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식은 일제강점기 『안중근전』, 『한국통사』, 『대동민족사』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언론인, 독립운동가이다. 1859년(철종 10)에 태어나 1925년에 사망했다. 젊어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해 성리학자로서 명성이 높았으나 독립협회의 영향을 받고 개화사상가로 변신했다. 국권회복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 개화사상과 신학문에 힘쓸 것을 주장했고, 황성신문 등 언론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펼치는 데 주력했다. 한국인의 혼을 되살리기 위해 『한국통사』를 저술했고, 임시정부가 혼란에 빠지자 수습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성칠(聖七), 호는 겸곡(謙谷) · 백암(白巖). 황해도 황주 출생. 농촌 서당 훈장 박용호(朴用浩)의 아들이다. 국권을 잃은 후 중국에 망명해 독립운동에 종사할 때에는 박기정(朴箕貞)이라는 별명을 쓰기도 했고, 태백광노(太白狂奴) 또는 무치생(無恥生)의 별호를 쓰기도 하였다.
10세부터 17세까지 아버지의 서당에서 정통파 성리학과 과거시험 공부를 하였다. 과거공부에 회의를 느껴 고향을 떠나 당시 황해도 일대에서 이름나 있던 안태훈(安泰勳: 安重根의 아버지)과 교우하면서 문장을 겨루어 황해도의 양 신동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이후 전국을 답사하던 중 1880년(고종 17)에 경기도 광주 두릉(斗陵)에 사는 정약용(丁若鏞)의 제자인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을 찾아가서 정약용이 저술한 정법상(政法上)의 학문을 섭렵하면서 실사구시의 학풍을 가지게 되었다.
1882년에 상경해 서울에 머무는 동안 7월의 임오군란을 목격하고 시무책을 지어 국왕에 제출하였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매우 실망해 낙향, 태천(泰川)의 큰 학자 박문일(朴文一)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1885년 어머니의 간절한 요구에 따라 향시에 응시해서 특선으로 뽑혔다. 그 뒤 1888년부터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6년간 능참봉을 한 것이 관직생활의 전부였다. 이 시기에 박은식의 성리학은 높은 경지에 도달해 서북지방에서는 물론이요 중앙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름높은 성리학자로서 자신의 학문을 정립한 후인 1898년에 독립협회의 사상과 운동의 영향을 받고 성리학과 위정척사사상에서 개화사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1898년에 독립협회에 가입해 회원이 되었다. 그 해 11월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만민공동회에서는 문교부장급 간부로 활동하였다.
1898년 9월 남궁억(南宮檍) · 유근(柳瑾) · 나수연(羅壽淵) 등이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한 후에는 장지연(張志淵)과 함께 주필(논설기자)이 되었다.
독립협회가 강제해산 당한 후에는 1900년부터 경학원(經學院) 강사와 한성사범학교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이 때 교육진흥책을 논구하는 『겸곡문고(謙谷文稿)』와 『학규신론(學規新論)』를 저술하였다.
1904년 7월 양기탁(梁起鐸)과 베델(Bethell, E. T., 裵說) 등에 의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창간되자, 양기탁의 추천으로 이 신문의 주필을 지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써서 일제를 비판하였다. 이에 일제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정간시켰다.
1906년에 복간되었으나 장지연이 복귀하지 못하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지키기 위해 1910년 8월까지 이 신문의 주필로서 활동하였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는 주로 객원으로서 논설만 기고하였다.
1906년 이후의 박은식의 애국계몽운동은 광범위한 부문에서 정력적으로 전개되었다. 박은식은 이 시기부터는 완전히 변법적 개화사상가가 되었다. 위정척사사상과 유림을 신랄히 비판하면서 국권 회복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서 개화사상과 신학문에 힘쓸 것을 계몽하였다.
1906년 3월 창립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기관지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에 많은 애국계몽 논설들을 발표하였다. 1906년 10월에는 자신이 앞장서서 서우학회(西友學會)를 조직하였다.
기관지인 『서우(西友)』의 주필을 맡아서 국민을 계몽하는 데 진력하였다. 1906년 12월에 창간호를 낸 후 1908년 1월까지 모두 4책을 낸 『서우(西友)』를 모두 직접 편집하고 지도하였다.
1907년 4월 양기탁 · 안창호(安昌浩) · 전덕기(全德基) · 이동녕(李東寧) · 이동휘(李東輝) · 이회영(李會榮) · 이갑(李甲) · 유동열(柳東說) 등을 비롯한 다수의 애국계몽운동가들에 의해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해 원로회원으로서 교육과 출판 부문에서 활동하였다.
신민회의 방침에 따라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가 통합해 1908년 1월 서북학회(西北學會)가 창립되었다. 박은식은 실질적으로 이 학회를 지도하고, 기관지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의 주필로 적극 활동하였다.
또한 서북학회의 산하 교육기관으로서 서울에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 구실을 수행하였다. 처음에는 이종호(李鍾浩)를 교장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이종호가 동지들과 함께 독립군기지의 창설을 목적으로 국외로 망명하자,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신교육 구국운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어 서북학회 담당지역에 서북협성학교의 지교(支校) 설립을 추진해 1908년 5월부터 1909년 말까지 사이에 63개 지교를 설립하였다.
이 무렵 일제는 신기선(申箕善) 등의 대동학회(大東學會)를 내세워 유림계를 친일화하려는 정치 공작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항해 장지연 · 이범규(李範圭) · 원영의(元泳儀) · 조완구(趙琬九) 등과 함께 대동교(大同敎)를 창립하였다.
박은식은 대동사상(大同思想)과 양명학(陽明學)에 입각해 유교를 개혁해서 유림계와 유교문화를 국권회복운동에 서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때 유교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저술된 것이 『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이다.
1905∼1910년 사이에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황성신문(皇城新聞)』을 비롯해 다수의 신문과 잡지들에 실로 많은 논설을 썼다. 이로써 국권 회복의 실력 배양을 위한 신교육 구국사상 · 실업 구국사상 · 사회관습 개혁사상 · 애국사상 · 대동사상 등을 설파해 애국계몽운동을 고취함으로써 한말 최고의 애국계몽사상가로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박은식의 애국계몽사상의 또 하나의 특징은 애국계몽운동을 의병운동과 연계지을 것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박은식은 이것을 일제의 검열 하에서 연무제진(聯武齊進)이라고 표현했는데, 무장운동(의병운동)과 연계해 함께 나란히 전진한다는 의미이다. 박은식의 이러한 사상과 활동은 애국계몽운동기(1905∼1910)에 활동한 사상가들 중에서 전국민에게 애국사상을 배양하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최고의 애국계몽사상사로 후학들에 의해 평가되고 있다.
일제는 1910년 8월 한국을 완전히 식민지로 병탄한 직후 『황성신문(皇城新聞)』 ·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를 비롯한 모든 신문과 잡지와 언론기관들을 폐쇄하였다. 박은식이 저술한 모든 저서들도 ‘금서(禁書)’로 처리되어 발행과 독서가 금지되었다.
박은식은 이러한 무단탄압으로 한국 민족의 ‘국혼(國魂)’이 들어 있는 역사책들이 모두 압수, 소각되어 국민과 다음 세대들이 한국 민족의 역사를 잃어버려 한국인의 긍지와 민족성마저 상실하지 않을까 매우 우려하였다.
“국체(國體)는 비록 망했지만 국혼이 소멸당하지 않으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역사마저 불태워 소멸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탄식하였다. 박은식은 마침내 1911년 4월 독립운동과 국혼이 담긴 역사서를 쓰기 위해 망명을 결행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국경을 탈출해서 만주의 환인현(桓仁縣) 흥도천(興道川)에 있는 동지 윤세복(尹世復)의 집에 1년간 머물면서 저술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독실한 대종교(大倧敎) 신도인 윤세복의 영향으로 대종교 신도가 되었다.
당시 저술한 책들은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 ·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등이다.
1912년 상하이로 가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고, 동포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였다. 1914년에는 홍콩으로 가서 중국인 친우들의 요청으로 중국어잡지 『향강(香江)』의 주간이 되었다.
이 시기에 캉유웨이[康有爲] · 량치차오[梁啓超] · 탕사오이[唐紹儀] · 징메이주[景梅九] 등을 비롯한 다수의 중국혁명동지회 계통 인물들과 친교를 맺었다. 『향강』을 통해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다가 폐간당하자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상하이에서 『안중근전(安重根傳)』을 저술하고, 망명 후 꾸준히 집필하던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완성해 중국인 출판사에서 1915년에 간행하였다. 『한국통사(韓國痛史)』는 3편 114장으로 구성된 대작이다.
1864년부터 1911년까지의 한국근대사를 일반근대사, 일제침략사, 독립운동사의 세측면에서 일제 침략을 중심으로 하나의 체계로 서술하였다.
박은식은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일제침략사를 중심으로 근대사를 서술함으로써 ① 대외적으로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잔학성과 간교성을 폭로, 규탄하고, ② 대내적으로 국민들에게 ‘통(痛)’을 가르쳐 주어 민족적 통분의 격발에 기초한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을 공급하며, ③ ‘국혼’과 ‘국백(國魄)’을 나누어 일제에게 빼앗긴 것은 ‘국백’뿐이요 ‘국혼’은 남아 있으니 ‘국혼’을 잘 유지, 강화해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도록 교육하고, ④ 자손만대에 일제에게 침략당한 아픈 역사의 교훈을 새기고 반성을 촉구하려고 하였다.
『한국통사(韓國痛史)』는 간행 직후 중국 · 연해주 · 미주의 한국인 동포들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비밀리에 대량 보급되어 민족적 자부심을 높여주고 독립투쟁정신을 크게 고취하였다. 일제는 이에 매우 당황해 1916년에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朝鮮半島史編纂委員會: 1925년에 朝鮮史編修會로 개칭)를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조선반도사』를 준비하다가 계획을 수정해 『조선사(朝鮮史)』 37책을 편찬하여 식민주의사관에 의한 한국 역사의 왜곡을 시도하였다.
편찬 동기를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와 같은 독립을 추구하는 역사서의 해독을 소멸시키는데 있다고 밝혔다. 여기서도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박은식은 상하이에서 「이순신전(李舜臣傳)」을 저술하였다.
이 시기에 캉유웨이의 위탁을 받아 중국 신문인 『국시일보(國是日報)』의 주간이 되었다가, 이 신문이 얼마 뒤 정간되어 사임하였다. 상하이에서 이상설(李相卨) · 신규식 · 유동열 등 동지들과 함께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團)]을 조직해 그 취지서를 쓰고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이어 다시 상하이에서 신규식 등과 함께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해 단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1918년 연해주 한국인동포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송왕령(宋王嶺)으로 가서 『한족공보(韓族公報)』의 주간으로 일하였다. 그러나 이 신문은 재정난으로 곧 발행이 중단되었다.
이후 한국인촌의 여러 학교를 순회하면서 한국 역사를 강연해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또 『발해사(渤海史)』와 『금사(金史)』를 한글로 역술하고, 「이준전(李儁傳)」을 저술하였다.
박은식은 1919년 3 · 1운동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맞이하였다. 이 때가 61세의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지들과 함께 대한국민노인동맹단(大韓國民老人同盟團)을 조직해 취지서를 쓰고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은 강우규(姜宇奎)를 국내에 파견해 일제총독 사이토[齋藤實]에 대한 폭탄투척의거를 일으켰다.
1919년 8월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와 서울의 한성정부의 통합에 의한 9월의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지원하였다. 이때에도 전면에는 나서지 않고 원로로서 뒤에서 지원하였다.
동시에 상하이에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의 집필을 시작해 1920년 12월 간행하였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 항일무장투쟁까지의 한국 민족의 독립투쟁사를 3 · 1운동을 중심으로 서술해 한국근대사 체계에 또 하나의 고전을 만든 역작이었다.
이 책에서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죄상을 낱낱이 비판하고, 3 · 1운동이 갑신정변 이래의 민족독립운동이 민족 내부에 축적되어 봉기한 것임을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역사의 대세와 국내 정세는 일본 제국주의가 반드시 패망하도록 변화하고 있으며, 3 · 1운동을 전환점으로 한국 민족의 불굴의 독립운동이 반드시 독립을 쟁취하도록 전개되고 있다는 최후의 승리에 대한 낙관적 견해를 표명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 실패 후 임시정부가 극도로 약화되고 독립운동계 전체가 극도의 혼란과 분열에 빠졌다. 우선 사태를 수습하고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의 간행을 지속하기 위해 1924년에 독립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뒤이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1924년 6월 ‘이승만대통령유고안(李承晩大統領有故案)’을 통과시킨 다음 임시정부의 거듭되는 혼란을 수습해 줄 원로로서 박은식을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대통령대리로 추대하였다. 박은식은 사태의 중대성에 비추어 수락하였다.
임시의정원은 1925년 3월 21일 결단을 내려 수년 동안 독립운동가들을 혼란시켜 온 위임통치청원과 기타 실정의 책임을 물어서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통과시켜 이 문제를 일단락지었다.
뒤이어 1925년 3월 23일, 박은식은 임시의정원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튿날인 3월 24일 임시의정원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취임을 선언하였다.
박은식은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기본 방책의 하나로 1925년 3월 30일 헌법개정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였다. 개헌의 초점은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國務領制)를 실시해 국무령을 중심으로 한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박은식은 신헌법에 의거해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총재였던 이상룡(李相龍)을 국무령으로 추천하였다. 이상룡이 선출되자 스스로 대통령을 사임하였다. 박은식이 대통령을 사임하고 은퇴했을 때에는 인후염과 기관지염으로 병색이 완연히 나타나고 있었다.
박은식은 임종이 가까워오자 동포들에게 독립쟁취의 최후 목적 달성을 위해 반드시 단결하라는 간곡한 유촉을 남기고, 장엄한 애국적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앞에서 언급한 이외에 『대동민족사(大東民族史)』 · 『단조(檀祖)』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