[개인주의, 능력주의 등]과 문화양식이 들어오면서 한국의 전통적인 가치관[집단주의, 연고주의 등]과 문화양식과 충돌하고 배치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로 인해 일종의 문화적 아노미 현상이 발생하고,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한국식과 서구식 가치관을 취사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국 사회에서 갈등이 발생하면 합리적인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폭력적이고 고질화되는 것에는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수용하는 공통의 사상과 가치관이 부재한 것도 한몫한다.

6. 한국의 민족주의

민족주의는 민족을 원초적인 것으로 보든 근대의 산물로 보든 민족이 외부의 간섭없이 스스로를 통치해야 한다는 사상을 갖는다. 이런 면에서 민족주의는 민족자결주의와 연결되고,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애국주의와 연관된다.

한국 민족주의 담론은 현재까지 풍부하게 진행되었다. 1966년 한국정치학회에서 주최한 '한국 민족주의 대(大)심포지엄'에서 이용희가 「한국 민족주의의 제(諸)문제」라는 기조 논문에서 저항적 민족주의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저항적 민족주의 담론이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1977년 '이용희 선생 사은 학술 심포지엄’까지 주요한 담론으로 이어져 나갔다.

이 심포지엄의 마지막 강연에서 이용희는 저항적 민족주의로부터 전진적 민족주의, 그리고 근대화의 주제를 넘어 탈민족 관점에서 민족주의를 성찰할 것을 강조하였다. 여기에 기초하여 민족주의 담론을 시기적으로 배열하면 저항적[또는 방어적] 민족주의, 발전론적 민족주의, 열린 민족주의, 보편적 세계주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 저항적 민족주의 담론의 형성과 발전

저항적 민족주의 담론은 동학운동부터 광복 전까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광복 후부터 문민정부가 들어서기까지 저항적 민족주의 담론과 발전론적 민족주의 담론은 쌍벽을 이루면서 한국 민족주의 담론을 이끌고 갔다.

저항적 민족주의 담론의 창시자로 신채호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처음으로 근대적 시각에서 한국의 사대주의사관을 비판하고, 주체적이고, 민족주의 근대역사관의 틀을 마련한 역사학자이다. 단군을 실존인물로 기술하고 한민족이 단군의 자손으로 투쟁을 통하여 독립을 추구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혈통-문화주의에 입각한 민족 주체성을 강조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민족주의 담론을 부단히 생산하였다.

대표적으로 을지문덕(乙支文德), 최영(崔瑩),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영웅전을 집필함으로써 민족의 숭고성과 초자연성을 강조하였다. 한국이 근대국가 건설에서 실패와 일본 식민지로 전락함으로써 민족의 정당성이 강화되었고, 국가의 정당성이 부재한 상황에서 민족은 절대적인 선이 되었다. 일본제국주의 하의 ‘황민’은 절대적인 악이 되었다는 배경에서 민족주의는 민중 동원의 유일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저항적 민족주의를 자강적 민족주의라고도 하는데, 그 대표적인 학자가 신채호와 박은식이다. 신채호와 박은식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의식을 담은 민족주의 담론을 생산하고 후세의 민족주의 담론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국사학에서 혈통-문화민족주의 담론이 광복 후에도 주요한 담론이 될 수 있는 틀을 제공하였다.

광복 후에도 민족 분단이라는 현실 아래에 민족국가로서의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정당성이 부재하였다. 대한민국은 비록 역사학계에서 단군-신라-조선의 역사적 정통성을 강화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단군-고구려-고려의 역사적 전통을 이어갔지만, 모두 민족과 국가의 조화를 이룩하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혈통-문화를 강조하는 역사학파의 민족주의 전통은 민족통일의 역사관과 역사의식을 뒷받침하였다. 또한, 국민국가 건설 과정에서 외세에 의해 세워진 국가라는 정당성의 부재, 남북통일의 필요성, 친일파의 장기 집권은 저항적 민족주의 담론이 문민정부가 일어서기까지 주된 담론으로 남을 수 있게 하였다.

광복 후에도 저항적 민족주의 담론을 생산한 역사학계의 대표자로 강만길, 문학계의 대표 인물로 백남준 · 백낙청, 정치학계의 이용희 · 차기벽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학생운동,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의 인사들도 민족주의 담론을 풍부하게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1960년의 4월 혁명, 1987년의 6월항쟁, 1990년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을 대표로 ‘민족통일’을 주창하던 반미운동 등이다.

2) 발전론적 민족주의 담론의 형성과 발전

저항적 민족주의 담론은 밑으로부터 위로 향한 저항이고, 자주와 통일이 주된 가치이다. 반면, 발전론적 민족주의 담론은 위로부터 아래로 향한 국가정당성 확보이며, ‘근대화=발전=민족주의’ 맥락에서 성장이 주된 가치였다.

식민주의에서 벗어난 후발 국가들은 성공적으로 근대국가를 형성하고, 경제 성장을 통하여 선진국들을 따라잡아 ‘민족 부흥’을 실현하려는 강한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가졌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경제적인 개방이 필요하였고, 세계 국가 체제에서 국가의 자율성을 확보하면서 경제 개발과 근대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선진국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발전론적 민족주의는 경제 개발과 근대화를 추구하면서도 국가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절충적으로 만들어진 산물이다. 또한, 국내적으로 저항적 민족주의의 정당성이 여전히 강한 상황에서 이를 독립된 주권, 경제, 교육 등을 확립하는 데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독재 시기에 발전론적 민족주의의 이념을 정립해 놓은 것이 1968년 12월 5일에 선포된 국민교육헌장이다. 국민교육헌장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이 시기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국기에 대한 맹세’와 함께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였으며, 아직도 전문은 아니라도 부분부분은 외울 수 있을 정도로 국민의 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 시기 학술적 담론으로 볼 때, 1960년대 중반까지 역사학의 저항적 민족주의 담론이 정치학의 발전론적 민족주의 담론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시대적 배경으로 볼 때 냉전 체제에 처해 있었고, 한국은 국제적인 환경을 주체적으로 비교적 원활하게 활용하여 자국의 발전을 도모하면서 근대화를 실현할 수 있었다. 이 시기 민족주의의 주요한 내용은 통일, 근대화, 발전이었다.

이 시기 정치학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하는 노력의 하나로, 1966년의 한국정치학회는 '한국 민족주의 대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이 학술회에서 전진적 민족주의, 전향적 민족주의가 중요한 대안으로 제기되면서 민족주의 연구에 새로운 진보를 이루었다. 이 시기의 민족주의 연구에서는 통일이 아니라 근대국가의 형성과 민족주의 결합, 근대화, 민주화가 민족주의 담론 내용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여 갔다.

또한, 정치학계에서는 개방화와 국제화 틀에서 민족주의를 연구하려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났다. 이런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한 학자들로는 이용희와 차기벽이 있고, 진덕규 · 노재봉 · 노태돈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이들은 국제정치 형세에 맞게 한국의 민족주의는 개방화되어야 하고, 외래 문화를 비판적으로 접수하면서 국제정치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민족주의로 재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들의 연구는 여전히 역사학계에서 문화-혈통주의를 강조하는 것과는 대비되게 시민적 요소, 영토, 근대화, 민주화를 주요한 가치로 내세우면서 이런 주요 이데올로기와 함께 민족주의를 다시 재정립하려고 하였다. 즉, 민족과 국가의 조화를 이룸으로써 민족국가의 정당성을 강화하며, 경제발전을 추구하고, 민주화를 실현하는 실용적 · 발전론적 민족주의라는 특징으로 개괄할 수 있다.

3) 열린 민족주의 담론 형성과 발전

근대화가 일정 부분 성취되면서 민주화의 요구가 시대적 요구로 등장하였다. 한국이 세계 체제에 빠르게 편입되면서 더욱 개방된 민족주의 담론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대내외적 환경 변화 속에서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부터 열린 민족주의 담론이 발전하게 되었다.

저항적 민족주의와 발전론적 민족주의는 권위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한계로 인해 위계적 질서인 권위 구조 속에서 민족주의는 상당히 폐쇄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반면 민주화의 실현과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인해 더욱 수평적인 권위 질서가 형성되었고, 민족주의가 좀 더 개방화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었다. 또한, 대외적으로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를 국가 정책으로 추진하면서 열린 민족주의 담론은 세계화 담론과 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다.

1990년대 초반부터 1997년 외환 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열린 민족주의 담론이 활성화되었다. 세계화는 한국 지식인들의 거대 담론이 되었고, 민족주의 연구도 세계화와 관련되어 진행되었다. 이 시기 세계화 담론의 주도하에 민족주의와 관련된 내용도 전례 없이 증가하였다.

문화, 경제, 국가 안보, 금융 등 다양한 분야의 내용이 민족주의와 연관되어 담론화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국가의 근대화=발전=민족주의 모델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고, 민족주의의 부정적 측면이 어떻게 세계화에 순응하는가 하는 것이 주요한 초점이 되었다.

1990년대 후반에 들면서 이전의 열린 민족주의 논의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많은 학자가 열린 민족주의를 주창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모자랐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신기욱은 열린 민족주의가 내용이 없고 단지 레토릭(rhetoric)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며 이것이 실체를 가지려면 사회적, 법적 제도가 뒤따라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동성은 정치학계에서 서구적 민족주의 인식론을 한국에 옮겨서 한국 민족주의를 연구하는 것을 비판하고, 한국적 민족주의 연구를 한국 민족주의 존재로부터 출발하여 사회과학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세계화의 거대 담론 속에서 경시된 민족주의 주체성을 강조하면서 다양성을 살려야 한다는 대안론이 나오면서, 한국은 민족주의가 과잉이 아니라 과소이며, 정념적 민족주의로부터 정책적 차원까지 올려야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그리고 서구의 인식론을 그대로 옮기는 것을 탈피하여 신용하, 진덕규, 조민, 김동춘 등 민족주의를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아졌다. 비록 이러한 비판적 연구는 양적으로는 많지 않지만, 학계에 비판적으로 흡수되면서 한국 민족주의 연구를 풍부하게 하였고, 다양화하였으며, 담론으로부터 실제 현지 연구로 정착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4) 보편적 세계주의 담론의 형성과 발전

1990년대 말~2000년대 초부터 탈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민족주의를 성찰하고 발전론적 모델을 초월하여 민족주의를 연구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 서양사학자인 임지현은 “민족사적 전망이 결여된 세계사의 관점이 공허하다면, 세계사적 전망이 결여된 민족사적 관점은 편협할 뿐이다. 민족사의 특수한 경험을 토대로 보편사적 전망을 획득하는 길은 바로 세계사적 관점과 민족사적 관점을 접목시키는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한국 사회의 민족 개념이 이제는 종족적인 것으로부터 공공적인 혹은 시민적인 것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복거일은 더 강하게 보편주의를 주창하는데, 그의 ‘영어 공영론’은 한국 사회에서 강하게 비판을 받았다. 신귀현은 민족주의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개방적인 민족주의를 채택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국제주의와의 조화가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국제 정치 구조와 각국의 이해 때문에 실제로 이러한 조화는 요원한 일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초민족주의(超民族主義)를 제시하고 있다. 탁석산은 “민족주의는 사다리다.”라고 비유하면서 한국이 근대민족국가를 이룬 현 시점에서 민족주의는 이제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화에 대해 비판적인 국내 학자들은 위와 같은 주장들에 대해 이상적으로는 바람직하지만, 한국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다고 반박한다. 김영명은 세계화론자들이 세계적 차원에서의 권력 구조와 지배 구조, 그리고 그 안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없이 서구의 경험을 마치 ‘보편적’인 것처럼 한국에 무분별하게 적용한다고 비판한다.

김수행은 여전히 세계 체제 내에서 민족과 영토를 기반으로 한 국가가 가장 유효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영향력 있는 실체로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많은 국가가 여전히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세계의 많은 사람은 세계 시민이라는 관념보다는 민족국가의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국가와 민족주의를 부정하면서 모든 것에 대한 개방과 포용을 주장하는 세계주의로의 이행은 아직은 시기상조이다. 특히 남북한이 분단된 상황에서 민족주의는 이념적 대립을 초월하여 남북한 주민들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강한 흡인력을 갖기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정신적 자산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은 민족주의가 갖는 잠재적 · 실재적 폐해를 줄이고, 그 긍정적 기능을 발견하여 개방화 · 세계화의 흐름에 맞게 평화적으로 발전시켜 가는 것이다.

7. 세계의 한민족

‘한민족 이산(韓民族 移散)’으로 불리는 코리안 디아스포(Korean Diaspora)라는 유대인, 중국인,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등 세계의 여러 민족과 비교해서 그 역사가 짧지만 전 세계 어느 곳에도 한인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160년의 역사를 가진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외교부의 2019년 재외동포 현황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193개국에 749만 3587명의 규모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재외한인의 규모는 남북한 인구수의 약 10%에 해당한다.

지역적으로 재외한인은 동북아시아 328만 6363명, 남아시아태평양 59만 2441명, 북미 278만 8732명, 중남미 10만 3617명, 유럽 68만 7059명, 아프리카 1만 877명, 중동 2만 4498명 등 폭넓게 분포되어 있다. 재외한인 상위 10개국은 미국[254만 6982명] 중국[246만 1386명], 일본[82만 4977명], 캐나다[24만 1750명], 우즈베키스탄[17만 7270명], 베트남[17만 2684명], 러시아[16만 9933명], 호주[16만 7933명], 카자흐스탄[10만 9923명], 필리핀[8만 5,125명]이다.

재외한인의 해외 이주의 역사를 시기적으로 대별하면 19세기 중엽부터 1945년 광복 이전까지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멕시코, 쿠바 등지로 이주한 구이민, 광복 이후부터 1990년 한소 수교[한국과 구소련[1992년 이후 독립국가연합으로 재편]의 국교 수립] 이전까지 북미, 중남미, 유럽, 오세아니아, 동남아시아 등지로 이주한 신이민, 1990년 한소 수교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재외동포들이 모국으로 귀환하는 귀환이민으로 구분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구별하면 다음과 같은 다섯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860년대부터 1910년[한일합방이 일어난 해]까지인데, 이 시기에는 구한말의 농민, 노동자들이 기근 · 빈곤 · 지배층의 압제를 피해서 국경을 넘어 중국, 러시아, 하와이, 멕시코, 쿠바로 이주하였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계속되는 가뭄으로 백성들의 생활고가 심했고, 서구 열강이 조선에서 이권 경쟁을 벌이면서 전쟁과 정변이 잦아지면서 사회의 혼란은 극심해졌다. 여기에 일본이 조선에서 쌀과 곡물을 대량으로 반출하면서 식량난이 가중되었다. 조선 후기 중국의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은 경제 유민(流民)으로서 당시 입국이 금지되었던 지역에서 농지를 개간하면서 신분상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꾸려갔다.

처음에는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한 경제적 이주였으나, 일본의 조선 침략이 가속화되자 독립운동가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정치적 이주를 단행하였다. 그래서 이 시기에 연해주는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한인의 이주는 1903년부터 시작되었는데, 하와이 거주 일본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이 1905년에 한인 이주를 금지하였다. 1903년 1월부터 1905년 8월까지 7291명의 이주자가 64회에 걸쳐 하와이에 도착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20대의 독신 남성이었다. 이들과 결혼하기 위해서 사진 결혼의 형태로 1000여 명가량의 한인 여성들이 1924년까지 하와이로 건너가서 이민 가정을 형성하였다.

중남미로의 이주는 1905년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에네켄 재배 농장의 계약 노동자로 1033명이 떠난 것이 효시이며, 이들 중 300여 명이 1921년에 경제난을 피해 쿠바로 재이주하였다. 이들과 후손들은 모국과의 연계가 끊어지자 아주 작은 공동체를 유지하다 현지 사회문화에 급속히 동화되었다.

두 번째 시기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일제강점기인데, 이 시기에는 토지와 생산수단을 빼앗긴 농민과 노동자들이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또한, 정치적 난민과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러시아,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1931년의 만주사변과 1932년의 만주국 건설을 계기로 만주 지역의 개발을 목적으로 한인들의 대규모 집단 이주를 시행하였다. 이로 인해 1930년대 후반 만주 지역의 한인 인구는 약 50만 명 정도 증가하였는데, 이 중 약 25만 명 정도가 집단 이주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경제 호황을 맞아 한인들이 노동자의 신분으로 도일하여 1920년대 말에는 재일한인의 규모가 약 30만 명에 이르렀다. 1937년의 중일전쟁과 1941년의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대규모의 한인들이 광산, 전쟁터로 끌려갔다. 이런 식으로 재일한인의 규모는 급속히 증가해서 일본이 미국에 패한 1945년 8월까지 약 230만 명 정도에 이르렀다가 패전 후 많은 한인이 조국으로 귀환하자 급속히 감소하여 1947년에는 59만 8507명으로 급감하였다.

세 번째 시기는 1945년부터 한국 정부가 이민 정책을 처음으로 수립한 해인 1962년까지인데, 이 시기에는 광복을 맞이해서 중국과 일본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귀국해서 일시적으로 재외동포의 규모가 축소되었다. 광복 직후 만주로부터 조선으로 귀환한 사람은 중국 거주 한인의 40%에 해당하는 7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으로부터는 1945년 8월부터 1950년까지 104만 명이 귀국한 것으로 일본 정부의 공식 통계에 집계되었는데, 이 통계에는 자비 귀국자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보여 실질적인 귀국자 수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도 해외로 이주하는 한인들은 여전히 존재하였다.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발생한 전쟁 고아, 미군과 결혼한 여성, 혼혈아들이 미국 또는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또한,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에 간 학생 중에 상당수가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에 눌러앉거나 끝내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미국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미군과 결혼한 한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1965년 미국에 이민 문호가 활짝 개방되었을 때 가족들을 초청할 수 있는 연쇄 이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냉전 체제에서 재일한인 사회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과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으로 양분되어 대립하였고, 북한은 재일한인을 포함해서 전체 재외동포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재외동포 정책을 전개하였다. 북한은 한국전쟁 종전 후 복구를 위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 재일한인을 받아들이고자 하였고, 일본은 당시 국내 생활보호자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재일한인을 북한에 내보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서 재일한인 북송 사업이 시작됐는데,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총 9만 3000여 명이 북한으로 건너갔다. 이들은 북한을 지상낙원이라고 믿고 갔지만 대다수가 불순계층으로 차별받았고 상당수는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사망하거나 비참한 생활을 보냈다.

네 번째 시기는 1962년부터 1990년 한소 수교 이전까지인데, 이때부터 정착을 목적으로 한 이민이 시작되었다. 중국, 일본, 독립국가연합을 제외한 대부분의 재외한인 이민자들과 그 후손들은 이 시기에 이주하여 정착한 사람들이다.

1962년에 한국 정부는 남미, 서유럽, 중동, 북미에 집단 이민과 계약 이민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 이민 정책의 목적은 잉여 인구를 외국으로 내보냄으로써 인구 압력을 줄이고 재외동포들이 송금하는 외화를 벌기 위한 것이었다. 최초의 집단 이민은 1963년 브라질로 103명의 농업 이민자들이 출발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등으로 농장을 개간한다는 명목으로 중남미 국가들로부터 초청을 받아 이민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민자는 농업 경험이 없었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이 너무 힘든 일이어서 곧바로 대도시로 이주하여 상업에 종사하였다.

또한, 1963년부터 서독으로 광부들과 여성 간호사들이 계약 노동자의 신분으로 이주하였다. 1963년에 247명을 시작으로 1977년까지 총 5323명의 광부가 파견되었고, 1966년에 128명의 여성 간호사들을 시작으로 1976년까지 총 1만 32명의 여성 간호사들이 독일로 건너갔다.

미국과 캐나다로의 이주는 북 · 서유럽 이민자들만을 선호하던 「이민법」이 1960년대 중반에 개정되어 이민 문호가 한인에게도 열리게 되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화이트칼라직에 종사했던 중산층이 미국과 캐나다로의 이주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한인 이민의 정점을 이룬 1985년과 1987년 사이에는 연 3만 5000명의 한인이 미국에 이민하여 멕시코와 필리핀 다음으로 한국이 미국의 3대 이민국이 되었다. 하지만 한인 이민자 수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하였고, 오히려 이주를 포기하거나 역이민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호주로의 한인 이주는 1960년대와 1980년대 사이에 독일, 베트남, 중동 등지로 계약 노동자의 신분으로 이주했던 한인들의 재이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1960~1970년대에 호주에서 일기 시작한 광산 개발 붐으로 생겨난 고용기회를 찾아서 한인들이 호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1972년부터 1975년 사이에 500여 명에 이르는 파월 기술자, 현역 제대 취업자들이 대거 호주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단기 관광비자로 입국해서 불법취업을 하다가 호주 정부의 사면령으로 영주권을 취득하였고 한국에 남겨둔 가족들을 초청하였다.

이런 소식은 이란, 브라질, 우루과이, 파라과이 등 남미 국가로 이민 갔던 한인들과 파독 광부와 간호여성 등을 호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이후 호주 정부가 1980년 6월에 불법체류자에 대한 제2차 사면령을 내리면서 한인 불법체류자들은 합법적인 정착이 가능해졌고 이들이 가족들과 재결합하면서 호주의 한인 사회는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986년부터 시작된 투자 이민으로 호주에 들어온 새로운 한인 이민자들은 기존의 한인 사회 구성원들과 성격이 달랐다. 이들은 처음부터 자본을 갖고 정착을 시작하였고 높은 수준의 사회경제적 생활을 하였다. 이렇게 구이민자와 신이민자 간의 이주 배경과 이주 방식, 그리고 정착 과정의 차이는 두 집단 간의 거리감을 넓히고 대립과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재외한인 이주사의 다섯 번째 시기는 1990년 한소 수교와 1992년 한중 수교를 통해 그 이전에는 잊혔던 구소련과 중국의 동포들이 재외동포로 재편입되면서 시작되었다. 즉, 냉전 체제에서는 공산권 동포들이 한국인의 관심 밖에 있다가 구소련과 중국과 국교 수립이 되고 나서 재외동포 통계에 포함되기 시작하였다.이 시기에 중국 동포들이 한국으로 취업, 결혼, 유학, 방문 등의 목적으로 입국이 증가하면서 국내에서 이들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1997년 말에는 당시 아시아를 강타했던 외환 위기로 인해 국내에서 일자리를 잃거나 고용에 불안감을 느낀 30대들이 해외로 이민을 하기 시작하였다. 1999년에 5267명이 취업 이민으로 떠났고, 2000년에는 그 수가 8369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렇게 취업을 목적으로 이민 가는 사람들은 30대가 주류였으며, 고학력 ·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나름대로 안정된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다. 캐나다가 고학력, 전문기술직 종사자를 우대하는 이민 정책을 실행하자 미국 대신 캐나다가 한인 이주의 새로운 목적지가 되었다.

19세기 중엽부터 시작한 한민족의 이산은 이제 160여 년에 달한 만큼 오래 역사를 가지면서 재외한인은 전 세계 750만 명의 중요한 인구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이탈리아, 중국, 인도, 이스라엘, 멕시코 등 해외에 큰 규모의 재외동포를 보유한 국가들은 적극적인 재외동포 정책을 펼쳐서 재외동포와 모국 간의 유대와 협력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우리도 시대 상황에 맞는 미래지향적인 재외동포 정책을 추진해서 재외한인과 모국이 상생하는 글로벌 한민족 공동체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한민족의 범위에 한반도를 넘어 세계의 재외한인을 포용해야 하는 이유는 과거와 달리 재외한인이 한반도의 한국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공동운명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증가하기 시작한 재외한인의 귀환 이주로 인해 재한동포로 불리는 국내 거주 외국 국적 동포는 2019년 87만 7000명에 달하고 있다.

이들은 더는 해외에 있는 재외한인이 아닌 한국 사회의 실질적인 구성원이 되어서 내국민과 여러 방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어가고 있다. 세계에서 유례없는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해 한국 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재외한인은 한국이 지속가능한 발전을 심각한 인종 · 종족 갈등 없이 이룰 수 있는 인적자원이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에서는 귀환 동포에 대한 편견과 혐오, 차별과 배제가 상당해서 이들의 적극적인 한국 사회에의 참여와 기여를 가로막고 있다. 대한민국이 더 큰 국가로 성장하기 위해서 해외와 국내에 있는 한인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과 자세가 더욱 포용적으로 전환하고, 상호 간의 상생과 공영을 도모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8. 평가와 제언

한민족은 한반도와 해외 여러 지역에 살면서 한인으로서의 공통의 혈통과 문화, 정체성을 공유하거나 공유한다고 생각하는 아시아계 민족이다. 한민족은 혈통적 · 문화적 개념으로 정치적 개념인 국민과 구별된다.

대한민국 국민에는 혈통적으로 한국인도 있지만, 외국인이 귀화해서 한국 국민이 된 사람도 있다. 그리고 한민족 중에는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도 있고, 혈통은 한민족이지만 문화와 정체성은 한민족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도 있어서 한민족을 구성하는 요소라고 볼 수 있는 민족, 영토, 문화, 국민이 불일치하는 현상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원래 민족이라는 개념이 순수하게 혈통과 문화에 의해서만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측면이 있어서 한민족의 개념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환경 변화에 한민족이 적응할 수 있는 역량을 높이기 위해 한민족의 개념과 범위, 자격요건을 유연하게 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민족의 기원에 관한 유전학적, 고고학적, 역사학적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한민족은 여러 뿌리에서 유래한 인구 집단들이 결합해서 형성된 다기원 민족이라는 점이 일관되게 드러난다.

비록 현재는 대한민국이라는 지역적 공간 안에서 상당히 동질적인 한민족이 거주하고 있지만, 이들의 뿌리는 결코 하나의 순수한 것이 아니고 고대부터 수천 년간 북방계와 남방계 아시아인들이 유입하고 유전적으로 혼합되어 형성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 한국에 이민 와서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이민자들은 수천 년간 진행해 온 한민족 형성 과정의 새로운 물결이다.

외부의 간섭 없이 민족이 스스로 통치해야 한다는 사상인 민족주의는 일제강점기에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 독립을 위해 민족을 단결하고 동원하기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이념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민족주의는 오랫동안 외국과 외국인에 대해 배타적이고 저항적 민족주의의 특성을 가졌다.

1960년대 이후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민족주의는 민족과 국가의 발전을 지상목표로 삼고 국민을 동원하는 발전적 민족주의로 전환하였다. 이를 통해 급속한 경제 성장과 생활 수준의 향상을 이룩했으나 극심한 경쟁과 불평등을 초래하였다.

무엇보다 물질적 성공이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면서 한국인의 물질만능주의를 확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외국인을 출신국의 경제 발전 수준에 따라 위계적으로 평가하고 한국보다 경제 수준이 낮은 개발도상국 출신 외국인을 경시하는 풍조를 낳았다.

2000년 이후 한국이 다민족 · 다문화 사회로 전환하는 시점에서 국내에 거주하는 이주 인구에 대한 편견과 혐오, 차별과 배제는 사회통합을 어렵게 만들고 한국이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

세계에서 유례없이 높은 수준인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해 갈수록 한국의 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이민자는 미래 성장 동력의 중요한 원천이다. 따라서 질서 있는 이민 정책을 통해 한국에 기여하는 이민자를 선발해서 유입하고, 이들이 성공적으로 한국 사회에 적응하고 통합하여 개인 발전과 함께 사회 발전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민자와 선주민이 상생하고 협력하는 통합된 한국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한민족의 개념과 범위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일차적으로 부모 중 어느 한쪽이라도 혈통적으로 한민족일 경우에는 자녀도 한민족으로 인정해야 한다.

이차적으로 한국 사회의 성원권(成員權)과 그에 상응한 권리와 의무의 기반을 혈통에 근거한 민족에서 정치적 소속감에 근거한 국민 또는 시민으로 전환해야 한다. 한국에서 영주하거나 귀화한 외국인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또는 최소한 지역사회 주민으로 인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결국 한민족의 범위를 확장하고, 민족보다 보편적이고 개방적인 정체성에 기반하여 사람 간에 연대하고, 다양한 문화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21세기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한민족과 한국인의 바람직하고 현명한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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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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